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동침 계획2021.04.14.
“……네?”
부인이 너무 놀란 나머지 당기던 끈을 놓아 버렸다. 후르륵 풀린 속치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를 가진 게 표시가 나려면 얼마나 걸리죠?”
“그, 그게…… 그러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말을 더듬는 사이, 이번에는 경비대가 달려와 문을 두들겼다. 쿵쿵.
“공주님께 알립니다. 티와칸의 수장이 성문 앞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웨로즈 경이 성문을 열도록 허락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속바지 차림이 된 리에네와 플램바드 부인의 안색이 변했다. 유모와 눈을 한 번 마주친 리에네가 천천히 말했다.
“……성문을 열어 주고, 내가 곧 간다고 전하세요.”
플램바드 부인이 허겁지겁 옷을 다시 입히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워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은 플램바드 부인이었지만, 화사한 옷을 입은 리에네는 유감스럽게도 몹시 아름다웠다. 창백해진 안색이 가느다란 목과 기묘하게 어우러져 금방이라도 꺾일 위태로운 꽃을 보는 듯했다. * * *
“…….”
본성의 앞마당에 관 여섯 개가 놓였다. 쿵, 하고 바닥에 관이 떨어지는 여섯 번의 소리 다음에는 그저 침묵이었다. 리에네는 환영 인사를 잊고 뚜껑이 닫힌 관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섯 개의 관은 모두 똑같았다. 이중 어떤 게 연인이 담긴 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청한 대로 훼손 없이 시체를 가져왔습니다.”
제 이름을 페르모스라고 밝힌, 얼굴에 재미난 장치를 댄 남자가 말했다.
“청혼을 받아들이신 나우크의 공주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정혼자의 첫 번째 선물이 시체라니. 섬뜩한 일이었다. 리에네가 작은 대꾸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 선물을 받았다는 뜻을 드러내자, 블랙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시선이 제 맨얼굴로 곧장 쏟아졌다. 괜히 살갗이 따끔대는 기분이었다.
“무리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관도.”
기습을 감행한 시체가 온전히 돌아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정중히 관에 담겨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저 야만인들이 정혼한 입장이라고 나름 체면을 세워 준 것이었다. 리에네는 그런 일에도 감사해야 하는 처지였다. 티와칸의 수장이 한 걸음을 더 다가왔다. 리에네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저 시선이 꼭 살갗에 들러붙어 더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는 하루가 아주 긴 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연인이 죽은 지 이게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 사람에게.
“이제 결혼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
연인의 시체도 담겨 있을 여섯 개의 관은 선물이자 동시에 협박이었다. 슬픔에 정신이 팔려 내가 한 청혼을 잊지 말라는.
* * * 자리가 옮겨졌다. 집무실은 좁았고, 회당은 너무 넓었다. 결국 정해진 곳은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접견실이었다. 한때는 나우크의 주요 가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왕을 찾아와 화친하는 자리였는데, 지금은 그런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묘하게 을씨년스러운 공간에서 양측이 마주 앉았다. 리에네의 편이라고는 웨로즈와 마실로우가 다였다. 다행히 상대측 숫자도 많은 게 아니라서 그럭저럭 대등한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마음속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티와칸의 수장이 단독으로 이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리에네는 끝없이 위축되는 기분과 계속 싸워야 했을 것이다.
“혼사를 길게 끌어 좋을 게 없다는 건 피차 마찬가지일 줄 압니다.”
페르모스가 말을 시작했다. 이제는 나우크에서도 그가 블랙의 오른팔이자 참모 역할을 하는, 사실상 티와칸의 이인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남단이라 해도 추워지는 계절이잖습니까. 그 전에 티와칸은 야영을 접고 지붕 아래 자리를 잡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공주님께서는…….”
페르모스가 잠깐 말을 끊었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입에 걸리는 게 심상찮았다.
“태어날 아이에게 세례를 받게 하려면 마찬가지로 혼인을 서두르셔야 하겠고요.”
“뭐…… 뭐라고?”
마실로우가 벌떡 일어섰다.
“아, 아이라니…… 그게 무슨……? 공주님, 대체 누구의 아이를…….”
당황해 말을 더듬는 그를 향해 양측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울렸다.
“제 아이입니다.”
“내 아이다.”
리에네와 블랙이 동시에 같으면서 다른 얘기를 했다. 이번에는 리에네가 당황해 블랙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나 싶었다. 블랙은 일말의 당황도 없이 리에네를 마주했다.
“공주님이 낳을 아기는 우리가 혼인하는 이상 나를 친부로 알고 자랄 겁니다.”
임신을 용인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되는 게 가장 무난한 해결책일 것이다.
“아, 그런 뜻이었…….”
“아이의 성이 아르사크가 되는 것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마실로우가 눈을 부릅뜨고 리에네를 쳐다보았다. 비록 이견이 있긴 했지만, 그는 오래도록 고문관을 맡아 온 노련한 정치꾼이었다. 그는 리에네가 연인에게 한 번도 동침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이를 가졌다는 말이 청혼을 거절하기 위한 거짓이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고 리에네를 꾸짖고 있었다. ……나도 알아. 리에네도 동감이었다. 다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을 뿐이었다. 이제 와 임신이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적당한 시기에 유산했다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하든가, 아니면 최대한 빠르게 아이를 갖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춘 리에네가 이를 꾹 물었다. 그렇다는 건……. 하루라도 빨리 저 야만인과 동침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못 해. 눈치챌 거야.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동침하는 데에는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혼인을 하게 되면 아무리 싫다고 한들 동침을 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경험이 없다는 걸 알아채겠지. 그러니 임신을 했을 리도 없다는 걸.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티와칸의 야만성에 대한 소문은 차고도 넘쳤다. 차마 다 표현할 수도 없는 끔찍한 상상들이 속을 메스껍게 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한 말씀 거들겠습니다. 공주님이 낳으실 아기의 통치권은 로드 티와칸의 이름으로 보장될 겁니다. 원한다면 혼인 서약서에 명기하는 것으로 하지요.”
티와칸의 참모는 빈틈이 없었다. 이미 판을 다 짜 둔 모양이었다.
“늦어도 한두 달이면 임신을 감추기 어려울 테니 적어도 보름 안에는 혼인이 이루어져야 할 겁니다.”
“보름이라니!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마실로우가 두 번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보름이라면 예복을 완성하기도 어려운 시간인데!”
“……앉아.”
낮고 뚜렷한 음성이 마실로우의 삿대질을 멈추게 만들었다.
“…….”
움찔 놀란 마실로우가 앉으라는 말을 한 블랙을 쳐다보았다. 너무 옅어서 홍채 주름과 동공이 도드라져 보이는 푸른색 눈을 마주한 마실로우가 주춤주춤 자리에 앉았다. 고상하게 나이 든 왕실 고문관의 얼굴이 그새 해쓱해져 보였다.
“예복은 내가 준비하겠습니다. 혼인식 준비가 부담이라면 공주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결혼을 미루고픈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면…….”
블랙이 잠깐 말을 끊었다. 공백이 생겨났지만 아무도 그 틈에 입을 열지 않았다. 티와칸의 수장은 무슨 말을 하든 강제로 귀를 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들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블랙은 리에네에게 시선을 두고 느릿하게 다음 말을 했다.
“지금 솔직히 말해야 할 겁니다.”
이번에는 리에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하기 싫다는 것 외에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저런 남자와 혼인해서 동침할 수 있을까. 그것도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속여 가면서. 경험이 있는 것처럼 익숙한 척을 하면서. 처음이라 느껴야만 하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못 할 거야. 그런 거짓말은.
“공주님…….”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웨로즈가 리에네를 작게 불렀다. 리에네는 자신이 탁자 아래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보름이 부족합니까?”
일 년을 주어도 부족할 것이다.
“예복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우크의 사정이야 티와칸에서도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보름 만에 혼인식을 치를 재원을 마련할 수는 없습니다.”
리에네의 말이 완전히 거짓만은 아니었다. 돈은 나우크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다. 연인의 장례식조차 사치가 되는 이유였다.
“돈이 문제였습니까?”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리에네가 입술을 작게 문 다음 대꾸했다.
“네.”
블랙이 수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뜻을 알아차린 페르모스가 가져온 상자 뚜껑을 열어 뭔가를 꺼내 들었다. 꺼낸 것은 돌돌 만 종이였다. 종이를 건넬 줄 알았더니 페르모스는 상자를 마실로우에게 밀었다.
“약혼 선물입니다. 관 여섯 개보다는 이쪽이 더 선물 같겠군요.”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상자를 가득 채운 것은 금이었다.
마실로우가 너무 놀라 상자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리에네를 쳐다보았다.
“공주님…….”
놀라기는 리에네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페르모스는 돌돌 만 종이를 펴서 잘 보일 수 있게 돌려놓았다.
“이건 공주님의 동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두 분의 혼인 이후, 티와칸은 아르사크의 수호기사단이라는 새 이름을 갖겠습니다.”
지금 나우크에 남은 병력의 열 배나 되는 병력이 생기는 셈이었다.
“뭐라고요?”
뜻하지 않은 행운에 리에네가 날 선 반응을 보였다. 너무 좋은 일은 믿기 어려운 법이었다. 공짜가 아닐 것이다.
“티와칸 용병단을 전부 아르사크 가문에서 고용하라는 말입니까? 그건 선물로 준 금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문제라는 걸 잘 아실 텐데요.”
페르모스는 리에네가 할 말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거침이 없었다.
“티와칸을 수호기사로 두는 비용은 혼인으로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되실 로드 티와칸이 부담하실 겁니다.”
“네……?”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블랙을 돌아보았다. 내내 피하고 있던 블랙의 시선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마주치는 순간 시선이 시선을 잡아챘다. 잠깐의 시간 동안 스스로 눈을 움직일 수 없는 저주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그걸…… 믿으라는 건가요?”
용병단은 전쟁을 대신 치러 주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그들을 고용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다. 티와칸의 이름만으로도 나우크는 남국의 다섯 왕국 중에서 가장 튼튼한 요새가 되겠지만, 너무 과했다. 티와칸을 고작 경비대로 쓰겠다는 건 이해타산을 떠나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내가 약혼녀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블랙의 대답이었다.
“그런…… 나우크에는 그만한 병력을 유지할 여력도 없을 뿐 아니라, 필요도 없습니다. 척박하고 가난한 땅을 탐내는 이가 없으니까요.”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있었잖습니까.”
“……네?”
당황으로 리에네의 입술이 벌어졌다. 블랙의 시선이 벌어진 입술로 향했다. 집요하게 입술을 휘감는 그 시선은 얼핏 탐욕처럼 보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목적이 나우크든 아니면 공주님이든 간에.”
“…….”
리에네가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혹시라도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페르모스가 재빨리 쐐기를 박았다.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나우크에서도 동의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혼인은 보름 뒤. 늦어도 내일 석양이 지기 전까지는 공고를 해야겠군요. 그건 나우크의 경비대장께서 맡아 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사단이 쓰던 거처도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야만인들은 치밀했다. 이쪽이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적재적소에, 그것도 아주 신속히 쳐 놓았다.
“시간이 촉박하니 이쪽은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고 싶습니다. 병력을 이동시켜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이틀은 꼬박 필요할 것 같군요. 기사 서임식은 아무래도 혼인 이후로 미뤄야겠는데요.”
페르모스가 씩 웃으며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기시켰다. 혼인이라는 두 글자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