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견딜 수 있다면 (2)2021.04.25.
“그건…….”
몹시 이상한 얘기였다. 빼앗기다니. 누가, 누구한테. 당신이야말로 그 사람한테서 나를 빼앗아갔는데. 블랙은 마치 리에네가 원래 그에게 속해 있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빼앗긴다는 말 같은 걸 하는지요.”
“그리고 지금은 뺏기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도.”
“로드 티와…….”
“다른 자와 혼인이라도 했다면 더 지저분해졌겠지. ……나를 견디기도 더 어려웠을 테고.”
블랙의 혼잣말은 꿈속처럼 흐리고 모호했다.
“입맞춤은 안 되겠습니까?”
몽롱한 눈이 제 입술을 향했다. 리에네는 블랙이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혀를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훑는 것을 알았다.
“네, 저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안 돼. 속아서는. 말라서 껍질이 일어나는 남자의 입술을 보는데 제 입술이 더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리에네는 이 갑작스러운 갈증에 속지 않기로 했다. 열 때문이야. 남자가 열과 욕구를 착각하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열이 내리고 나면 함께 식어 버릴 것이다. 당신의 구애는 진짜가 아니니까. 내 허락이 진짜가 아니었듯이.
“평생 나를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제 구혼자가 아니라 정혼자니까.”
블랙은 여전히 열에 들떠 보였다. 리에네는 평소와 다른 혼탁한 눈을 보며 입술을 질근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허락할 겁니까?”
……어쩌면. 그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열에 취해 있다면. 그렇다면 이 상황을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한 가지를 약속해 주세요.”
“무엇을.”
남자는 이미 많은 것을 약속했다. 나우크의 존속을 약속했고, 사생아의 목숨과 안전을 약속했으며, 훗날의 통치권을 약속했다.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이 혼인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리에네였다. 이로써 리에네는 그 어떤 침략자도 허용하지 않을 막강한 무력을 손에 넣었고, 그 대가 또한 블랙이 리에네를 대신해서 치를 예정이었다. 어쩌면 나우크는 블랙 같은 왕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도리가 없어 비워 놓고만 있던 곳을, 단숨에 채워 줄 수 있는 그런 남편을. 리에네는 이 모든 약속이 언제라도 찢어질 수 있는 서약서 한 장이 아니라 견고한 진실이 되기를 원했다. 그들의 결혼이 진짜가 되길 바랐다.
“가지고 싶어서 가지기로 했다면, 그저 가지기만 하겠다고.”
“무슨 뜻입니까.”
“망가트리거나 없애지 않겠다고.”
블랙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원할 뿐이라고.”
“……약속의 대가로 공주님은 무얼 내어줄 겁니까.”
이번에는 리에네가 숨을 내쉬었다.
“그걸 약속해 주신다면 저 역시 로드 티와칸을 갈망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애를 쓰겠다고…… 그렇게 약속드리겠습니다.”
대답은 아주 빨랐다.
“좋습니다.”
“로드 티와칸…….”
“망가트리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을 겁니다. 청혼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마친 블랙이 리에네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어깨에 화살이 박힌 환자라는 걸 믿을 수 없는 동작이었다. 한 팔에 끌어안긴 리에네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블랙은 눕힐 것처럼 리에네를 안고서는 입술을 덮었다. 살갗이 닿아 빨리는 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 팔이 블랙의 목을 감았다. 그를 안지 않으면 어딘가로 까마득히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남자의 입술이 불어넣는 감각은 완전한 미지였다. 연인의 키스는 절대 이렇지 않았다. 리에네가 아는 키스는 한없이 부드러운 무엇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은 격정은 키스가 아니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격랑이 어느 순간 끝났다. 턱과 목이 이어지는 보드라운 살갗에 입술을 파묻고 있던 블랙이 중얼거렸다.
“내가 어디까지 열을 핑계 댈지 나도 모르겠으니.”
그러면서도 입술은 여전히 맨살에 닿아 있었다. 뒤늦게서야 소름 같은 간지러움이 찾아왔다. 정신을 차린 리에네가 블랙을 밀어냈다. 손끝이 떨리고 있는 걸 애써 보이지 않는 척했다.
“로드 티와칸께서 환자라는 사실을 제가 잊었네요.”
“…….”
블랙은 순순히 몸을 물려주었다.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난 리에네가 태연함을 가장해 인사를 남겼다.
“그럼 쉬시도록 이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부디 쾌차하시길.”
“빨리 나을 겁니다. 이젠 열을 핑계 댈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
블랙이 혼자 꿈에 잠긴 사람처럼 느릿하게 인사를 받았다. 목소리마저 잠에 취한 듯 나직하게 잠겨 있었다.
“잘 자요.”
꿈결 같은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리에네는 저도 함께 꿈에 취할까 봐 재빨리 블랙의 침실을 떠났다. 떠나며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당신이 약속을 잊지 않길. 훗날 내가 당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부디 우리가 약속한 대로 그저 원하기만 하길. * * * 하지만 약속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님.”
리에네가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방이 비어 있을 줄 알았던 리에네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웨로…….”
“쉿.”
웨로즈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도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남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놈들을 따돌리고 온 겁니다. 아직 의심을 사진 않았지만 혹시 따라붙은 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리에네도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무슨 일인가요?”
“공주님께서 꼭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웨로즈는 페르모스를 비롯한 티와칸들과 함께 수색대를 조직해 화살을 쏜 범인을 쫓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무언가를 찾았다. 야만인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을.
“이것…….”
웨로즈가 소매 춤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
웨로즈가 내민 것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길쭉하고 두꺼운 나뭇잎이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나뭇잎일 것이다. 하지만 나뭇잎 끝부분에 실이 묶였던 작은 흔적이 있었다. 이건 연인의 화살 장식이었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겁니다.”
“…….”
“저는 이걸 오늘 화살을 쏜 자의 동선을 수색하던 중에 발견했습니다.”
까마득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의미는 뻔했다. 연인은 죽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죽지 않고 살아서 적들을 속인 뒤 나우크 성 안으로 들어왔을지 몰랐다. ……그리고 활을 쏘았을 것이다. 블랙을 향해.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웨로즈가 저를 부축하려고 드는 바람에 리에네는 자신이 비틀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 아니, 괜찮지 않아요. 그 사람…… 그 사람이 살아…… 있다고요?”
“그건 모릅니다. 누군가가 클라인펠터 경의 화살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증거가 필요했다.
“관…… 아직 열어 보진 않았죠?”
블랙이 가져온 여섯 개의 관이 장례식을 기다리며 왕실 예배당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그중 하나가 연인의 시신인 줄 알았다.
“그렇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네, 그래야겠어요.”
“저도 동감입니다. 하지만 공주님, 그 전에 미리 각오를 해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웨로즈의 강직한 음성은 오늘따라 무겁게 들렸다. 지금 할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라는 것처럼.
“만약 클라인펠터 경이 살아 있다면, 혼인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
그래서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었다. 리에네는 정식으로 이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오늘 저를 감싸며 화살을 맞은 남자에게 이 결혼을 진실로 만들자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 화살을 쏜 게 연인일지도 몰랐다.
“……일단 봐야겠어요. 두 눈으로.”
리에네는 저를 집어삼킬 것 같은 새카만 현기증에 맞서 억지로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런 다음 생각할게요.”
연인이 살아 있다면. 그래서 목숨을 걸고 이 혼인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
리에네는 생각을 덮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예배당을 향해 달려갔다. * * * ……쿵! 관 뚜껑이 덮이며 묵직한 소음을 울렸다.
“……공주님!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웨로즈가 관 뚜껑에 치일 뻔한 리에네를 재빨리 붙들었다.
“그 사람이…… 아닌 거죠?”
방금 열어 본 게 마지막 관이었다. 오늘 블랙이 가지고 온 여섯 개의 관 중에서 연인의 시체는 없었다. 다만 연인인 척 그의 투구를 쓰고 클라인펠터 가의 문장이 수 놓인 망토를 두른 시체는 있었다. 연인을 살리기 위해서 그의 죽음을 대신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었네요.”
창백해진 이마 위로 땀이 고였다.
“그런 걸로 보입니다. 오늘 낮의 화살 또한…….”
“그 사람은 싸울 생각이겠군요. 그렇죠?”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클라인펠터 경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톡. 고였던 땀이 흘러내렸다. 리에네 또한 선택을 해야 했다. 싸울 것인지, 아니면 무력에 굴복할 것인지. 연인의 헌신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열에 들뜬 격정을 믿을 것인지.
“클라인펠터 경은 아마도 대의장에게 신변을 의탁하고 있을 겁니다.”
웨로즈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수색이 소용없었을 것이다.
“그곳이라면 온전히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저들이 모르게 서신이라도 우선…….”
웨로즈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끼이이이익! 예배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거칠게 귓바퀴를 긁었다.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페르모스를 비롯한 티와칸의 용병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저런……. 공주님이셨군요.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 * * 설마…… 들었을까. 예배당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페르모스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리에네의 표정이 까맣게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은 다행히도 어둠 속에 남았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페르모스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렇게나 늦은 시간, 본 궁의 처소에서도 한참 떨어진 예배당에 리에네 공주가 경비대장만을 대동한 채 와 있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시체를 확인하셨습니까? 그것 참 이상하군요.”
페르모스의 외알 안경이 작은 창을 통해 힘겹게 비집고 들어오는 달빛을 반사했다. 차가운 달빛은 마치 칼날 같았다.
“나우크에서는 장례식이 있기 전까지 산 자가 시신을 마주하지 않는 관례가 있지 않습니까?”
“…….”
사실이었다. 리에네와 웨로즈가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주군께서 아셔야 할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건…….”
리에네가 딱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지금은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자칫 연인의 생존 사실을 저들이 눈치채기라도 하는 날에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터였다.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티와칸은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죽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가정에 상황을 끼워 맞춰야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흠.”
페르모스가 못마땅한 속내를 말로는 하지 못하는 대신 그렇게 드러냈다.
“로드 티와칸과 저는 가능한 한 이 혼인을 진실된 것으로 만들자고 서로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네, 그러니까 이자가 공주님의 연인이었고, 공주님께는 따로 이별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씀입니까?”
“……네.”
이대로 속았을까. 이로써 연인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게 이상한 한기를 데려왔다. 리에네는 알몸으로 눈보라 한복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외알 안경이 다시 칼날처럼 반짝였다.
“흠,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주군께도 같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리에네는 속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차분한 태도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는 이만 가야겠습니다. 부디 이 늦은 밤, 수색에 진척이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진심이라면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공주님.”
페르모스가 예배당 입구에서 한 발을 옆으로 물러나 예의를 갖췄다.
“가십시오.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럼.”
리에네가 먼저 등을 돌렸다. 그 뒤를 웨로즈가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