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욕망의 이유 (5/145)

05. 욕망의 이유2021.04.18.

회담이 끝났다. 페르모스는 말한 대로 병력의 동과 재배치를 논의한다며 웨로즈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티와칸이 제멋대로 성 안을 침범하기 전에 명확한 혼인 계약서를 완성해야 하는 마실로우도 허둥지둥 접견실을 떠났다. 갑옷 같은 침묵이 두 사람만 남은 공간을 짓눌렀다. 분명 티와칸의 수장과 자신의 사이에는 서른 명이 둘러앉고도 남을 수 있는 커다란 탁자가 있었지만, 리에네는 맨몸으로 그에게 깔려 있는 기분이 들었다.

16550939351169.jpg“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리에네가 더는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16550939351175.jpg“뭐든지.”

블랙이 리에네를 흉내 내듯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하려는데, 그가 말보다 앞서 리에네의 곁으로 다가왔다.

16550939351175.jpg“어디로 갑니까.”

16550939351169.jpg“나우크의 후원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남자는 너무 커. 그래서 자꾸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긴장감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리에네는 블랙을 피해 반대편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16550939351169.jpg“잠시 기다리세요. 플램바드 부인을…… 아, 동행할 유모를 부르겠습니다.”

16550939351175.jpg“동행은 없어도 됩니다.”

16550939351169.jpg“아뇨. 외지인과 산책을 할 때는…….”

블랙이 리에네의 말을 툭 잘랐다.

16550939351175.jpg“나는 외지인이 아니라 공주님의 정혼잡니다.”

……맞아, 그랬지. 리에네가 잘근 입술을 씹었다. 잠깐 동안 야만인이 어떻게 그런 예의를 알까 싶었지만, 블랙이 팔을 내미는 바람에 의문은 그대로 흩어졌다.

16550939351169.jpg“…….”

리에네는 체념처럼 속눈썹을 내리깔고 블랙이 내밀 팔에 제 손을 끼웠다.

16550939351169.jpg“아…….”

팔이 너무 단단해 깜짝 놀랐다. 리에네가 놀라 동작을 멈추자 블랙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16550939351175.jpg“무슨 일입니까?”

16550939351169.jpg“아뇨, 그…… 아닙니다.”

리에네는 잊어 달라는 듯 앞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 전에 손가락을 붙들리는 게 먼저였다.

16550939351175.jpg“상처.”

16550939351169.jpg“……?”

16550939351175.jpg“약을 안 바른 모양입니다.”

블랙에게 손끝이 붙잡힌 손바닥에는 어제 만든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오늘 생긴 상처도 하나 더 있었다. 자그마한 반달 모양의 상처는 손톱자국이라는 걸 숨길 수도 없었다.

16550939351175.jpg“이번에는 뭘 참아야 했습니까.”

딱히 답을 요구하는 것 같지 않은 느릿한 의문을 뱉어내며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이 잡히는 것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그 손이 블랙의 입술에 닿는 것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그 입술이 따끔한 상처를 위로하듯 덮어 초옥, 살갗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16550939351169.jpg“……그만!”

리에네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손을 잡아 뺐다. 블랙이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또다시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도록 주먹을 움켜쥘 뻔했다.

16550939351169.jpg“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산책을 하는 게…….”

16550939351175.jpg“나는 안 괜찮습니다.”

나는 당신의 상처가 싫다는 저 다정한 말은, 짐승 같은 눈을 한 남자의 입술을 거치자 조금도 다정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숨을 조이는 위협 같았다.

16550939351175.jpg“몸을 아끼세요. 공주님의 상처는 이제 모두 내 책임이 될 테니.”

제 몸에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인 남자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스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블랙은 오늘도 리에네에게 뒤엉킨 모순이 되었다.

16550939351169.jpg“……이쪽입니다.”

리에네는 다시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리라 결심한 뒤에야 다시 팔짱을 낄 수 있었다. 접견실의 경비대에게 행방을 미리 알린 뒤 리에네는 이제 정혼자라 불러야 하는 남자와 후원으로 향했다. * * * 후원이라고 해도 넓기만 할 뿐, 아름답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가뭄이 시작된 이후로 꽃은 아주 짧게 피었다가 시들었다. 물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은, 잎이 뾰족한 덤불이 후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런 데서 산책을 하자고 하다니 너무했나. 팔짱을 낀 몸이 너무 가까이 맞붙지 않도록 신경을 쓰다가도, 리에네는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삭막한 경치에 어쩐지 민망해졌다.

16550939351169.jpg“…….”

일부러 조롱하는 의미로 데려왔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곳을 고른 게 아니라 나우크의 대부분은 이런 상태였다. 척박하고 메말랐다. 성을 가운데 두고 아홉 줄기로 갈라져 콸콸 쏟아지던 웅장한 폭포는 흔적도 없이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보면 느끼려나. 이 땅을 그렇게 얻어 낼 가치가 없었다는 걸.

16550939351175.jpg-공주님이든 이 땅이든 누군가는 탐을 낼 겁니다.

리에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블랙이 내뱉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16550939351169.jpg“아니…….”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을 내뱉었다.

16550939351175.jpg“뭐가 아닙니까.”

블랙이 걸음을 뚝 멈췄다. 엉겁결에 고개를 들어 올린 게 실수였다. 또 눈이 묶여 버렸다.

16550939351169.jpg“…….”

리에네가 마른침을 삼켰다. 저 눈이 문제였다. 피할 수도, 그렇다고 마주할 수도 없는 눈. 무섭지만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거부할 수 없기에 두려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16550939351169.jpg“……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볼 게 없는 곳이라 산책을 청한 것이 후회되어 나온 소리였습니다.”

16550939351175.jpg“볼 게 없진 않은데.”

블랙의 대답이 느리게 귀를 파고들었다.

16550939351175.jpg“공주님이 있으니까요.”

16550939351169.jpg“…….”

저건 무슨 소릴까. 내가 볼만하다는 걸까, 아니면 나를 지켜봐야 한다는 걸까.

16550939351169.jpg“그럼 괜찮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리에네가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16550939351175.jpg“움직이지 마.”

블랙의 느린 목소리가 걸음을 먼저 붙들었다. 의아해 고개를 드는 리에네를, 블랙이 제 몸으로 가리듯 와락 덮었다. 피잉! 퍽! 리에네는 공기를 찢으며 날아온 검은 선 한 줄기가 블랙의 어깨에 꽂히는 것을 보았다. 검은 선의 정체는 화살이었다.  

16550939391515.jpg

  * * *

1655093939152.jpg“저쪽이다!”

화살이 날아온 사실을 알아낸 티와칸의 용병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1655093939152.jpg“놓치지 마라! 그리고 가능한 한 산 채로 붙잡아!”

리에네는 눈이 믿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용병들을 보며, 사실은 단둘만이 하는 산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십 년이 넘게 전쟁터를 구른 용병단을 이끄는 자가 어디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위험을 그리 쉽게 여길 리는 없었다.

16550939351169.jpg“괜찮나요?”

리에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블랙을 살폈다. 블랙의 어깨에 꽂힌 화살은, 자칫 일을 전부 그르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청혼을 수락하는 척하며 뒤로는 사실 이렇게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이건 복수도 구출도 아니었다. 나우크를 자멸의 늪에 빠트리는 길이었다. 설령 블랙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수장을 비겁한 암살로 잃는다면 티와칸은 절대 나우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16550939351169.jpg“일단…… 일단 부축을 먼저…… 여기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보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리에네가 블랙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리에네는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봐 이를 악물어 떨림을 참았다.

16550939351169.jpg“이 일은 나우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로드 티와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16550939351175.jpg“……그건 두고 보면 알 테고.”

리에네의 손을 쳐다보던 블랙이 말했다.

16550939351175.jpg“부축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단단한 팔에 허리를 감긴 사람은 리에네였다.

16550939351169.jpg“로드 티와칸. 다친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16550939351175.jpg“그래서 나도 놀랍습니다. 왜 다치지도 않은 사람이 금방 쓰러질 것처럼 떨고 있는지.”

16550939351169.jpg“…….”

16550939351175.jpg“그럼 걷겠습니다.”

화살이 박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부축해 걷기 시작했다. 부축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 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을 받친 어깨가, 허리를 감은 팔의 존재감이 너무 뚜렷했다. 왜……. 그리고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도. 대체 왜……. 이제 손이 아닌 등줄기가 떨렸다. 이 남자의 팔이 자신의 등에 닿아 있다는 사실에 솜털이 곤두섰다. 화살이 꽂히기 직전, 그가 저를 와락 당겨 안던 순간이 떠올랐다. 단단한 몸이 힘껏 부딪치던 감촉이. 그래서 살갗을 파고들던 맹렬한 감각이. 이 떨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 *

1655093939152.jpg“세상에, 공주님!”

블랙을 응접실로 데려온 리에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플램바드 부인을 마주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1655093939152.jpg“어떻게 된 일이랍니까! 어디를 다치신 거예요! 대체 누가……!”

16550939351169.jpg“제가 아니에요. 로드 티와칸께서 화살을 맞았어요. 의사를 불러오고 뜨거운 물과 수건을 가져다주세요. 어서요.”

1655093939152.jpg“네……? 누가 다쳤다고요?”

플램바드 부인이 영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기에 약간 부끄러워졌다. 그렇다고 사정을 설명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라 리에네는 부인을 채근했다.

16550939351169.jpg“부인. 어서요.”

1655093939152.jpg“아아, 네. 알겠습니다,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허둥지둥 응접실을 뛰어나갔다. 리에네가 고개를 블랙 쪽으로 돌리며 낮게 말했다.

16550939351169.jpg“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16550939351175.jpg“그렇다면.”

등을 감싸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그래도 리에네는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사실 여기까지 어깨에 화살을 맞은 사람의 부축을 받고 올 이유도 없었다. 리에네의 머릿속이 그 이유를 찾아 잠시 헝클어지는 사이, 블랙은 벽난로 앞의 소파를 끌어왔다.

16550939351175.jpg“앉으세요.”

16550939351169.jpg“……네?”

리에네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16550939351175.jpg“말했듯이, 떨고 있으니까. 아직도.”

16550939351169.jpg“…….”

아직도 저 남자의 손이 몸 어딘가에 닿아 있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리에네는 억지로 침착함을 되살렸다.

16550939351169.jpg“저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로드 티와칸의 상처를 돌보는 게 더 급할 것 같습니다.”

16550939351175.jpg“압니다. 그래도 앉아 있어요.”

말을 마친 블랙은 왼쪽 어깨 뒤편에 꽂혀 있는 화살을 힐긋 돌아보았다. 그를 보면 도무지 다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살에 꿰어 본 게 수백 번은 된다는 듯이 상처를 보는 눈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16550939351175.jpg“옷이 걸릴 것 같은데.”

나직한 혼잣말을 뱉어낸 블랙이 리에네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순간 주춤 몸이 굳었지만 블랙의 의도는 리에네의 생각보다 단순했다.

16550939351175.jpg“옷을 벗는 데 손을 빌리고 싶습니다.”

16550939351169.jpg“옷…… 네.”

화살이 꿰어 있으니 옷을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다. 리에네가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섰다.

16550939351169.jpg“가위를 가져올게요.”

16550939351175.jpg“그럴 필요 없습니다.”

리에네는 벌써 몸을 돌리고 있었다.

16550939351169.jpg“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럴 필요가 있었다. 뭐든 그와 단둘이서 너무 가까이 있지 않기 위한 이유가 필요했다. 아직도 그가 자신을 안고 있는 것 같은 이 환통에서 벗어나야 했다. * * *

16550939351175.jpg“다칠 생각까진 없었는데.”

리에네가 사라지고 혼자 남게 된 블랙이 낮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16550939351175.jpg“페르모스가 잔소리를 하겠군.”

그런 것치고 블랙의 무표정은 동요가 없었다. 표정만 보면 방금 전 화살을 맞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16550939351175.jpg“…….”

입을 다물고 눈을 감던 블랙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은 방금 전까지 리에네가 앉아 있던 의자였다. 그가 다치지 않은 팔을 뻗어 의자 위를 툭, 두들겼다. 마치 방금 전까지 그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남아 있는 체온으로 확인하려는 듯이.

16550939351169.jpg-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래도 청혼을 계속하시겠습니까?

손끝을 간질이는 체온처럼 어제 들었던 그 말이 귓속을 간지럽혔다. 말한 대로, 사생아 같은 건 별일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뭔가 그럴싸한 일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제 것이니 가지려 한 것뿐이었다. 나우크에 대한 생각은 그도 같았다. 다 망해 가는 이 척박한 땅은 가지고 있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 이제껏 왕실의 재산을 팔아서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의 통치자가 된다는 건, 리에네가 그랬듯이 밑 빠진 독에 재물을 퍼부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남이 가져간다고 생각하니 거슬렸다. 딱히 욕심은 없었지만 그 거슬림 때문에 청혼을 결심했다. 십 년이나 대륙을 떠돌다 보면 각국의 정세와 동향에 민감해지기 마련이었다. 공개된 연인이 아니더라도 리에네 아르사크를 원할 사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중에서는 나우크를 리에네에 딸려오는 작은 혹 정도로 여길 재력가도 있을 터였다. 남한테 주느니 그냥 갖기로 했다. 갖는 게 목적이라 그 뒤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연인이 있거나 혹은 사생아를 배었거나 상관이 없는 건 그 이유에서였다.

16550939351175.jpg“그런데.”

블랙이 입술을 달싹였다.

16550939351175.jpg“……거슬려.”

갖게 되었어도 계속 거슬렸다. 저를 마주할 때마다 꽉 움켜쥐는 주먹이, 그래서 손톱 모양의 상처가 남는 손바닥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흔들리는 속눈썹이, 겁에 질린 안색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물러서는 법 없이 버텨 내는 그 가냘프고도 강인한 몸이. 툭. 손가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손끝이 더듬던 체온이 그새 사라져 있었다. 갑자기 갈증이 치솟았다. 그는 이 거슬림이 뭔지 제대로 알고 싶었다.

16550939460626.jpg

16550939460633.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