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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신이 원한다면 (3/145)

03. 신이 원한다면2021.04.11.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16550938990667.jpg“아, 그럼 아이는……, ……아니, 잠깐. 네? 뭘 원하신다고요?”

16550938990678.jpg“나우크의 공주.”

페르모스가 외알 안경을 치켜들었다.

16550938990667.jpg“주군께서 여인을 원하신다고요? 그것도 이제껏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던 여자를요? 대체 이유가 뭡니까?”

16550938990678.jpg“…….”

티와칸의 수장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평소에도 그는 말이 거의 없었다. 이름도 없고 뿌리도 없었다. 티와칸 용병단에 들어오기 이전의 삶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다. 페르모스조차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이름을 대신해 그를 부르는 말은 블랙이었다. 블랙 말고는 어울리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16550938990667.jpg“주군. 이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지 말입니다. 자기가 기사단장의 씨라는 것을 알면 그 애가 멀쩡히 자라겠습니까? 말이 트이는 순간 가장 먼저 내뱉는 말이 복수가 될 겁니다. 제 어미를 배신자라 부르겠지요.”

페르모스는 열심히 지껄이면서도 블랙이 그 점을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우크를 원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척박하고 가난한 땅을 굳이 갖겠다는 이유는 잘 몰랐지만, 블랙이 원한다면 그것으로 따라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들에게 블랙은 전쟁의 신이 낳은 사생아가 아니었다. 그저 신이었다. 십 년간의 전쟁터에서 블랙은 죽음의 신에 맞서 그들을 구했다. 그들에게는 유일한 신이 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블랙은 나우크가 아닌 나우크의 공주를 더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블랙이 오늘 처음 제대로 얼굴을 맞댄 여자에게 반했을 리는 없었다. 나우크의 공주가 보기 드문 미인이긴 했지만 고작 반반한 얼굴만으로 블랙이라는 사내를 뒤흔들 수는 없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16550938990678.jpg“애는 상관없어.”

다시 블랙의 입이 열리자 페르모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히 주군을 닦달할 수는 없었지만 궁금해서 돌아버리려던 참이었다.

16550938990667.jpg“어째서 그렇습니까?”

16550938990678.jpg“나우크의 공주가 낳은 아이는 그게 누구 씨든 내 아이가 될 것이다. 약탈혼이나 다름없는 이 시점에 순결 같은 걸 바라진 않았어. 마음을 준 인간이 있었다 해도 내가 강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럴 생각도 없고.”

16550938990667.jpg“…….”

페르모스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한 바퀴 굴렸다. 주군의 말이 생각보다 순정적으로 들려와 기분이 이상했다.

16550938990667.jpg“호, 혹시…… 나우크의 공주에게 단순히 나우크만이 아니라 진심이라도 얻고 싶으신 겁니까?”

16550938990678.jpg“진심?”

블랙이 한쪽 눈썹을 웅크렸다. 그것으로 답은 충분했다. 블랙은 나우크의 공주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 유달리 관대한 것도, 애정을 갈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16550938990678.jpg“가져야 하니까 가지려는 것뿐이야.”

16550938990667.jpg“그러니까 왜 하필 나우크를…….”

16550938990678.jpg“원래 내 것이었으니까.”

16550938990667.jpg“네?”

페르모스는 당황해 하마터면 안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16550938990667.jpg“나우크……가요? 그럼 그게…….”

16550938990678.jpg“공주가 혼인이라도 하면 되찾는 게 더 복잡해져. 그 전에 갖겠다는 거야. 그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네가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말할 테니 더는 묻지 마.”

페르모스는 직감적으로 나우크가 검은 비밀로 남아 있는 블랙의 과거 어느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6550938990667.jpg“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저가 감히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16550938990667.jpg“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신이 뜻하면, 이루어져야 했다. * * * 눈을 찌르는 새벽빛은 난폭했다. 리에네는 밤새 잠들지 못했던 눈을 다독이며 창가로 향했다.

16550939015161.jpg“……안녕히.”

새벽 내내 차가워진 창틀에 이마를 기대고 있으려니 한기가 발끝까지 내려오는 듯했다. 리에네는 연인에게 보내는 작별인사를 나직하게 읊었다. 짙고 선명한 초록 눈에는 안개처럼 눈물이 고였지만, 끝내 흘러내리지 않았다. 울면 안 돼. 그건 체력을 너무 많이 빼앗아. 리에네가 스스로를 다독이듯 혼잣말을 했다. 안녕히. 부디 죽음의 땅에서는 온전히 당신만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자신은 끝내 비겁했다. 연인을 연인이라고 부를 용기도 없었다. 아르사크 가문의 기사단장을 연인으로 삼은 것은 일종의 타협이자 거래였다. 저에게는 이 왕국을 온전히 보전할 힘이 없었고, 연인의 가문은 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나우크의 통치권을 원하는 연인의 가문이 강제한 것과 다름없었지만, 연인은 늘 자신의 애정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리에네가 자신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언젠가는 그 애정이 저를 함락시켰을 날이 왔을지도 몰랐다. 연인의 죽음은 새벽처럼 뼈가 시린 상실감을 가져왔다. 비로소 리에네는 저를 진심으로 지켜 줄 사람이 하나 더 줄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죽음이 나우크에 미칠 손실을 계산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냉정한 연인이었는지도.

16550939015161.jpg“……나는 그 사람을 죽어서까지 이용하고 있는 거야.”

리에네가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아이가 있단 말은 거짓이었다. 연인에게는 입맞춤 이외는 무엇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키스를 할 때마다 연인은 갈증에 타들어 가는 사람처럼 저를 보았다. 저에게는 그 갈증이 번번이 통치권을 향한 클라인펠터 가문의 야욕과 겹쳐 보였다. 만에 하나 정말로 연인의 아이를 가졌다면, 스스로가 그 사실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16550939015161.jpg“괜찮아. 아이는…….”

어떻게든 속일 방법이 있겠지. 적당한 때에 유산이 되었다고 하든가, 혹은 정말로 아이를 갖든가. 그런 거짓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이 작은 성을 하나 지키는 일이 저에게는 너무 벅찼다. 그자를 과연 속일 수나 있을까. 생각이 이번에는 그 모순적인 남자를 향했다.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흉포한 존재감을. 그러나 상처 난 손바닥에 조심스러운 키스를 남기는 이중성을.

16550939015161.jpg“…….”

리에네는 문득 손을 떼어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손톱 모양을 따라 붉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 상처가 꼭 남자의 입술 자국 같아 파르르 손이 떨렸다. 평생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50939015161.jpg“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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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에네가 작은 한숨을 끝으로 마침내 몸을 돌렸다.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매일 조금씩 부서져 가는 왕국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기워야 하는, 그런 길고도 괴로운 하루를. * * *

16550938990667.jpg“……해서, 석 달간의 세수는 확보를 했습니다. 물론 지출이 될 만한 것을 최대한 줄인 결과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마실로우가 왕의 집무실을 찾았다. 선왕이 별세한 뒤로 집무실은 리에네의 차지가 되었지만, 그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은 별반 없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수입이 줄고 있었다. 남국의 그 어느 왕국보다 풍요롭던 나우크는 이제 남국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20년간이나 이어지는 가뭄 탓이었다. 그나마 올해는 비가 제법 온 탓에 어찌어찌 세수를 확보했다고 했다. 티와칸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올해는 리에네도 하루에 세 끼를 먹는 생활을 할 수 있었을지 몰랐다.

16550939015161.jpg“다행이네요.”

리에네는 마실로우가 건네주는, 숫자가 빼곡히 적힌 서류들을 꼼꼼히 살폈다.

16550939015161.jpg“로드 티와칸의 청혼을 빨리 받아들이길 잘했군요. 그게 아니었다면 이 숫자는 더 끔찍했을 테니까.”

리에네가 가볍게 던진 자조적인 농담은 마실로우를 정색하게 만들었다.

16550938990667.jpg“그래도 청혼을 수락하신 건 성급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클라인펠터 가문과 상의를 하셨어야…….”

16550939015161.jpg“티와칸에서 시체를 돌려주면 장례식 절차는 그쪽과 상의하겠어요. 경이 대신해서 제 깊은 슬픔과 애도를 전해 주세요.”

마실로우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였다.

16550938990667.jpg“왕실에서 공식적인 애도 기간 또한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클라인펠터 가문의 장자가 죽었으니까요.”

그는 지금까지도 리에네가 티와칸의 청혼을 수락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티와칸에서 연인의 칼을 증거 삼아 내밀지 않았다면 내란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16550939015161.jpg“그건 새 정혼자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요? 일단 티와칸과 얘기는 해보겠다고 하세요.”

16550938990667.jpg“저런…… 그 야만인들에 관해 예의 운운했다간 대의장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마실로우의 눈썹 끝이 아래로 처졌다. 턱을 쓸어내리는 손짓에는 언짢음이 가득했다. 귀족의회의 대의장은 죽은 연인의 숙부였다. 대의장의 자리는 클라인펠터 가문이 대대로 보장받은 직위 중 하나였다. 왕실을 견제하고 보좌할 신성한 의무를 부여받은 게 대의장이었으나 나우크의 대의장은 몇 년째 오로지 견제라는 의무 하나만 수행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견제가 아니라 반역이 될지도 몰랐다. 대의장은 자신의 조카가 아르사크 가문의 수호기사단장을 거쳐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사람이었다. 조카가 죽고 리에네는 다른 남자와 약혼한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게 뻔했다. 연인의 진심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것이었다. 만약 리에네와 혼인해 연인이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면, 대의장은 그를 등에 업고 이 작은 왕국을 바닥부터 탈탈 털어먹었을 것이다.

16550938990667.jpg“그런 얘기는 직접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예의는 야만인들에게만 갖춰야 할 게 아닙니다, 공주님. 클라인펠터 가문이야말로 지켜 마땅한 예의를 받아야 합니다.”

16550939015161.jpg“유감이지만 나는 국정 업무에 약혼 준비까지 너무 바빠 부고를 직접 전할 시간이 없으니 양해 바란다고도 해주세요. 그게 너무 안타깝다면 대의장께서 몇 년 전부터 진작 손을 놓으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시던가요.”

마실로우가 두 볼을 훅 붉혔다.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16550938990667.jpg“공주님. 클라인펠터 경이 죽었다고 해서 그 가문을 등한시할 수는 없습니다. 큰 대가가 뒤따를 것입니다. 저들은 선왕 때부터 나우크의 역사를 함께 한 집안입니다.”

16550939015161.jpg“그걸 모르지는 않아요.”

리에네가 피곤에 물든 얼굴로 쓰게 웃었다.

16550939015161.jpg“경도 아시겠지만 저 역시 티와칸의 청혼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서 죽은 이들이 백에 달하고요. 그 이상 뭘 더 하라는 말인가요. 제가 더 많은 이를 희생시켜서 클라인펠터 가문의 체면을 살려드려야 할까요?”

16550938990667.jpg“……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할 말이 사라졌던지 마실로우가 그쯤에서 물러났다. 리에네는 뒤돌아서 가는 그에게 부러 눈길을 주지 않았다. 쿵! 집무실의 문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닫혔다.

16550939015161.jpg“추모조차 이런 신경전을 벌여야 한다니.”

리에네가 나직이 탄식했다. 나는 대체 얼마나 끔찍한 연인이었던 걸까…….

16550939015161.jpg“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네.”

하다못해 상복이라도 입어야 할 듯싶었다. 한 번도 사랑하지 못했던 연인의 시체를 맞이하기 위해. * * *

16550939015161.jpg“……뭐라고요?”

하지만 검은 드레스는 입을 수 없게 되었다.

16550938990667.jpg“웨로즈 경께서 급히 전하라 이르셨습니다. 야만족의 수장이 직접 시체를 가지고 온답니다. 옷을 다시 갈아입으셔야겠네요, 공주님.”

16550939015161.jpg“하…….”

그 짐승처럼 예리한 눈을 다시 마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꽉 죄이는 기분이었다.

16550939015161.jpg“어쩔 수 없겠네요. 다른 옷을 주세요. 환영의 뜻을 담은 것으로.”

16550938990667.jpg“네, 공주님.”

리에네의 유모이자, 지금은 나우크의 시녀장 노릇을 떠맡고 있는 플램바드 부인이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16550938990667.jpg“야만인을 환영까지 해야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공주님. 너무 잘해주려 하지 마세요.”

몇 벌 되지 않는 옷 중에서 개중 가장 화려한 것을 골라 온 플램바드 부인의 얼굴에는 안쓰러움과 분노가 고루 뒤섞였다.

16550938990667.jpg“너무 아름답게 보이지도 마시고요. 그럴 자격이 없는 것들입니다.”

16550939015161.jpg“그러기엔 늦었죠.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이제는 공식적인 정혼자예요. 그를 푸대접하는 건 저 스스로를 푸대접하는 것과 같아요.”

16550938990667.jpg“하지만…… 하지만 그 야만인은 공주님의 연인을 죽인 원수가 아닙니까.”

마치 저를 대신하듯 눈물을 울컥 쏟으려는 유모를 리에네가 말렸다.

16550939015161.jpg“플램바드 부인.”

16550938990667.jpg“네, 공주님.”

16550939015161.jpg“그 사람은 죽었고, 나는 정혼을 한 몸이 되었어요. 이제 그 사람을 입에 담는 것은 나와 나의 정혼자에게 무례가 됩니다.”

16550938990667.jpg“어쩜…….”

16550939015161.jpg“어서 옷을 갈아입혀 주세요. 늦으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테니까요.”

16550938990667.jpg“…….”

플램바드 부인은 차마 대답은 나오지 않는지 고개만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혀 주는 손길은 평소처럼 야무졌지만 중간중간 손끝이 떨리기도 했다.

16550939015161.jpg“아, 그리고 하나 더요.”

플램바드 부인이 속치마 끈을 조이기 시작하자 생각이 떠올랐다.

16550938990667.jpg“말씀하세요, 공주님.”

16550939015161.jpg“이건 다른 사람한테는 아직 비밀인데, 저는 아이를 가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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