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거짓 죽음2021.04.28.
예배당을 떠나는 길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티와칸의 수색대와 마주치는 뜻밖의 사고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리에네는 예배당을 한참 벗어나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달은 어두웠다. 너무 밝지 않아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지 싶었다.
“서둘러야겠어요.”
리에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작게 운을 떼자 웨로즈가 되물었다.
“무얼 말입니까?”
“유족들에게 연락을 하는 일 말이에요.”
“그야 물론입니다. 유족이라면…… 아.”
혹시 모를 귀를 염두에 두고 빙 둘러 한 말은, 연인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 연락이 닿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찾기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클라인펠터 가에서 숨겨 주고 있을 테니까. 웨로즈 또한 유족이라는 말이 클라인펠터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 공주님. 제 생각도 그게 가장 급한 일 같습니다.”
“제가 장례식을 어떻게 치를지 상의하고 싶어 한단 말을 전해 주세요. 가능한 한 직접 보고 얘기하고 싶다고.”
“그리 전하겠습니다.”
두 사람만 정확한 의미를 아는 대화가 끝나고, 잠깐 멈췄던 걸음이 빠르게 이어졌다. 하지만 리에네의 짐작은 틀렸다. 페르모스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 * *
“거짓말입니다.”
페르모스는 남들이 잠든 시간, 블랙을 찾아왔다. 어찌 보면 적진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에 있는 두 사람은 제 군막 안처럼 느긋해 보였다.
“죽은 건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아닐 텐데요. 그렇다고 하기엔 칼솜씨가 너무 형편없던데. 그리고 투구와 갑옷이 따로 놀았습니다. 마치 투구만 급하게 바꿔 쓰고 기사단장인 척했던 것처럼요.”
“…….”
“물론 이미 다 알고 계시는 일이지요?”
블랙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눈썹을 찡그렸다. 열이 내리기 시작하자 역으로 상처에서 오는 통증이 세밀해졌다.
“흠. 그렇다면 공주님이 어디까지 관여했느냐가 문제겠군요. 처음부터는 아닐 테고…… 어디 보자, 죽은 줄 알고 있다가 시체를 확인해 보고 나서야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아니, 그래도 어차피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 아닙니까. 혼자 살겠다고 부하를 사지에 던져 놓고 도망쳤는데…… 아, 이런.”
페르모스가 뭔가를 떠올린 듯, 이마를 찰싹 내리쳤다.
“숨어들어 왔을 수도 있겠군요. 나우크 안으로.”
성을 포위했을 때 외부로 이어지는 길은 모두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쥐새끼 하나 숨어들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미련이 많은 인간인가 봅니다. 샤르카 왕국에서 지원을 거절당했을 때 진작 도망쳐 제 목숨이나 챙길 일이지.”
아르사크 가문의 기사단장이 샤르카 왕국에 지원군을 요청한 사실은 그들도 아는 일이었다. 나우크가 그러리라는 것도, 샤르카 왕국에서 거절하리라는 것도 전부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이렇게나 주제 파악을 못 할 줄은 몰랐다. 페르모스가 혀를 끌끌 찼다.
“혼자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나우크가 제 손으로 성문을 열었을 때 이미 끝난 일을.”
블랙이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끝난 건 나우크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연인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몰라.”
“그게…… 으으으음.”
페르모스가 몹시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리에네 공주님과 야반도주할 꿈이라도 꾸고 있다는 말입니까?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멀쩡한 귀족이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무엇보다 리에네 공주님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나우크에 대한 책임감이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애초에 그래서 주군의 청혼을 받아들였던 것이고요.”
“귀족이라고 미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을 잇던 페르모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야…… 뭐, 그렇지요. 저야 사랑놀음은 하등 쓸모없는 일이라 여기는 쪽이지만, 거기에 목숨을 거는 인간들은 늘 있었으니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요.”
페르모스가 공연히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나우크에 제법 기반이 있는 인간이라 잡음 없이 처리하긴 힘들 텐데…… 아, 오늘 낮의 화살도 그 인간의 소행이었을까요? 혹시 생김새는 보지 못하셨습니까? 대략적인 키라든지, 아니면 머리카락 색깔 같은 거라도.”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어.”
블랙은 낮에 후원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었다. 제법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었다. 제 귀에 소리가 들렸을 땐 이미 아슬아슬한 시점이었다.
“제법 활을 쏠 줄 아는 자였다는 뜻이겠군요. 아르사크의 기사단장도 활을 쓴다고 했으니 동일 인물이라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아, 그런데 화살을 맞으셨습니다?”
페르모스의 음성이 재미나게 튀어 올랐다.
“일부러 맞으신 거 아닙니까? 제 말이 맞지요?”
“…….”
블랙이 대답을 피했다. 그것이 답이었다.
“아니, 진짜! 꼭 그래야 하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아십니까? 물론 주군께서 기꺼이 부상을 감수하신 덕에 나우크를 장악하는 일이 빨라졌습니다만…… 그래도 부러 맞을 것까진 없잖습니까. 나으려면 그것도 다 고생인데요.”
블랙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런 인간이 연인일 줄은 몰랐는데.”
블랙의 나직한 목소리가 목덜미에 소름을 돋게 했다. 페르모스가 뒷목을 문지르며 주군을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소름이 돋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블랙이 분노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니라 공주가 맞을 수도 있었어.”
“저런…….”
그래서 페르모스는 움찔 신경줄이 조여드는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좀 어이가 없었다. 지금 리에네 공주가 화살을 맞을 뻔했다고 화를 내시는…… 그런 건가? 설마 첫눈에 반했냐 물었더니 아니라 했던 게 고작 하루 전이었다. 그새 마음이 변하신 건가…… 아니, 그래도 그건 너무 앞선 생각이지 않나? 설마 그럴 리가. 블랙이 보통의 사내들만큼이라도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성향이었다면 티와칸을 둘러싼 남색 어쩌고 하는 흉흉한 소문 같은 건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미모에 휘둘리시는 건 아니야. 공주에게 이용가치가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겠지. 혹시라도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고 생각해 봐. 혼인도 하기 전이었는데. 그러면 곤란하지. 아니, 딱히 곤란할 건 없겠지만. 그래도. 그리고 젠장, 제 연인이 맞을지도 모르는데 화살을 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개새끼지.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개새끼한테는 화를 좀 내도 괜찮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하여간 공주님의 배신은 염두에 두셔야겠습니다. 저쪽은 아무래도 좀 더 싸움을 걸어 올 듯한데 어쩌시겠습니까? 좀스러운 수색이 아니라 아예 클라인펠터 가문을 뿌리 뽑는 게 어떻습니까? 그편이 빠르고 간편할 겁니다.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괜히 공주님께 접촉을 시도하기 전에 말입니다.”
“…….”
블랙의 답은 느렸다. 사실은 생각이 느린 것이었다. 페르모스의 말이 옳다는 건 그도 알았다. 이게 전쟁이었다면, 그래서 이겨야 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려는 건 전쟁이 아니라 혼인이었다.
-그저 원하기만 하세요.
그렇게 약속했다. 열 때문이든 뭐든 간에 그 순간 자신이 원해서 한 짓이라는 데에는 핑계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같은 열망을 가지도록 애를 쓰겠습니다.
그건 거짓이었을까. 아니면 연인의 생존을 알게 된 순간 거짓이 되었을까. 블랙은 그것을 알아야 했다.
“아니. 그냥 놔둬.”
“저런.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주가 어떤 인간인지 드러날 것이다. 혼인을 유지할 가치가 있는지, 그 반대인지.”
“흐음…… 그러시다면.”
페르모스도 같은 점을 느꼈다. 티와칸의 신은 나우크를 상대로 전투를 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는 것을.
“일단 감시는 하겠습니다. 공주님께서는 행동이 빠르셔서.”
“눈치채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볼일을 마친 페르모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방을 떠났다.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나우크로 기어들어 온 것은 예상 밖의 일이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십 년을 전쟁터에서 구른 용병들에게 그 정도는 위협 거리가 되지 못했다. 정작 블랙이 거슬리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죽여 버릴 걸 그랬나.”
점점 예리하고 세밀해지는 통증이 뒤섞인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놈이 연인인 걸 알았으면.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도. 리에네의 연인은 위협은 되지 못했지만 짜증을 남겼다.
“거슬려.”
블랙이 거칠게 미간을 문질렀다. 키스를 하기 전까지 그는 리에네의 존재가 거슬렸다. 키스를 하고 나자 이번에는 연인이라는 자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 거슬림이 뭔지, 블랙은 아직 알지 못했다. * * *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리에네는 평소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게 제 눈에도 보였다.
“할 일이 많아. 아프거나 하면 안 돼.”
거울 속에서 유독 창백해 보이는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새 살이 좀 내렸는지 눈이 퀭해 보였다.
“이렇게 가다간 입을 수 있는 옷이 몇 개 안 남겠어.”
저가 가진 옷들이 커서 줄줄 흘러내리는 상상을 하며 리에네가 짧게 웃었다.
“볼만하겠네, 그거.”
그럼 그 남자도 더는 저를 원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무슨 헛소리를. 애초에 내가 보기 좋아서 반한 것도 아니잖아.”
그쯤에서 생각을 접고 리에네는 거울의 뚜껑을 덮었다. 밤새도록 저를 괴롭힌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연인과 연락이 닿을 때까지 미뤄 둬야 했다.
“오늘은…… 아, 상복을 입어야겠구나. 이제부터 장례식 준비에 들어가니까.”
시체가 돌아왔으니 애도의 의미로 검은 옷을 입어야 했다. 나우크의 장례는 삼 일간 치러졌고, 장례식이 끝나는 날 자정에 상복을 벗는 게 관례였다. 괜히 플램바드 부인의 손을 빌릴 것 없이 리에네는 스스로 검은 옷을 찾아 입었다. 옷을 입는 이때는 짐작도 못 했지만, 검은색은 썩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검은 천에 대비되어 흰 피부가 대리석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살짝 헐렁해진 옷은 몸 선을 감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드러냈다. 얇고 부드러운 천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흘러내리듯 살갗에 감겼다. 검은 옷을 입은 리에네는 평소의 미모에 어쩐지 위태롭고도 유혹적인 분위기를 끼얹은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본인은 조금도 자각이 없다는 점에서 더 좋지 않았다.
* * * 리에네는 아침 식사와 진통제, 그리고 새 붕대를 챙겨 블랙이 머무는 침실로 향했다. 헐렁해진 옷이 자꾸만 발목에 감겼다. 연인의 생존을 알게 되고 나서는 블랙을 태연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저는 아직 선택을 내리지 못했고, 그 열병 같던 키스도 잊지 못했다. ……그도 그렇겠지. 가장 무서운 건 그것이었다. 블랙은 그들이 서로를 원하기로 약속했던 그 순간에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그가 지금도 내내 그렇게 뜨거울까 봐 두려웠다.
“후우.”
아주 멀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블랙의 침실이 오늘따라 너무 가까웠다. 문 앞에 도착한 리에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숨을 아무리 쉬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똑, 똑. 리에네가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아침입니다. 잠은 끝났는지요.”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대꾸는 없었다. 아직 자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리에네는 손에 든 것들을 문 앞에 내려놓고 돌아설 생각으로 몸을 숙였다. 쿵,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문을 연 사람은 블랙이었다.
“내가 놀라게 했습니까?”
“아니, 요…….”
“다행입니다. 그건 내가 들겠습니다.”
처음에는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그가 너무 멀쩡히 두 발로 서서 자연스럽게 두 팔로 리에네가 들고 있던 커다란 쟁반을 가져갔다. 한쪽 어깨에 붕대가 묶여 있지 않았다면 그냥 보고 있을 뻔했다.
“무슨 짓입니까!”
리에네가 깜짝 놀라 쟁반을 도로 움켜쥐었다.
“어서 놓으세요. 어깨를 다치셨어요.”
“됐습니다. 무겁지 않아요.”
“무거운 게 문제가 아니…….”
힘을 주어 당겨도 쟁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치셨어요.”
리에네는 쟁반을 붙든 채로 블랙을 쳐다보았다. 눈을 마주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가 다친 게 신경 쓰입니까?”
이렇게 묻는 목소리도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네.”
블랙의 입술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고,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신경 쓰입니다.”
“저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 옷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