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견딜 수 있다면 (1)2021.04.21.
리에네가 가위를 찾아 돌아왔을 때는 의사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블랙의 수하 페르모스가 이미 필요한 조치를 다 끝내 놓았다. 페르모스와 함께 온 웨로즈는 자신이 도울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플램바드 부인과 함께 어색한 얼굴로 벽장식이 되어 있었다.
“화살에 맞으셨다고요?”
페르모스가 블랙의 어깨에 면포를 감아 주고 물었다. 직접 살갗을 째서 화살을 뽑고, 피를 닦아 상처의 깊이를 가늠한 뒤 약까지 발라 준 당사자가 하는 질문치고는 퍽 이상했다.
“그러니까, 정말 화살에 맞으셨단 말입니까? 주군께서요? 새삼?”
“……시끄러워. 조용히.”
블랙이 페르모스의 입을 다물게 했다. 페르모스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곧 다른 생각이 앗아가 버렸다. 아……. 리에네는 한 손에 가위를 든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옷을…… 벗었구나. 피에 젖은 망토와 셔츠가 찢긴 채 바닥을 뒹굴었다. 블랙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비워 둔 채 그 앞에 앉아 치료를 받았다. 처음에 눈을 자극한 것은 맨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였다. 어떤 것은 컸고, 어떤 것은 작았다. 어떤 것은 희게 살이 차올랐으며 어떤 것은 울퉁불퉁 도드라졌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그렇게 눈이 닿는 곳의 상처를 보고 났더니 자신이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게 남자의 상반신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제껏 리에네가 보아 왔던 그 어떤 몸보다 역동적이고 생생한 몸이었다. 그리고 모순적이었다. 저렇게 많은 상처를 안은 몸이 조금도 흉하게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 반대였다. 남자의 몸은 골격과 길이를 재려고 들지 않아도 아름다운 조형을 드러냈다. 근사한 조각상 같기도 했다. 거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흠 없는 조각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일부러 표면을 긁어 상처를 덧칠해 놓은 것만 같았다.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리에네가 블랙을 보는 동안 블랙도 리에네를 마주 보았다. 상처를 보고 희게 바래는 안색이나 극적으로 벌어지는 초록색 눈을 그 역시 세세히 관찰했다.
“아직도 쓰러질 것 같은데.”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저 모습으로 단둘만 있었으면 더 이상 동요를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로드 티와칸의 부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리에네가 페르모스에게 물었다.
“아주 심각하지도, 그렇다고 무시할 만큼 가볍지도 않습니다. 장애가 남을 정도는 아니지만 당분간 고생을 할 겁니다. 열도 날 테고, 아무래도 밤에 잠들기가 어려울 겁니다. 혹시라도 독이 발라져 있었다면 한층 더 끔찍해질 테고요.”
독이라는 말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분위기를 한순간 달라지게 만들었다. 웨로즈가 억울함을 담아 목소리를 높였다.
“나우크의 경비대가 합심해 범인을 쫓고 있습니다. 설령 독이 있었다 해도 해독제를 구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범인이야 붙잡힐 테지만, 그보다야 배후가 더 문제지 않습니까?”
야만인들은 예의를 이유로 말을 둘러 하는 법이 없었다.
“저희로서는 양측이 무난하게 협정을 마쳤으니 예기치 않은 화살이 설마 나우크가 감춰 둔 진심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말입니다.”
“무슨 그런 무례한…… 결코 아닙니다! 나우크를 신의도 없는 곳으로 보는 겁니까!”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한 강직한 기사가 화를 냈다.
“웨로즈 경.”
리에네가 웨로즈를 말렸다.
“침착하세요. 신의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은 나우크입니다.”
“공주님!”
“화살이 나우크의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나요.”
“그야…….”
웨로즈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성의 후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화살은 나우크의 물건이 확실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그 역시 상대의 저의를 의심했을 것이다.
“혼인을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결코 나우크의 공식 입장이 아닙니다.”
그게 사실이었다. 리에네는 부디 블랙이 이 말을 믿어 주길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티와칸의 우려를 덜어 드리기 위해 나우크에서는 가능한 모든 일을 하겠습니다. 나우크에서는 혼인 서약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양측이 다시 전투에서 맞서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평화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시는군요, 주군.”
페르모스가 블랙에게 물었다.
“주군께서도 나우크의 공주님과 같은 것을 바라십니까?”
블랙의 대답에 나우크의 앞날이 걸려 있었다.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리에네는 그토록 거부하고자 했던 혼인을 누구보다 바라는 입장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건 여전히 같다.”
그리고 블랙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안도를 느꼈다. 그래서 믿기지 않았다. 저 남자로 인해 빚어지는 모든 감정은 전부 다 모순이었다. 오늘은 연인의 시체가 돌아온 날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벌써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시다면.”
페르모스가 고개를 까닥 숙여 보였다. 외알 안경에서 달칵대는 재미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나우크에 티와칸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 건 확실하니 혼인 전까지는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나우크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이번 일의 배후를 밝히고 정리하는 일은 티와칸이 맡고 싶습니다. 아, 경비대 일을 가로채려는 게 아니니 앞서 오해는 마시고요. 어차피 티와칸은 이제 아르사크 가문의 수호기사단이 되었으니 마땅히 가문의 일원이 된 로드 티와칸의 암살 배후를 처리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웨로즈가 리에네와 마실로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를 거부하면 자칫 배후를 숨기고 있다는 의혹이 더해지기 쉬웠다. 리에네가 탄 배는 이미 뭍을 떠나 물길을 타고 있었다.
“허락하겠습니다.”
오늘 갓 만들어진 혼인 서약서에 적힌 모든 내용이, 혼인식만 빼고 전부 앞당겨 진행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 * * 열이 오를 거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저녁이 되자 블랙은 정신을 잃다시피 잠이 들었다. 리에네는 간헐적으로 의식을 차렸다가 다시 신음을 삼키는 블랙의 곁을 플램바드 부인과 함께 지켰다.
“좀 쉬세요, 공주님. 다시 잠이 든 것 같으니까.”
리에네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블랙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아니…… 눈꺼풀이 움직이잖아요. 잠이 든 건 아닐 거예요.”
“그렇다고 공주님이 계신 걸 알아보지도 않을 겁니다.”
“성의를 보여야죠. 서로에게 다 위태로운 시기니까.”
리에네는 새 수건을 플램바드 부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땀을 좀 닦아 주세요.”
“…….”
망설이다 수건을 받아든 플램바드 부인이 눈물을 글썽였다.
“몸이 닿는 것도 싫으실 텐데 어찌 그런 사내와 혼인을 할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찌 견디시려고요. ……가여운 공주님.”
리에네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부인. 말을 아끼세요. 우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문밖에 티와칸의 사람들이 있어요.”
“어마, 그럼…….”
플램바드 부인은 그때서야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리에네가 부인의 손에서 수건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몸이 닿는 것도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주세요. 내가 할게요.”
……싫은 건 맞아. 이 남자와 몸이 닿는 게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부인이 말하는 그런 감정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이 남자가 싫고 징그러운 건 아니니까. 나는 그냥……. 그럼 대체 뭐가 싫다는 걸까. 리에네는 제 속에도 모순을 느끼며 블랙의 이마를 닦기 시작했다. 싫지 않은데 싫었다. 싫은데 싫지 않았다. 그게 뭔지 혼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저는 그럼 물을 갈아 오겠습니다, 공주님.”
실수 때문에 자리를 지키기 민망했던지 플램바드 부인이 억지로 할 일을 찾아 침실을 떠났다. 선왕이 살아 있을 때 리에네가 쓰던 침실이었다. 그때는 쓸데없이 커다란 침대라고 생각했는데, 블랙이 누워 있으니 어쩐지 비좁아 보였다.
“정신을 차리면 방을 옮기라고 해야겠다.”
리에네가 혼잣말을 작게 중얼대며 수건을 목덜미로 옮기는 순간이었다.
“……방은 괜찮습니다.”
“……!”
놀라서 수건을 놓쳤다. 블랙의 연한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다.
“깨어났……군요.”
대체 언제부터. 어디까지 들었을까.
“나와 닿는 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말부터 들었습니다.”
“…….”
리에네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하필 다친 어깨 쪽으로 떨어진 수건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수건을 다시 집으려면 몸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주세요. 저는 연인이 있던 몸입니다. 반면에 로드 티와칸은 여전히 낯섭니다.”
“나는 아닙니다.”
……뭐가.
“공주님은 내게 낯설지 않습니다.”
블랙의 마지막 말은 너무 작고 나직해 거의 한숨처럼 들렸다.
“견디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입니까?”
“……네?”
블랙의 눈이 움직이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느리고 집요하게 리에네의 표정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열이 나서 그런가. 확인해 보고 싶은데.”
“무슨 말을…….”
“묻는 겁니다.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그게 뭔지.”
블랙이 손을 들었다. 열이 묻은 손이 느리게 뻗어와 리에네의 뺨을 툭 건드렸다.
“이건 괜찮습니까?”
“로드 티와칸. 저는…….”
“말해요. 공주님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뺨을 건드린 손이 왜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뺨을 쓸고 있는지.
“이건 괜찮습니까?”
“…….”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뜨거웠다. 열이 높았다. 물처럼 옅은, 그래서 전부 다 비출 것 같은 푸른 눈은 열기가 고여 혼탁했다. 그가 몹시 뜨거워 보였다. 덩달아 이쪽에도 열이 옮을 것만 같았다.
“열이 높습니다. 로드 티와칸.”
리에네가 고개를 흔들어 그를 벗어났다.
“눈을 붙이고 쉬세요. 많이 힘드시면 진통제를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열이 높긴 하지.”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열에 들뜬 헛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이건.”
리에네는 그가 어느 순간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열이 오른 손이 만지고 있는 게 제 입술이라는 것도. 엄지로 아랫입술을 약하게 문지르며 블랙이 물었다.
“이것도 견딜 만합니까?”
확실히 열이 있긴 했다. 입술에 닿는 손가락은 열이 없는 사람과는 달랐다. 연인과도 달랐다. 몹시 뜨거웠다. 도무지 자의로는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을 만큼.
“이것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입술을 문지르던 엄지가 턱을 따라 내려왔다. 턱선을 느릿하게 쓸다가 목으로 향했다. 뜨거운 손이 살갗을 스치다, 어느 순간부터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속눈썹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떨려왔다. 남자가 뜨거운 이유는 열이 나기 때문일 텐데, 자꾸만 그 열이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연인과 입을 맞출 때에도 한 번 느껴 보지 못했던 열기였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자신이, 이 남자를 원하고 있노라고.
“이제 그만.”
눈을 질끈 감은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눌러 동작을 멈추게 했다. 목을 쥐여서가 아니라, 목을 쥔 손이 너무 뜨거워서 두려웠다.
“무얼…… 견디라는 겁니까.”
리에네는 간신히 눈을 뜨고 블랙의 옅은 푸른 눈을 마주했다.
“뭘 어디까지…….”
“나도 잘 모릅니다.”
열이 오른 자의 대답은 흐리멍덩했다. 블랙은 제 손을 누르고 있는 리에네의 손을 힐긋 보면서 느리게 혀를 움직였다.
“내가 뭘 어디까지 할 작정인지.”
“그건…….”
“공주님이 날 어떻게 대할지 확인해 보려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블랙이 천천히 제 손을 당겼다. 그러자 리에네의 손도 그에게 가까워졌다. 입가로 당긴 손등에 그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짤막한 키스를 남겼다.
“어쩌면 그저 만지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고.”
“…….”
“그게 중요합니까?”
“……네.”
리에네는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 이 약혼을 보통의 평범한 약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로드 티와칸께서는 나우크에 약혼을 요구하셨고, 저는 강제로 연인과 이별을 했습니다. ……그것도 아이를 가진 채로.”
마지막에 한마디 덧붙일 땐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짓말은 쉬운 게 아니었으니까.
“설마 이런 상황에서 마치 서로를 원해 혼인을 약속한 사람들처럼 애정과 열의를 바라십니까.”
“……말했듯이, 모릅니다. 내가 지금 뭘 바라는지.”
평소에는 맹수 같던 눈이 열기에 감겨 몽롱해 보였다. 뭘 모른다는 말은 그래서 진실 같았다.
“내가 아는 건 공주님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