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위험한 재회 (1)2021.05.05.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리에네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술이 온통 아릿했다. 남자의 입술이 젖어서 번들대고 있으니 제 입술도 그럴 것이다.
“이런 걸 기대하진 않았는데.”
딱 입술을 움직여 말을 할 수 있을 만큼만 거리를 둔 블랙이 중얼거렸다.
“기분이 나쁘진 않군요. 그 옷까지 포함해서.”
다쳤다던 팔이 리에네의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었다. 리에네는 아찔한 위기감과 바위처럼 견고한 안정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제 그만 놓으셔도 될 듯합니다.”
리에네가 블랙의 어깨를 밀었다. 태연하고 싶었지만 남자 앞에서는 그게 참 어려웠다. 다리에 더 힘이 풀리면 그대로 남자의 허벅지 위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가보겠습…….”
리에네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블랙이 눈썹을 찡그리는 게 보였던 탓이었다.
“아, 이런.”
하필이면 다친 어깨를 손으로 밀고 있었다. 리에네가 다급히 손을 떼어냈다.
“경황이 없어서…… 괜찮은가요?”
“괜찮습니다.”
담백한 대답과는 달리 눈썹은 더 움츠러들었다.
“안 괜찮네요.”
리에네가 방금 전 자신이 힘주어 밀었던 상처 위를 달래듯 천천히 어루만졌다. 붕대 위로 피가 배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상처가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부터는 아픈 표시를 내주세요.”
“아픈 줄 몰랐습니다. ……나도 경황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입술은 어제처럼 붉고 뜨거웠다. 이유를 잘 알 수 없었지만 리에네는 그게 더 남자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는 뜨거운 게 더 보기 좋다고. 자신을 볼 때면 저렇게 뜨거웠으면 좋겠다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리에네는 제 생각이 무서워 홱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있었다. 연인의 귀환이 손 쓸 도리 없는 전쟁으로 번지기 전에 그를 말려야 했다.
“아프지 않다 하는 걸 보니 식사도 제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순간 블랙의 표정이 재미나게 일그러졌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리에네는 그걸 미처 보지 못했다.
“쾌차를 빌겠습니다, 로드 티와칸.”
리에네는 인사를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블랙의 곁을 떠났다. 침실 문을 닫고 나서야 헌 붕대와 약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늦었어. 돌아가기엔 늦었다. 이미 저는 연인과 남자가 다르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연인이 부리는 엄살에는 어서 손을 놓고 싶었다. 제 입으로 아프지 않다는 남자의 상처는 스스로 어루만지게 되었다. 남자는 이미 제 정혼자였다. 제 힘으로는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 * 클라인펠터 가문을 찾아가야 하는 핑계는 많았다. 일단 대외적으로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린든 클라인펠터는 나우크의 대의장이었고, 리에네는 그를 만나야 할 이유를 수십 개도 더 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부고를 전해야 했다. 연인은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기도 했으니 손수 애도를 전할 의무가 있기도 했다.
“그래도 저는 반대입니다, 공주님.”
외출 준비를 하는 리에네에게 웨로즈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시점에 방문이라니. 저들에게 의심거리를 던져 주는 꼴입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리에네는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준비라고 해야 머리에 애도를 뜻하는 꽃장식을 하나 더하는 정도였다. 상복 위에 검은색 망토를 걸치기만 하면 되었다. 망토는 지금 플램바드 부인이 가져오는 중이었다.
“저들은 이미 그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네? 그게 무슨…… 정말입니까? 아니,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느낌이 그랬어요. 시신을 돌려주기 전 뭔가 확인이라도 한 게 아닐까 싶어요.”
남자의 경고는 사실 꽤나 고상했다.
“저들은 클라인펠터 경의 얼굴을 모르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렇습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시신에 표시가 나지 않았을까요?”
“시신에 무슨 표시가…… 아, 이런.”
갑자기 웨로즈의 안색이 바랬다.
“설마 투구의 장식을 알아봤을까요?”
“네? 장식이요?”
“클라인펠터 경의 투구를 쓰고 있던 시신 말입니다. 갑옷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을 입고 있었을 겁니다. 아르사크 기사단에서 장식이 들어간 갑옷을 입는 자는 클라인펠터 경뿐이니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네요.”
야만인이라더니, 눈썰미가 무섭도록 예리했다. 게다가 저들의 수장이나 그 오른팔이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들이었다. 티와칸이 괜히 무패의 용병으로 십 년씩이나 대륙을 헤집고 다닌 게 아니었다.
“네……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의 칼을 보여 줄 때도 말을 아꼈죠. 암시 정도만 하고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어요. 아마 그때도 죽은 건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예요.”
얼굴에 피가 묻은 채 온 것도 예의를 모르는 야만인이라서가 아니라 일부러 의도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 대체 어디까지 계산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저들은…….”
“어디까지든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고 있겠죠. 거짓말은 소용없어요.”
늦었다는 건 그런 말이기도 했다. 티와칸은 이미 정혼자의 자격으로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제 티와칸이 아니라 아르사크의 수호기사단이었다.
“공주님. 그럼 클라인펠터 가를 방문하시는 이유가……,”
“도망치라는 말을 하려고요.”
리에네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클라인펠터 경과 그의 가문을 포기하시는 겁니까.”
“그게 그 사람이 사는 길이에요. 티와칸이 지금껏 이상할 정도로 관대하게 굴고 있지만, 그 사람을 살려 둘 정도는 아니에요. 더군다나 그 사람은 활을 쏘았는걸요.”
“그건 아직 확실히는 모릅니다, 공주님.”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누군가가 티와칸의 수장을 죽이려고 했다는 게 중요한 거죠. 책임을 물을 대상은 그 사람밖에 없어요.”
“클라인펠터 가문이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겁니다.”
“네, 그렇겠죠. 저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하는 거고요. 경께서는 클라인펠터 가문이 티와칸에 맞서 싸움을 벌이길 바라시는 건가요? 그렇게나 승산 없는 싸움을?”
“으음…….”
웨로즈도 계산이 섰을 것이다. 클라인펠터와 티와칸은 양립할 수 없었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게 티와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리에네의 결정은 현명했다.
“하지만 공주님, 그러시면 공주님께서는 영영 저 야만인의 손에서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그 점은 충분히 알고 계신 겁니까?”
“네. 알고 있어요.”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클라인펠터 경을 떠나보내면 그때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리에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경께서도 아는 사실이잖아요.”
“네,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공주님…… 혼인하는 사람은 공주님이십니다.”
“이미 각오했어요.”
그게 문제였다. 각오가 무색하게, 남자가 그렇게나 끔찍하진 않다는 점이. 이 말도 안 되는 혼인에서 가장 말이 안 되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나저나 망토가 늦는군요. 플램바드 부인께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리에네는 화제를 돌리려 애를 썼다. 때를 맞춘 듯 플램바드 부인이 노크를 한 뒤 들어섰다.
“망토를 가져왔습니다, 공주님…… 어마.”
방으로 막 들어서던 부인이 거울 앞의 리에네를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공주님? 설마 그걸 상복이라고 입으신 건가요?”
“네?”
리에네가 어리둥절해져서 제 옷을 훑었다.
“네. 상복은 이것밖에 없어요. 부인도 알고 있잖아요.”
“세상에…… 이게 그 옷이었습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옷을 입었던 때가 언제였지요? 한 오 년은 되었나요? 세상에나……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하긴, 그새 이렇게나 장성하셨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지만요.”
벌써 세 번째 지적이었다. 리에네는 제 옷 따위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웨로즈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많이 커지지 않았어요.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흉하다뇨! 그 반대라서 문제입니다!”
“네?”
또다시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이었다.
“반대라고요?”
“공주님은 검은색이 너무 잘 받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그래도 나이가 어리셔서 좀 과하게 예쁘시네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도무지 이걸 상복이라 부를 수가 없겠습니다. 살이 내리셔서 어깨와 가슴 위가 이렇게 훤히 드러나는데요. 이건 마치 혼인식 첫날밤에 입는 옷 같단 말이지요. 웨로즈 경은 곁에서 이걸 보고만 계셨습니까?”
갑자기 화살이 저에게 돌아오자 웨로즈가 당황해 고개를 흔들었다.
“저야, 그…… 공주님은 워낙 아름다우시니 그런 줄로만…….”
“쯧쯧. 하긴, 저 기사 양반이 무얼 알까.”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리에네를 말렸다.
“하여간 그 옷은 도무지 상중에 입는 옷이라고 할 수가 없으니 다른 걸 입으세요, 공주님. 행여나 저 야만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그 거친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들을 할지, 저는 너무 걱정이 됩니다. 가뜩이나 그 수장이라는 자는 공주님을 한입에 꿀떡 삼킬 것처럼 쳐다보던데요.”
“…….”
리에네의 안색이 묘하게 파리해졌다. 플램바드 부인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벌써 입고 다녀오신 게지요?”
그랬다.
“……그, 살이 드러나진 않는데요.”
“네. 그런데 선이 드러나지요. 제가 볼 땐 그게 더 문제입니다.”
“…….”
리에네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블랙이 저를 보며 그 옷이 신경 쓰인다던 말을 하던 게 기억났다. 페르모스는 대놓고 그 옷을 계속 입어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결혼식 첫날밤에나 입는 옷 같다는 말은 플램바드 부인이 그나마 예의를 갖춰 한 말이었다. 좀 더 정직하게 말을 했다면 훨씬 노골적인…… ……맙소사. 일부러 입은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너무 멀리 나간 걱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리에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먼저…… 입을 맞췄는데. 일부러 유혹적인 옷을 입고 행동까지 그렇게 했을 거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 * * 리에네는 상복 같지 않은 상복을 벗었다. 그 옷은 플램바드 부인이 수선해 오기로 했다. 상복이 한 벌밖에 없는 터라 리에네는 최대한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입고 그 위에 망토를 두른 뒤 클라인펠터 가로 출발했다. 공주의 행차라고 해도 단출했다. 호위는 언제나처럼 웨로즈 하나였다.
“곳곳에 티와칸의 사람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리에네는 말 위에서 거리를 한 번씩 둘러보다 작게 말을 건넸다. 웨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화살을 쏜 범인을 수색하는 중이니까요.”
“……그런 이유로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티와칸은 나우크의 모든 길을 알아내겠군요.”
“그렇습니다.”
리에네가 쓰게 웃었다.
“이쯤 되면 화살을 맞은 게 일부러 의도한 일이었다고 믿어도 되겠어요. 그 일로 티와칸은 너무 쉽게 나우크의 모든 것을 가져가는군요.”
“성공했으면 달랐을 겁니다.”
리에네의 쓴웃음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네. 나우크의 모두가 죽었겠죠. 복수라는 명목으로.”
“…….”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아는 웨로즈가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었다. 웨로즈의 이마 옆으로 그새 희끗한 머리칼이 늘어나 보였다.
“티와칸의 수장이 죽지 않아 다행이에요. 그가 나우크를 힘으로 빼앗으려 한 대신 청혼이라는 온건한 방식을 택한 것도요.”
“공주님, 그건 너무…… 저들에게 우호적인 말씀 같습니다.”
“그래야 해요. 보름, 아니 이제 거기서 하루가 더 줄었네요. 그 뒤면 티와칸의 수장은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됩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평생 익숙해질 수 없는 사실일 거라고 웨로즈는 생각했다.
“다 왔네요.”
클라인펠터 가의 대저택이 입구를 드러냈다. 나우크 성보다 높지는 않았지만 면적으로만 치면 훨씬 넓고 호화로운 곳이었다. 일꾼들의 숫자도 나우크 성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탕, 탕!
“문을 열어라! 아르사크 가문의 리에네 공주님이 오셨다!”
웨로즈가 문을 두드려 방문을 알렸다. 제법 긴 시간이 지루하게 흐른 뒤 일꾼들이 나와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