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위험한 재회 (3)2021.05.12.
“티와칸을 따라다니는 소문이야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들의 수장이 남색가라는 소문도 있지 않았습니까.”
리에네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남색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리에네는 그가 어떻게 저에게 키스했는지 기억했다. 욕망할 수 없는 대상에게 그런 키스를 하는 인간은 없지 않을까. 자신이 연인에게 마지못해서 했던 키스를 떠올려 보면 답은 더 명확했다. 뜬소문이었다. 뜬소문일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설마 벌써 그자를…… 침대로 부른 겁니까?”
“클라인펠터 경.”
리에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숙부나 조카나. 이 가문의 인간들은 입으로 매를 버는 재주가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를 하면 경을 후려치겠습니다. 경이 나와 내 정혼자의 침대 사정을 물어볼 자격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혼자라니. 어떻게 내 앞에서 그 야만인을 그런 말로 부르는 겁니까.”
“나우크를 떠나세요. 그대의 가문을 존중해 성을 나서는 순간까지는 웨로즈 경이 길을 지켜 줄 겁니다. 내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리에네!”
연인은 질겼다. 아니, 느렸다. 그는 아직도 리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떠날 수 없습니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다른 자와 혼인하는 것을 내가 어찌 용납한단 말입니까!”
“하지 않으면요.”
리에네는 제발 말 좀 알아먹으라며 화를 내는 대신 감정을 감추었다. 화를 내면 싸움이 될 뿐이었다. 지금은 전부 다 잘라내야 할 시간이었다. 감정이 사라져 차가워진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그럼 무얼 하려고요? 또다시 화살을 쏘려고요? 경이 쏜 화살 하나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압니까? 티와칸은 암살자를 쫓는다는 명목으로 혼인에 앞서 경비대 숙소를 차지했고, 나우크의 모든 길을 세세히 익히고 있습니다. 이제 거리에서 티와칸의 모습을 보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이게 전부 그 빗맞은 화살로 인한 일입니다.”
“그걸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화살은 분명 야만인의 살갗을 찢었고 그 일로 티와칸의 전력은…….”
“조금도 이상이 없습니다. 고작 살갗이 찢겼을 뿐입니다.”
“성공하면 됩니다.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티와칸은 바보가 아닙니다. 암살 시도로 인해 경계심만 부추겼을 뿐입니다. 이제 저들의 수장에게 해를 입히려면 먼저 저들 모두를 상대해야 될 겁니다.”
“…….”
마침내 라피트가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었다. 저도 기사였으니 리에네가 한 말이 옳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경이 화살을 쏜 자라는 게 밝혀지면 클라인펠터 가문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겠지요. 그러니 도망치세요. 그게 나우크의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 길입니다.”
“…….”
“그럼, 안녕히.”
리에네가 몸을 돌렸다. 막 응접실 문을 열려는데 등 뒤에서 라피트가 손을 뻗어 도로 문을 닫았다. 쿵!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행동에 리에네가 미간을 찌푸리며 라피트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 가지만…… 한 가지만 답을 해주십시오.”
리에네는 미련으로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마주했다. 그가 진심으로 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잠깐은 인내할 수 있었다.
“무엇을요.”
“그자가 좋습니까?”
“네?”
리에네에게는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라피트는 더없이 진지했다.
“대답하세요. 그자가 좋아서 혼인도 기꺼운 겁니까? 그래서 나를 버리는 겁니까?”
“하…….”
리에네가 한숨을 내뱉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는 생각 안 하나요?”
“대답해!”
라피트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답을 듣지 않으면 비켜서지 않을 기세였다.
“하아……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그간 몰랐군요. 저는 티와칸의 청혼으로 죽은 백여 명의 목숨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겁니다.”
“제대로 말해요. 그자가 싫은 건 확실합니까? 그저 힘에 굴복하는 것뿐입니까?”
싫지 않았다. 그를 갈망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게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그런 감정이 피어날 도리가 없는 시작이었으니까. 리에네가 차고 쓴 웃음을 지었다.
“내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우크입니다. 경과의 관계를 끝내는 것도, 피로 시작된 구혼을 받아들이는 것도 내게는 모두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견뎌야 한다면 견딜 뿐이었다.
“나우크를 떠나세요. 이제 이건 명령입니다.”
“…….”
리에네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다무는 라피트를 밀어낸 뒤, 스스로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 * * 하지만 제 발로 들어왔다고 해서 다시 제 발로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웨로즈 경은 어디 있죠?”
응접실을 나온 리에네는 클라인펠터 가의 정문까지 걸어가 웨로즈를 기다렸다. 하지만 웨로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상한 생각이 든 리에네는 클라인펠터 가의 문지기에게 물었다.
“저는 모릅니다.”
“뭐라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웨로즈 경은 방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어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웨로즈 경!”
리에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웨로즈를 소리쳐 불렀다.
“웨로즈 경!”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리에네는 이 위태로운 곳에 자신이 아무런 호위도 없이 혼자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
“문을 여세요.”
웨로즈의 행방을 쫓는 건 경비대가 해야 했다. 저는 여기서 혼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문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클라인펠터 가의 문지기가 완고하게 문을 가로막았다.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나를 이 문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던가요?”
“그건 모릅니다. 제가 받은 명은 문을 열지 말고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는 내가 누군지 모릅니까? 나우크의 리에네 공주가 명하니, 문을 여세요.”
“저는 명을 받았습니다.”
되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다. 나우크의 통치권자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수가 없었다.
“비켜요, 그럼. 내가 직접 열 테니.”
“그…….”
머뭇대는 문지기에게 리에네가 서슬 퍼런 경고를 보냈다.
“비켜서지 않으면 항명의 대가가 있을 겁니다. 클라인펠터의 이름은 그때 가서 그대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
그 말에 문지기가 망설이다 쭈뼛쭈뼛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리에네는 아예 손을 내밀어 그를 밀치고 문을 열고자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너무 늦었다. 저벅, 저벅! 리에네의 등 뒤에서 묵직한 걸음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자 린든 클라인펠터가 사병들을 거느리고 오는 중이었다.
“물러서세요, 공주님. 남의 집에서 손수 문을 열다니. 이 무슨 채신머리없는 짓입니까.”
“경이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린든 클라인펠터는 태연하게 리에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뭐라고요?”
“공주님께서 나우크의 통치권을 어디 저 들판에서 굴러먹던 야만족에게 넘긴다는데, 그걸 두고 보면 클라인펠터가 아니지요.”
어이가 없어진 리에네가 헛숨을 들이켰다.
“하, 내가 또 같은 말을 해야 하나요? 그새 치매라도 온 겁니까?”
“안 해도 됩니다. 대신.”
린든 클라인펠터가 어깨 너머로 눈짓을 던졌다. 그러자 사병들 틈 속에서 누군가가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발목까지 끌리는 묵직한 자줏빛 로브를 본 리에네의 눈이 커졌다.
“……밀로드 예하?”
“그…….”
대사제 밀로드가 말끝을 흐리며 리에네를 뚱하니 쳐다보았다. 나우크가 유난히 종교적 색채가 강한 곳은 아니라지만 대사제가 필요한 때는 늘 있었다. 비를 기원하는 봄의 대제전이라든지, 장례식이라든지, 아니면 결혼식 같은 곳에.
“클라인펠터 가문에는 어쩐 일입니까?”
대사제와 리에네는 그리 돈독한 관계가 아니었다. 지출을 줄이며 리에네는 가장 먼저 대사제관에 들어가는 지원금을 없앴다. 신전의 행사에 들어가는 돈은 어쩔 수 없다지만 대사제의 사치까지 왕실 예산으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 일로 대사제는 왕실을 위한 기도를 중단했고, 대신 클라인펠터 가문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듣기로는 린든 클라인펠터가 대사제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용돈 주머니를 보낸다고 했다.
“진혼 기도를 준비하려고 오셨나요?”
설마 대사제까지 라피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리에네는 그렇게 희망하며 물었다. 답은 대사제를 대신해 린든 클라인펠터가 했다.
“아니. 주례를 위해 모셔왔습니다.”
“주례……?”
“그렇습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리에네를 쳐다보며 삐뚜름한 웃음을 지었다. 불길한 미소였다.
“누가…… 결혼한다는 거죠?”
“뻔하지. 누구겠습니까.”
린든 클라인펠터가 리에네를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리에네의 눈에는 꼭 저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처럼 보였다.
“아르사크의 딸은 지금 이 자리에서 클라인펠터의 아들에게 그 아내로서 영원한 애정과 순종을 맹세하게 될 겁니다.”
“……!”
* * * 내 실수야.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었다. 저쪽에서 이딴 식으로 얼마든지 더럽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해야 했다. 클라인펠터 가문은 오래전부터 나우크의 통치권을 원했다. 그걸 남에게 넘기느니 일단 아무 짓이나 해보자고 나오는 듯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라피트 클라인펠터 경은 자신도 모르는 혼인식이 있다는 걸 동의했나요?”
“아, 저런. 그새 잊으셨나 보군요. 라피트는 죽었습니다, 공주님.”
린든 클라인펠터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주님이 결혼할 사람은 그 사촌인 로페스입니다.”
개소리였다. 리에네가 알기로 그런 인물은 클라인펠터 가에 없었다.
“내가 모르는 아들이 클라인펠터 가에 있었나요? 그가 정식으로 왕실의 인정을 받은 클라인펠터 가의 일원이 맞긴 합니까?”
“아, 그런 적은 없지요. 사생아라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장자가 죽었으니 누구라도 데려오는 수밖에.”
개소리가 뻔뻔하기도 했다.
“뻔히 아는 거짓말은 집어치우기 바랍니다, 클라인펠터 경. 일이 험해지기 전에 내 앞에서 비켜서세요.”
“사생아라고 해도 너무 저어할 건 없습니다, 공주님. 핏줄이 핏줄인지라 생긴 건 죽은 장자와 아주 똑같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밀로드 예하?”
대사제가 태연하게 거짓말을 거들었다.
“내가 확인했는데 아주 똑같았습니다. 도무지 클라인펠터의 핏줄임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건 신의 축복입니다, 공주님.”
축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리에네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초록 눈이 가파르게 제 앞을 벽처럼 막아선 사내들을 가늠했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해. 어떻게든.
“……좋습니다. 그리도 닮았다니 저도 궁금하군요. 지금 이 자리에 불러오세요.”
“어려울 것 없지요. 가서 라피…… 아니지, 참. 내가 뭐라고 했느냐? 아, 로페스. 그래, 로페스를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사병 하나가 응접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사람을 하나 데려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물론 그가 데려온 사람은 라피트 클라인펠터였다. * * * 헤어진 연인은 리에네가 떠나고 난 뒤 혼자 감정을 삭이고 있었던지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리에네는 라피트의 오른손이 상한 것을 보았다. 뭐라도 깨부수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러지 말아요.”
눈이 마주치는 순간 리에네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 무모하고 어리석은 촌극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헤어진 연인뿐이었다. 이 탐욕스러운 곳에서 그는 혼자 달랐다. 그래서 그가 주는 애정을 진심이라고 믿었다. 불같이 뜨거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리에네는 그를 연인이라 여겼고 연인으로 대우했다. 그 역시 그럴 것이다. 저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일 것이다. 이런 폭력과 모욕을 강제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제발. 당신이 내게 했던 맹세는 애정만이 아니잖아요. 아르사크 가문의 수호기사로서 나와 나우크를 지키겠다고 서약했잖아요. 제발…… 나우크를 위험으로 몰아가는 일은 하지 말아요.”
헤어진 연인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저는…… 공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피트.”
라피트가 고개를 돌려 제 숙부를 응시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턱을 끄덕이자 라피트는 제 입술을 짓씹다 말했다.
“그 이름으로 저를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로페스 클라인펠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