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검은 오해2021.05.02.
“……네?”
옅은 색 동공이 목덜미와 그 아래를 훑어 내렸다. 블랙의 시선을 따라 무심결에 고개를 숙이던 리에네의 볼이 뜨듯하게 달궈졌다. 옷이 헐렁해서 그러나. 몸에 썩 잘 맞는 옷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눈치를 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남의 옷에 신경 쓰고 할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의아해진 리에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자기는. 상의는 제대로 입지도 않았으면서. 블랙이야말로 남을 신경 쓰게 하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깨의 부상 때문에 그렇겠지만, 그는 셔츠를 한쪽 팔에만 꿴 채 매듭도 여미지 않았다.
“잘 맞지 않는 옷이 여의치 않아 보여도 양해해 주세요. 상복이 간만이라 그새 치수가 달라진 모양입니다. 아시다시피 곧 장례식이라 새로 상복을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리에네는 블랙의 맨살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한 번 더 쟁반을 잡아당겼다.
“그만 들어가실까요. 아직 팔이 불편하실 테니 식사를 거들겠습니다.”
“…….”
블랙은 잠깐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선선히 틈을 내어주었다.
“안으로.”
“네.”
리에네는 쟁반을 든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준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양새로 블랙과 나란히 침실로 들어갔다. * * *
“아니, 공주님! 옷이 그것밖에 없는 겁니까?”
블랙은 혼자 있던 게 아니었다. 이미 페르모스를 비롯한 수하들이 와서 아침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귀족이 아닌지라 시중이라는 말이 맞을까 싶었지만, 일단 보이는 건 그랬다. 수하들은 씻을 물과 갈아입을 옷을 들여놓았다. 쟁반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든 것처럼 나란히 들어서는 그들을 발견한 페르모스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걸 보니 대체 왜 수하들을 놔두고 어깨를 다친 사람이 손수 문을 열었는지 잠시 궁금해지긴 했다.
“실례일 게 분명하지만 도무지 묻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그 옷을 꼭 입으셔야 했습니까? 네?”
블랙에 이어 페르모스까지 제 상복을 지적하자 리에네는 약간 마음이 상했다. ……그렇게 보기 흉한가. 그래도 대놓고 지적하는 건 너무 무례한 짓인데.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살짝 굳힌 채 말했다.
“애도를 위한 옷입니다. 나우크에서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검은 옷을 입습니다.”
“네? 오늘도 모자라 사흘 내내 그 옷을 입어야 한다고요?”
페르모스가 외알 안경까지 치켜뜨며 다시 한번 말했다. 고작 옷이 좀 큰 것 가지고 저러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제 상복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야…….”
페르모스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블랙의 눈치를 살폈다.
“주군께서…….”
괜찮지 않으실 것 같은데. 블랙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명확했다. 유감스럽게도 검은 옷을 입은 리에네 공주는 너무 도드라졌다. 제 눈에도 지나치게 예쁘다 싶었는데 블랙이 보기엔 어떨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리에네 공주가 그저 미인이기만 했다면 그도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블랙의 과거에 연결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그대로 넘길 수가 없었다. 저 여자는 특별했다. 블랙에게.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어쩌면 블랙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자에게 휘둘려 정신 못 차리는 주군은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가 답도 없이 망해 가는 왕국의 공주라면 입 아프게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입 다물어.”
그런데 어쩌면 늦었을지도 몰랐다. 블랙이 리에네의 고개 너머에서 페르모스를 쳐다보았다. 두 눈이 번들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블랙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옷이 문제라면 네가 보지 마라. 나가든가, 눈을 감아.”
“그…… 아닙니다. 결례를 보였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공주님.”
영리한 페르모스는 이쯤에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마음속의 걱정은 쉽게 식지 않았다. 안 될 텐데……. 아르사크 가문의 기사단장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걸 리에네 공주도 알았다. 이 시점에서 블랙이 리에네에게 관대한 마음을 품는 건 좋지 않았다.
“장례식이 가능한 한 빨리 끝나길 바라야겠습니다.”
페르모스가 확신 없는 투로 작게 중얼대자 블랙이 말했다.
“나가.”
계속 종알대고 있는 게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 ……알겠습니다.”
페르모스는 둘만 남겨 둘 수는 없다는 말을 하려다 억지로 참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이렇게 표시 나게 굴면 그 이유를 몰라볼 주군도 아니었다. 하아…… 이걸 어쩌나. 어쩔 수 없었다. 주군의 말대로, 리에네 공주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
“주군을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페르모스는 그보다는 눈치가 덜한 나머지 용병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 * * 둘만 남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어제 열병 같은 키스를 한 그 공간이었다. 페르모스가 아니었다면 리에네는 지금쯤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나 몹시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 옷이 그렇게 이상한가. 하지만 다행히도 머릿속은 다른 일로 바빴다. 연달아 두 명이나 옷을 두고 말을 꺼내니 정말로 제 옷이 몹시 별로인 것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살이라도 좀 쪄야 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리에네는 제풀에 훌쩍 놀랐다. ……미쳤어. 살은 왜. 이 남자한테 잘 보이고 싶기라도 한 거야?
“무슨 생각을 합니까?”
불쑥 고막을 파고들어 오는 블랙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아무것도요.”
리에네는 저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남자에게 멀끔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이상했다. 남자는 나우크의 평온을 깨트린 장본인이었다. 비록 곧 말라비틀어질 평온이긴 했어도.
“식사를 먼저 하시겠어요? 아니면 상처를 먼저 돌볼까요.”
“상관없지만 굳이 고르라면 붕대를 먼저 갈고 싶습니다.”
“네, 그럼.”
리에네가 부탁하기 전에 블랙이 스스로 벗다시피 걸친 셔츠를 내렸다. 다시 봐도 아찔한 몸이었다. 보통 살갗에 자리한 흉터를 보면 통증이나 사연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남자의 흉터는 다른 무엇보다 현기증을 느끼게 했다. ……얼굴 때문이야. 그건 남자가 저렇게 생긴 탓이었다. 저 얼굴이 모든 걸 장식처럼 만들어 버리니까. 사람보다 짐승을 더 닮은 것 같은 기묘한 눈 색깔도, 석상 같은 무표정도, 위압적인 체구도 저 얼굴에 더해지면 그저 보기 좋은 게 되어 버렸다.
“붕대를 풀겠습니다. ……아, 그런데?”
생각이나 떨림처럼 쓸데없는 것들을 꾹 삼키고 블랙의 붕대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리에네는 붕대가 너무 깨끗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금방 간 새것 같았다.
“그런데?”
블랙이 리에네를 바라보며 뒷말을 따라 했다.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약도 바르셨…….”
“그래도 갈아요.”
블랙이 재빨리 리에네의 말을 끊었다.
“나를 만지는 걸 다시 못 견디게 된 게 아니라면.”
“……그럼.”
다시, 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리에네는 잠자코 붕대를 풀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남자는 싫지 않았다. 방금 전 남자가 수하에게 눈을 감든가, 나가라고 했을 때는 남자가 제 편을 들어 주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그건 이 남자가 어제 했던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뜻일까. 잊지 않고 성실히 지킬 생각이라는 뜻일까. 그럼 나는. 나도 그래야 하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리에네는 말없이 붕대를 풀어서 걷어냈다. 상처 위에는 새 약도 발라져 있었다. 역시나 아침에 붕대를 간 게 맞았다. ……이상해. 붕대를 굳이 갈아 달라는 남자도, 갈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 갈아 주는 자신도 전부 다 이상했다.
“섞이면 안 될 것 같아 약은 따로 바르지 않겠습니다.”
상처는 빠르게 아무는 듯했다. 그건 다행이었다. 리에네는 새 붕대를 덮어 상처 위에 정성껏 감았다. 문득 언젠가 연인도 비슷한 곳을 다쳤던 적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때는 어땠더라……. 그때도 내가 상처를 돌봤었나. ……아, 맞아. 내가 약을 바르고 플램바드 부인이 붕대를 감았었지. 그때 연인은 내내 리에네의 손을 꾹 움켜쥐고 옷자락에 이마를 비벼댔다. 그가 무척 아이 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상처는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엄살을 부리는 것 같다고. 연인이 아파하는 것보다 자꾸 손을 쥐고 있으려 해서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언제까지 나를 잡아 둘 거지. 나는 할 일이 많은데. 그만 놓아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는 잘 확인했습니까?”
잠깐 생각을 떠올리느라 리에네는 블랙의 목소리를 놓쳤다.
“……네? 뭐라고 하셨나요?”
“시체는 잘 확인했는지 물었습니다.”
연인과는 달리 블랙은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같았다. 연인이 손을 쥐고 리에네를 붙잡아 두었듯이, 블랙도 시선으로 리에네를 묶어 두었다. 그리고 리에네는 그때와 전혀 다른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놓아달라는 말을 언제 할까 하는 생각 같은 건 할 새가 없었다. 그저 단단히 묶여 있는 것 같은 환촉만이 느껴졌다.
“아, 그…… 말씀을 들으셨나 보군요. 네, 예배당에 다녀왔습니다. 아무래도…… 제대로 이별을 하는 게 도리일 듯해서.”
항상 느끼는 일이었지만 남자의 눈은 너무 맑았다. 저 눈에 대고 거짓을 말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별은 다 했습니까?”
지금도 그는 리에네의 거짓 어딘가를 터무니없이 맑게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음성은 정작 감정 한 올 없이 건조하기만 했다.
“그럼 이제 공주님이 약속을 지키기만을 기다리면 되겠군요.”
“…….”
블랙이 느리게 손을 뻗어 리에네의 뺨을 쓸었다. 느린 만큼 부드러운 손짓을 따라 살갗 위의 솜털이 오스스 일어서는 듯했다.
“가능한 빨랐으면 하는데…… 언제쯤 될 것 같습니까?”
* * * 이건…… 구애가 아니야. 남자는 이미 열이 내린 상태였다. 원래 체온이 높은 편이긴 했지만 남자의 손은 어제처럼 뜨겁지 않았다.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열에 들떠 몽롱해 보이는 그 눈이 아니었다. 남자의 눈은 물처럼 차고 맑았다.
“나는 불분명한 건 싫습니다.”
불순한 건 싫다는 말로 들렸다. 의심이나 갈등, 위태로운 저울질 따위는 두고 볼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블랙의 손을 따라 리에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페르모스라는 자가 뭐라고 했지.
-이자가 공주님의 연인이었다는 말입니까?
분명 그렇게 말했어. 지금 되짚어 보면 그 말을 뱉어낼 때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드러나긴 했다.
-진심이라면 참으로 감사한 말씀입니다.
굳이 진심이라는 말을 앞에 끼워 넣은 게 이상했다. 마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알고 있는 거야. 그 시신은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아니라는 걸. 블랙은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손을 움직여 살갗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기다리는 데에도 재주가 없습니다.”
“…….”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블랙이 하는 건 경고였다. 나는 그 이별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으니 진짜로 만들라는.
“저는…….”
긴장이 속눈썹을 흔들었다. 제 거짓말을 다 아는 상대 앞에서 계속 거짓을 말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잖아. 내가 실수하면 그 사람이 죽지 않고 나우크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게 탄로 나게 돼. 그렇게 되면 클라인펠터 가문은 장자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일 테고, 티와칸은 그를 죽이기 위해 기꺼이 칼을 휘두를 것이다. 그 칼에 몇이나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를 쓰는, 중입니다.”
리에네는 제 뺨을 쥔 블랙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블랙이 말없이 겹쳐진 손을 바라보았다.
“저 역시 모호한 것은 싫습니다.”
매듭을 지어야 했다. 리에네는 연인과 연인의 가문을, 그리고 티와칸과 그들의 수장을 저울에 매달았다. 팽팽할 것 같았던 추는 의외로 쉽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클라인펠터 가문은 티와칸에 맞서 싸울 능력이 없었다. 연인을 택하면 자신 또한 지는 싸움을 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럴 수 없어. 내가 진다는 건 나우크에 끝이 온다는 소리야. 자신이 잡아야 할 손은 이쪽이었다. 블랙과 겹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과거는 잊겠습니다.”
리에네가 손을 겹친 채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블랙의 시선이 리에네의 동선을 좇아 위를 향했다. 리에네는 저를 향해 들린 입술에 시선을 던졌다.
“약속대로.”
리에네는 눈을 감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곧장 입술이 닿았다. 리에네는 어제 블랙이 했던 것처럼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마주 닿은 입술을 빨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