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위험한 재회 (4)2021.05.16.
믿을 수가 없었다.
“라피트!”
옛 연인은 경악으로 떨리는 리에네의 눈을 향해 숙부와 똑같은 개소리를 내뱉었다.
“아름다운 공주님을 아내로 맞게 된 오늘을 평생 신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공주님 또한 저를 남편으로 맞아 마음으로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관계는 이미 끝났어요! 그건 어떻게 해도 되돌아오지 않아요!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고요!”
“천만에.”
라피트가 붉게 핏줄이 선 눈으로 말했다.
“달라……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어. 당신이 내 아내가 되는데.”
“…….”
“당신을 차지할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나는 하겠습니다.”
연인은 눈이 멀어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저가 알던 연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리에네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든 라피트가 제 숙부에게 물었다.
“식장은 어딥니까?”
“식장까지 갈 게 뭐가 있겠느냐. 대사제가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그럼 여기서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좋은 생각이구나.”
리에네가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나는 절대…… 읍,”
그렇게 말하는 입을, 라피트가 제 손으로 막았다.
“혼인 서약은 공주님을 대신해 제가 하겠습니다.”
“무, 읍, 안!”
리에네가 라피트의 팔을 움켜쥐고 버둥거렸다.
“얌전히 있어요. 잠시만.”
라피트가 리에네를 붙들고 있는 동안 대사제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길게 늘어진 로브 소매 안에서 축성용 월계수 나뭇가지를 꺼내들었을 때 리에네는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
리에네가 버둥거릴수록 라피트는 리에네를 더욱 힘껏 붙들었다. 그에게 안기다시피 월계수 나뭇가지 앞으로 질질 끌려간 리에네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막은 라피트의 손바닥 살을 물었다.
“읏…….”
라피트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살갗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그는 리에네를 놓지 않았다. ……제발 놓으라고. 제 힘으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뼈아픈 좌절감이 리에네의 어깨를 짓눌렀다. 제발. 턱이 부서질 것처럼 힘을 주어도 질긴 살갗에서는 피가 좀 흐를 뿐이었다. 입 속에 번지는 짜고 비린 피 맛에 속이 울렁거렸다. 리에네가 메스꺼움을 삼키느라 고개를 숙이는 사이 대사제가 나뭇가지를 들어 올려 리에네의 머리를 짚었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고기처럼 꼬챙이에 꿰인 기분이 들었다.
“태초의 신 대지의 뿌리 바다의 눈물 라 호레 베누시 아티카여. 오늘 당신의 흙이 잉태한 한 쌍의 연인이 제단 앞에서 당신의 이름으로 매듭의 언약을 맺고자 하니…….”
대사제의 장황한 혼인 축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쾅! 요란한 소음이 굳게 닫힌 문을 뒤흔들었다. 모두 하던 짓을 멈추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소음이었다.
* * *
“계속 해!”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린든 클라인펠터가 대사제에게 말했다. 대사제는 깜짝 놀라 바닥에 떨어트린 월계수 나뭇가지를 다시 주우려 들었다. 하지만 리에네가 먼저였다. 재빨리 바닥을 더듬어 나뭇가지를 주워든 리에네는 뼈마디가 아플 정도로 힘껏 쥐고 놓지 않았다.
“내놓으세요.”
라피트가 리에네의 입을 놓고 나뭇가지를 빼앗으려고 했다. 쾅! 좀 전보다 더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일이야! 어서 가서 보고 와라!”
린든 클라인펠터가 사병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사병 둘이 서둘러 창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밖을 살필 새도 없이, 이번에는 저택 본관 정문이 쾅 울렸다. 쾅, 쾅! 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쾅! 콰직! 저 크고 육중한 문 일부가 떨어져 나가며 쪼개진 틈으로 날이 바짝 선 거대한 배틀 엑스가 콱 박혔다.
“뭐…… 무슨…….”
콰지직! 도끼가 쑥 뽑혀 나가며 제법 큰 균열이 드러났다. 말이 똑똑히 전해질 정도로 큰 틈이었다.
“문 열어.”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낮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한 명이었다. 그 남자가…… 어떻게? 블랙이 문 하나 너머에 있었다. 아직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
“로드 티와칸!”
리에네가 블랙을 불렀다. 라피트가 다시 리에네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무사합니까?”
“으, 음…….”
입이 막힌 리에네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전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클라인펠터 가의 사람들이나 대사제나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게 제 눈에도 보였다.
“열 마음이 없는 모양입니다, 주군. 그냥 부숴야겠습니다.”
페르모스의 경쾌한 음성을 따라 다시금 질릴 정도로 커다란 도끼날이 박혔다. 퍼억! 쾅! 저 견고하고 웅장한 문은 이제 곧 반으로 쪼개지게 생겼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 문이 사라지고 나면 티와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육신이 고작이었다.
“빌어먹을!”
린든 클라인펠터가 소리 죽여 욕설을 내뱉었다.
“문을 열어야겠다.”
라피트가 반발했다.
“숙부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저들을 손님이 아닌 적으로 맞이할 셈이냐?”
혼인식은 이미 강 저편으로 떠내려갔다. 강제 혼인식이 가능한 건 증인들이 모두 제 편일 때 얘기였다. 문 하나 너머에서 배틀 엑스를 휘두르는 적이 있을 때는 당연히 얘기가 달라졌다.
“너는 가서 몸을 피해. 저들에게 얼굴을 보여 좋을 것 하나 없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은 말씨름할 시간이 없다. 너희들, 장자를 데려가라.”
린든 클라인펠터는 사병들에게 라피트를 강제로 끌고 가도록 시킨 뒤, 이번에는 리에네에게 돌아서서 재빠르게 입을 놀렸다.
“값싸긴 하지만 어리석진 않으니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은 알겠지. 나우크를 전쟁터로 만들지, 이대로 놔둘지는 공주님 혀에 달려 있습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린든 클라인펠터는 당당했다. 애초에 리에네가 웨로즈 하나만 대동한 채 남의 눈을 피하듯 이곳에 온 이유를 아는 탓이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시길.”
린든 클라인펠터가 손가락을 딱딱 부딪쳐 사병에게 신호를 보냈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사병이 도끼날을 피해 가까스로 빗장을 들어 올렸다.
“어라? 싸우기는 싫은 모양인데요?”
그 와중에 빗장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던지 페르모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이, 도끼 내려놔. 더는 안 부숴도 되겠다.”
쾅! 이어서 거침없는 발길질이 클라인펠터 가의 정문을 두들겼다. 그으으응, 쿵! 엉망으로 파헤쳐진 문이 양쪽으로 밀리고, 이어서 블랙이 들어섰다. * * * ……어쩌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러면 반가워서 우는 것 같잖아. ……하지만 반갑지 않다고도 할 수가 없었다. 저 얼굴을 보는 순간 터무니없게도 안도가 느껴졌다.
“무슨 일로 내 집을 찾았나?”
린든 클라인펠터가 뻔뻔하게도 물었다.
“그것도 문까지 부숴 가면서. 이 무슨 무도하고 야만적인 짓인지. 사람이 아니라 들개가 하는 짓이 아닌가.”
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클라인펠터 경,”
리에네가 그의 무례를 지적하기 전에 블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뭐라고?”
대뜸 내던져지는 하대에 린든 클라인펠터의 안색이 변했다.
“쥐새끼도 아닌 게 굴 속에 숨어서 뭘 하고 있었는데.”
“무슨 그런…… 내가 내 집에서 무얼 하든 왜 야만인이 참견을…….”
“집이건 굴이건.”
저벅. 블랙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린든 클라인펠터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머리 하나는 큰 덩치 탓인지 블랙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린든 클라인펠터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문을 닫아걸지 마라. 내 정혼자가 있을 땐.”
“그게 웬…… 무슨…….”
블랙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가엾게도 린든 클라인펠터는 물러서지 않고 버티려다 상체만 뒤로 한껏 젖히는 이상한 자세를 하게 되었다. 누가 발목을 툭 치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았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블랙이 불쑥 고개를 돌려 리에네를 향해 물었다.
“아니요. 저는…… 저는 부고를 전했을 뿐입니다. 다칠 일은 없었습니다.”
“그건 확인해 봐야 알겠고.”
저벅! 블랙은 린든 클레인펠터 앞에 남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읏.”
쿵! 상체와 하체의 균형이 어긋난 린든 클레인펠터가 결국 뒷걸음질을 하다 바닥으로 넘어졌다.
“아, 이런!”
“경!”
뒤편의 사병들이 허겁지겁 다가왔으나 차마 그를 일으켜 세우진 못했다. 그러기엔 블랙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블랙은 마치 발 밑의 개미를 밟을까, 아니면 그냥 지나칠까 고민하는 인간처럼 서서 넘어진 린든 클라인펠터를 내려다보았다.
“잊지 마라.”
문을 닫지 말라는 것은 최소한의 저항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잊을 수 없는 방법으로 경고를 한 블랙이 휙 몸을 돌렸다. 그가 마주한 것은 리에네였다.
“마중 나왔습니다.”
“……네.”
그것으로 블랙이 클라인펠터 가의 저택을 찾아올 이유는 충분했다.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네.”
리에네가 제 발로 걸어 블랙의 앞에 섰다. 블랙은 말없이 리에네가 내민 손을 쥐었다.
“어서 돌아가요.”
이대로 끝났으면 했다. 클라인펠터 가의 만행은 치가 떨렸으나, 유감스럽게도 리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대로 덮는 것뿐이었다.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이곳에 숨어 있고, 리에네를 포기할 생각이 없기에 암살을 시도했으며, 강제로 혼인식을 치르려 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지금 이 순간부터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나우크가 반으로 찢겨 서로를 죽이고 죽게 될 것이다. 리에네가 그 무엇보다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볼일은 마쳤습니다. 더는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티와칸은 리에네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벌써요?”
페르모스가 피식 웃으며 외알 안경을 밀어 올렸다.
“볼일을 마쳤다고 곧장 돌아갈 이유라도 있습니까? 클라인펠터 가는…… 어디 보자. 나우크에서 가장 돈이 많은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 온 김에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시죠. 이제 곧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되실 저희 주군께서 친히 방문하셨는데, 집주인도 성심껏 예의를 갖춰야지요. 간다고 그냥 보내면 그건 집주인 대가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닙니까?”
졸지에 대가리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된 린든 클라인펠터가 노기로 달아올랐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데 페르모스가 잽싸게 순서를 가로챘다.
“그리고 마침 잘됐습니다. 저 늙은 양반은 차림새를 보니 이곳의 대사제인 모양인데, 기왕 마주친 김에 곧 있을 왕실의 혼례 절차도 상의하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군?”
대사제가 이유도 없이 신전을 비우는 일은 없어야 했다. 대사제의 정체를 알아본 페르모스는 그가 이 시간, 신전이 아닌 클라인펠터 가에 있는 이유를 알아내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건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그래서 리에네는 블랙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페르모스를 마주하던 블랙의 눈이 리에네를 향해 돌아왔다. 리에네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제법 간절해 보이도록 표정을 꾸며서.
“저는 이만 돌아가고 싶어요. 피곤해요.”
드러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당신이 파헤치기 전에. 리에네는 그 간절할 표정으로 블랙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근육으로 단단한 가슴이 움찔 굳어서 한층 더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함께요.”
당신이 나우크를 찢어 놓기 전에. 그걸 막을 수 있다면 스스로 안기는 것만이 아니라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
블랙의 낮은 숨소리가 이마로 스며들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리에네는 그에게 기대 있는 지금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제 무게가 아무리 더해져도 무리가 없을 듯한 단단한 가슴은 나우크의 성벽 같았다. 안락하고 안전하게 보호받는 기분이었다.
“희한한 일이군요.”
“뭐가…….”
블랙이 리에네를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낮게 중얼거렸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뻔히 알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서 따지고 들 마음이 안 드는 게.”
“…….”
……그래, 모를 리 없겠지. 그저 부고를 전하러 왔다는 말로 전부 해명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리에네도 이 순간이 희한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자가 마냥 이렇게 든든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이.
“원한다니 돌아가겠습니다.”
블랙이 리에네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끌어안는다기보다는 부축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가 모른 척 넘어가 주는 사람은 리에네뿐이었다.
“너는 남아서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고 와라. 대사제와 볼일도 마치고.”
페르모스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물론입니다, 주군.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인원이 신속히 나뉘었다. 블랙을 호위해 성으로 돌아갈 자들과 페르모스와 함께 클라인펠터 가에 남을 자들이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