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위험한 재회 (2)2021.05.09.
“직접 부고를 전하러 오셨다고요…… 흐음.”
린든 클라인펠터의 표정은 확실히 환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조카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실제로는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네.”
리에네는 그간 수차례 입궁을 요구했어도 무거운 엉덩이를 꿈쩍도 하지 않았던 대의장 린든 클라인펠터를 마주했다. 나우크의 재정이 적자로 돌아선 이래, 그는 아예 대의장의 일에서 손을 놓았다. 그 적자는 지금껏 리에네가 가산을 팔아 메우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양쪽 모두 알았다. 하지만 제 힘으로는 클라인펠터 가문을 어쩔 수 없었다. 군대를 이끌고 힘으로 굴복시킬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클라인펠터 가의 사병이 성의 경비대보다 월등히 많았다.
“그리고 티와칸과 아르사크의 혼인이 앞으로 열흘하고 나흘 뒤라는 소식도 알려드립니다. 클라인펠터는 나우크에서 가장 큰 가문인 만큼 참석해 우의를 드러내야 할 겁니다.”
“지금 원수의 결혼식에 참석하란 말입니까?”
리에네는 태연히 적의를 입에 담는 린든 클라인펠터를 침착하게 마주했다. 티와칸이 원수가 아니라는 건 양쪽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연인은 죽지 않았으니까.
“네.”
“외람되지만 아르사크의 딸은 제정신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애초에 야만인들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것부터 그 증거지요.”
“…….”
리에네는 무례를 탓하는 대신 쓰게 웃고 말았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나우크의 통치자에게 제멋대로 굴기 시작한 것은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다. 선친이 작고한 뒤 리에네가 통치권을 물려받았을 때에도 클라인펠터 가문은 가장 큰 목소리로 반대를 외쳤다. 만일 리에네가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와 공식적인 연인 관계가 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무례는 정도를 몰랐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제 정신은 멀쩡합니다. 티와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게 제정신이 아니란 증거였겠지요. 그럼 부고를 전했으니 장례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아르사크의 기사단장 라피트 클라인펠터는 이로써 흙으로 돌아가고, 그 이름은 영예롭게 죽은 자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리에네의 말은 그대로 죽은 이름으로 남아 있으라는 의미였다. 그게 모두의 안전을 위한 길이었다.
“멀쩡한 정신과 함께 자존심과 패기도 함께 잃었군요. 아르사크의 딸은 마땅히 정혼자의 복수를 해야지 않습니까?”
“말을 가리세요, 경. 라피트 클라인펠터 경은 제 정혼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혼약이 오간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기억 못 하십니까?”
린든 클라인펠터가 입술을 실룩였다.
“정혼자가 아니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장난인지. 그럼 아르사크의 딸은 클라인펠터의 장자와 그저 재미만 보고 말 생각이었다는 겁니까? 참으로 값싼 몸이로군요.”
이 응접실에 웨로즈가 함께 있었다면 그는 못 참고 칼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리에네 역시 린든 클라인펠터의 따귀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클라인펠터 경께서 평소 가문의 장자를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 알 수 있겠네요. 아무리 죽은 자라 하지만 이리 쉽게 모욕을 해도 되는 겁니까.”
“클라인펠터의 장자를 욕보이는 건 아르사크의 딸입니다. 당장 그 야만인의 목젖을 잘라도 시원찮을 마당에 혼인이라니? 그게 내게 얼마나 모욕적인 말인지 그 예쁘장하기만 한 머리로는 이해를 못 하는 겁니까?”
퍽! 더는 참지 못했다. 리에네는 응접실 한쪽을 장식한 화병을 들어 린든 클라인펠터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깨진 도자기 파편과 물이 값비쌀 게 뻔한 이국의 카페트에 얼룩을 남겼다.
“성깔은…….”
린든 클라인펠터가 콧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나우크의 선왕께서 물려주셨죠. 감히 경처럼 신분을 넘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있으면 친히 훈계를 하라는 의미였나 봅니다.”
리에네가 거칠어진 숨소리를 말에 섞어 내뱉었다.
“내가 청혼을 승낙한 게 그리도 못마땅하다면, 나우크가 포위되었던 보름 간 클라인펠터 가는 뭘 하고 있었는지나 되짚어 보세요. 나우크의 경비대가 백 명 가까이 제 목숨을 바쳤을 때 이곳의 사병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를요.”
“그래서, 지금 야만인들에게 그 값싼 몸을 팔아넘긴 게 나우크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겁니까?”
실수였다. 화병을 다른 데 던졌어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관대했던 모양이군요. 바닥이 아니라 그 대가리를 맞췄어야 하는데.”
“뭐, 대가리? 어디 계속 그렇게 까불어 봐라.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다고.”
린든 클라인펠터가 개가 짖을 때처럼 잇몸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최소한의 예의도 집어치운 두 사람은 응접실이 아닌 전장에 서 있는 자들 같았다.
“그 사람한테 전하세요. 그대로 죽은 사람이 되어 조용히 떠나라고. 두 번 다시 화살을 날릴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와중에 리에네가 본론을 꺼냈다.
“나우크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개인적인 복수심 같은 건 접으라고 하세요.”
“그 성깔을 야만인들에게 좀 부려 보지 그럽니까?”
“틀림없이 전하리라 믿습니다. 티와칸에서는 아르사크의 기사단장이 죽지 않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려드립니다.”
“아, 그새 아랫배를 맞춰 보니 성깔을 부릴 여지도 없던가?”
“닥……!”
닥치라는 말이 튀어 나가려던 참이었다. 똑똑. 응접실 문 너머에서 소리가 울렸다.
“손님께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리에네와 린든 클라인펠터가 동시에 몸을 굳힌 건 귀에 익은 목소리 탓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끼익.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이는 죽지 않은 연인이었다. * * *
“왜 나선 게야. 가만히 있으라 일러두었는데.”
린든 클라인펠터가 못마땅한 얼굴로 조카를 향해 말했다. 리에네가 저택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한참 기다려야 했던 이유였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조카가 리에네 공주와 단둘이 마주해서는 얻을 게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조카는 리에네 공주라면 얼빠진 등신이 되었다. 죽은 척이 아니라 죽어달라는 부탁이라도 하면 그러고마 넙죽 받아들일 인간이었다. 그래서 응접실 근처에는 얼씬도 대지 말라 일러두었는데, 기어코 나타났다.
“자리를 비켜 주세요, 숙부님.”
조카라 해도 장자였다. 성격이 무던한 탓에 지금껏 그가 어른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었지만, 사실은 반대가 되어야 했다. 그는 조카의 한마디면 이렇다 할 재물도 없이 내쫓겨도 할 말이 없는 신세였다.
“그리는 못 하겠다. 아르사크의 딸은 이미 우리를 배신했어. 간사한 혀로 너를 어찌 녹여 놓을지 그 누가 안단 말이냐.”
“리에네 공주님을 두고 무례한 언사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등신이 된다는 뜻이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한껏 혀를 찼다.
“쯧쯧……! 그럴 가치가 없는 여자란 말이다. 방금 아르사크의 딸이 내게 무어라 말했는지 아느냐? 너와 우리 가문이 앞으로…….”
“숙부님!”
연인의 눈에 노기가 드러났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는 줏대 없이 순한 조카라도 한 번 화가 나면 그가 말리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쯧. 밖에 있으마.”
린든 클라인펠터가 마지못해 응접실을 나섰다. 탁. 닫힌 문 뒤로 헤어진 연인들이 서로를 마주 보는 숨 막히는 공간이 남았다. * * *
“다친 데는 없나요.”
리에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연인은 건강해 보였다. 피부가 거칠어진 듯했지만 그를 대신해 죽은 시체에 비하면 그걸 흠잡을 수는 없었다.
“공주님…… 나의 리에네.”
연인이 울컥 쏟아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다. 처음엔 눈이 마주친 상태로 굳어 있던 그가 한달음에 다가와 리에네를 꽉 안았다.
“…….”
조금만 참자. 리에네는 눈을 감고 이 모순적인 상황을 다독였다. 이 사람에게도 이별할 시간이 필요해.
“약속을……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연인의 손이 머리칼 속을 파고들었다. 그 손길은 달라진 게 없었다. 열정적이고, 다정하고, 정중하면서 간절했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까지 똑같았다. ……괜찮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기다렸을 텐데…… 무서웠을 텐데, 곁에 있어 주지 못하고…….”
괜찮았다. 리에네는 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가 지원군과 함께 제 시간에 돌아왔다면 기뻤을 테지만, 어차피 그것은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샤르카 왕국이 설령 지원군을 보내 주기로 했어도 과연 티와칸을 상대할 만큼 대규모의 병력이 되었을지는 의문이었다.
“도망치세요.”
리에네는 숫자를 열까지 센 뒤 눈을 뜨고 말했다.
“네?”
연인이 손짓을 멈추고 리에네에게서 몸을 뗐다. 눈을 마주 보기 위해서였다.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여기 숨은 것을 티와칸이 드러내기 전에 도망치세요.”
“나 혼자 도망치라고요?”
“그게 모두가 안전한 길입니다.”
연인이 눈을 크게 떴다. 벌어진 눈에서 불신과 배신감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믿을 수가 없군요. 공주님이 나를 이렇게 포기한다니.”
리에네야말로 연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모르는 걸까. 나는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는데. 그게 나우크를 위한 일이라면.
“나는 로드 티와칸과 혼인할 거예요.”
그들은 더 이상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
“이 말을 하려고 왔어요. 그간 감사했고, 앞으로도 내내 무사하길 바란다고요.”
“말도 안…… 이렇게 나를 버린다고요? 공주님이?”
리에네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짧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리에네는 참기로 했다.
“나는 그게 나우크를 지키는 길이라 믿습니다.”
“천만에!”
연인이 울컥 소리쳤다. 늘 다정하고 부드럽던, 그래서 때때로 유약하게 느껴졌던 갈색 눈이 지금은 장작불처럼 타올랐다.
“나를 버리는 게 어떻게 나우크를 지키는 길입니까! 어떻게! 어째서!”
“아르사크 가문도, 클라인펠터 가도 티와칸을 상대할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게…….”
“그래서 아예 제 손으로 바치겠다고? 거기에 공주님까지 얹어서요?”
연인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날카로운 비웃음이 연인의 얼굴에서 피어나 리에네의 기분까지 베어 갔다.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단 말입니까, 공주님…… 그게 바로 저 야만인들이 노리는 겁니다.”
연인이 손을 뻗어 리에네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놓아달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가 먼저 숨 가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샤르카 왕국에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아십니까? 저 야만인들의 수장에 관해?”
“클라인펠터 경. 손을 놓으세요. 저는 이제 정혼자가 있습니다.”
연인은 리에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귀가 먼 것처럼 제 할 말만 했다.
“그가 다른 곳도 아닌 하필 나우크에 와서 이 야만적인 짓을 벌이는 이유 말입니다.”
* * * 그게 몹시 궁금하긴 했다. 티와칸의 수장이 나우크를 원하는 이유. 남단의 다섯 왕국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척박한 이곳을. 서로 진심이 되기로 약속을 하고 난 지금에서도 이 궁금증은 해결이 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이유가…… 뭐라던가요.”
리에네가 더 이상 연인이 아닌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원한이 있다더군요. 나우크에.”
“……네?”
“그래서 오래도록 복수를 계획했다고 했습니다. 나우크 밖에서는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무슨 그런…… 어떤 원한을요?”
“가족이 나우크의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우크를 손에 넣으려 한다고요?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말이 되는 걸 바랍니까? 야만인에게?”
“…….”
리에네가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복수를 꿈꾸는 사람이 티와칸의 수장이라면 말이 될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나우크쯤이야 멋대로 때려 부술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더 말이 안 되잖아. 그럼 청혼을 할 게 아니라 전쟁을 벌였어야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면 티와칸은 보름씩이나 성을 포위할 필요도 없었다. 사흘이면 모든 게 정리가 됐을 것이다. 제 목은 성벽에 걸리고 티와칸은 나우크라는 이름을 대륙의 지도에서 말끔히 지웠을 터였다. 그리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잖아. 망가트리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을 거라고. 복수라니. 아니야. 그게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