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한 순간도2021.05.19.
……신경 쓰여. 블랙은 자신의 말에 리에네를 태웠다. 등 뒤에서 전해지는 체온과 감촉이 리에네를 자꾸 불편하게 만들었다. 블랙을 따라온 자들은 클라인펠터 가의 저택에 남은 숫자보다 적었다. 세 명의 용병이 저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따라오는 식이었는데, 그래서 리에네는 블랙과 단둘만이 어딘가를 가는 기분이었다.
“다친 어깨는…… 불편하지 않으세요?”
리에네는 제 불편함을 삼키다 물었다.
“고삐를 쥐고 있기 힘드시면 제가 쥐겠습니다.”
블랙은 말고삐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리에네의 몸을 받치고 가던 중이었다.
“그럴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군요.”
“그것보다 다른 게 불편합니다.”
“어떤…….”
“왜 공주님의 입술에 피가 묻어 있을까 하는 생각.”
“네?”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술을 문질렀다. 피가 묻었다니. 설마 그 사람을 물었을 때…….
“물렸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물린 게 아니라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려면 왜 라피트가 제 입을 막았는지 함께 설명해야 했다.
“그럼 왜 피가 묻었습니까?”
“이건…… 그러니까…….”
도무지 그럴싸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다친 게 아니라…….”
“공주님이 다친 게 아니라.”
“그게…… 어쩌다 묻어서…….”
“하필 입술에.”
“…….”
입술에 피가 묻을 만한 상황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답을 하지 못하는 리에네를 지켜보던 블랙이 갑자기 말을 세웠다. 리에네가 이유를 묻는 대신 고개를 뒤로 돌려 블랙을 바라보았다. 비틀리는 입술 선이 보였다. 말고삐를 놓고 그 손으로 리에네의 몸을 제 쪽으로 돌린 블랙이 물었다.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뭘…… 말인가요.”
“정말로 다친 게 아닌지.”
다치지는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네. 제가 다친 게 아니에요.”
“못 믿겠어.”
마지막 말은 너무 빠르고 나직한 나머지 리에네가 대꾸할 새가 없었다. 블랙은 양손으로 리에네의 얼굴을 쥐어 끌어당겼다. 놀랄 틈도 없이 입술에 혀가 닿았다.
“왜…….”
“입 벌려요.”
“…….”
그가 입 안을 훑었다.
키스가 아니었다. 블랙은 정말로 상처가 있는지 보기 위해 입 안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키스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입 안쪽을 타인이 꼼꼼히 훑고 매만지는데도 키스가 아니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가 입술을 뗐을 때 리에네는 그의 소매를 꽉 움켜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상처는 없군요.”
……그렇다고 했는데.
“다행입니다.”
과연 다행일까. 이 감각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데. 아직도 입 안에 그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몸이 계속 잘게 떨려와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블랙이 제 입술에 남은 물기를 혀로 쓰는 모습마저 꼭 현기증처럼 아찔했다.
“왜 그 집에 혼자 있었던 겁니까?”
블랙은 다시 말을 출발시켰다. 아직 몸이 그를 향해 틀어져 있는 상태에서 말이 움직이자 균형을 잡기 위해 그에게 더 바짝 파고드는 자세가 되어야 했다. ……이런 게 이상하다는 거야. 이렇게 안기느니 차라리 말에서 떨어지는 게 더 나답지 않아? 이런 의문들이 리에네를 괴롭혔다. 왜 이 남자는 나를 이렇게 만드는 걸까. 나는 당신이 싫고 두려워야 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대답하기 어렵습니까?”
“……아니요. 웨로즈 경이 동행했는데 어쩐 일인지 중간에 사라져서…… 아, 웨로즈 경!”
리에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웨로즈를 잊고 있었다.
“웨로즈 경이 갇혀 있을지 몰라요.”
“그 집에?”
“네. 말도 없이 사라질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그랬다는 건 변고가 있다는 뜻이니까…….”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이럴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궁에 돌아가 경비대를 보내야 했다. 웨로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웨로즈는 리에네에게 언제 어느 때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빨리 돌아가 주세요. 어서 경비대를 보내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블랙이 말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춘 다음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저 멀리 떨어져서 따라오던 수하들이 부리나케 말을 달려왔다.
“예, 주군.”
“하나는 왔던 길을 돌아가야겠다. 페르모스에게 전해. 나우크의 경비대장을 찾으라고.”
“알겠습니다.”
명령은 신속했다. 더 얘기를 할 것도 없이 셋 중 하나가 즉시 말 머리를 돌려 클라인펠터 저택으로 달려갔다. 그 빠른 속도를 보면 저가 성으로 돌아가 경비대를 부르는 것보다 몇 배나 빠를 듯했다.
“……감사합니다.”
리에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가 안락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그가 크고 단단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런 모습들 때문이었다.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 말을 들어줘서. 상처를 확인해 줘서. 필요한 일을 해 줘서. 걱정을 덜어 줘서. 마치 진짜 애정으로 맺어진 부부인 것처럼.
“내가 마땅히 할 일입니다.”
몸이 닿아 있는 탓에 그가 말을 하면 살갗이 울렸다. 이런 게 조금도 싫지 않았다. 다각다각……. 말은 한 번 늦춘 속도대로 느리게 걸어 성을 향했다. 이 느린 시간도 싫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 * *
“그래서 장례식 비용으로는 총 170밀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관 값이 굳어 다행입니다.”
마실로우는 숫자들이 빼곡하게 쓰인 종이를 리에네 앞에 내밀었다. 그걸 받아 목록과 숫자를 빠르게 훑고 난 리에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내려놓았다.
“적당한 가격이네요. 티와칸에게 감사할 일이로군요.”
“감사까지 할 일은 아닙니다. 저들이 아니었다면 장례식도 없었을 겁니다.”
마실로우가 못마땅한 듯 수염을 쓰다듬었다. 꼭 심통을 부리는 어린애를 보는 듯했다.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기습을 감행한 쪽은 나우크라는 걸 알려드려요. 말했듯이 따질 일은 아니니까 넘어가죠. 혼인식 예물은 어느 정도 규모가 가능한지 알 수 있을까요?”
“예물을 하실 생각입니까?”
오히려 마실로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쪽에서 저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손 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혼인식에 드는 비용과 혼례복을 감당하기로 했죠. 예물은 다른 얘기예요.”
“그렇게 일일이 예의를 갖추실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받은 게 있는데 그럴 수는 없어요.”
약혼 선물로 커다란 궤짝을 가득 채운 금화를 받았다. 혼인 예물까지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건 결혼이 아니라 강도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참. 강도짓이라니. 누가 누구한테. 제 생각이 우스워 리에네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왜 자꾸 억지로 청혼한 건 그 남자라는 사실을 잊는 걸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약혼 선물로 받은 금이 있잖아요. 돈이 부족한 건 아니니 역대 나우크의 혼인식과 비슷하게 예물을 꾸려 주세요. 혼인식이 있기 전까진 티와칸에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크흠, 흠.”
돈 얘기가 나오자 마실로우가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마실로우 경?”
뭔가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 돈은…… 그게…… 그리 썩 많이 남아 있진 않습니다, 공주님.”
“네?”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경? 돈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요?”
“그게…… 삼 년 전에 갱신한 차용증에 의해, 조세 이외의 왕실 소득은 가장 큰 채권자인 린든 클라인펠터 경의 소유가 됩니다.”
“뭐라고요?”
리에네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차용증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공주님.”
마실로우가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기억이 안 나십니까? 삼 년 전에 큰 가뭄이 들지 않았습니까. 여름이 다 지나도록 비 한 방울 오지 않았지요. 워낙 물이 부족한 곳이기는 합니다만, 그때는 너무 과했던지라…… 거기에 농작물에는 큰 풍토병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공주님께서…….”
마실로우가 그쯤에서 입을 닫았다. 하얗게 일그러지는 리에네의 표정을 보니 기억을 한 듯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차용증을 쓰고 클라인펠터 가문에서 돈을 빌렸죠. ……맞아요. 내가 그랬군요.”
그때의 기억은 온통 절망밖에 없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산 채로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클라인펠터 가가 내미는 차용증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서명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굴욕적이었고, 앞날이 두려웠지만 당장 매일 목격하는 죽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그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나요?”
“법률에 따라 어제 액수를 확인한 뒤 클라인펠터 가에 보냈습니다. 금액만큼 원금과 이자를 차감한다는 증서를 받았고요.”
“그런 얘길, 제게 알리지도 않고요?”
“저는 마땅히 공주님께서도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
리에네가 할 말을 잃고 마실로우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고의였다. 리에네에게 알리면 다른 지출을 먼저 결제할 게 뻔했으니 돈이 들어온 즉시 클라인펠터 가에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용돈을 두둑이 받아 챙겼겠지. 마실로우가 딱히 악독한 인간이라서 클라인펠터와 죽이 맞는 게 아니었다. 밀로드 대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가난한 왕실보다는 콩고물이 떨어지는 클라인펠터 가에 기대 살고 있을 뿐이었다.
“원하신다면 클라인펠터 경에게 예물을 살 비용을 차용해 오겠습니다. 클라인펠터 경은 공주님의 혼사를 환영하는 입장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대한 분이니 기꺼이 필요한 돈을 빌려주실 겁니다.”
“……됐어요.”
리에네가 지친 음성을 내뱉었다. 관대하긴. 그 인간이 잘도. 왕실이 진 막대한 부채는 이제껏 클라인펠터 가문이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오만무례하게 굴 수 있던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린든 클라인펠터가 오늘 한 짓을 보면 혼인식을 이유로는 절대 한 푼도 빌려주지 않을 게 뻔했다.
“더 이상의 빚은 안 돼요.”
그리고 이제는 빚에 매여 질질 끌려다니는 짓도 그만하고 싶었다. 오늘 겪은 일은 아직도 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왕실을 우습게 여긴들 그런 짓까지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미리 대사제를 불러다 놓고 강제 혼인이라니. 그건 리에네를 나우크의 통치자로도, 동등한 인간이라고도 여기지 않는 짓거리였다. 블랙이 그 시간,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는 그 집 안에 갇혀 강제로 혼인식을 올린 뒤 초야를 치르고 있었을 것이다.
“외람되지만 공주님, 그건 결심만으로는 어려우실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실로우가 한마디를 보탰다.
“나우크는 몇 년째 클라인펠터 가문의 돈으로 연명하는 꼴입니다. 그 돈줄이 끊기면 모두가 굶어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
“원금을 줄이기는커녕 이자라도 갚기 위해 또다시 돈을 빌려야 할 판입니다. 그나마 티와칸이 준 돈으로 일부를 메웠으니 잠시 숨통이 트인 겁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리에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삼 년 전에 겪었던 좌절과 무기력이 다시금 떠올랐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속이 울렁거렸다. 리에네가 창백한 얼굴로 손짓을 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보세요. 예물은 잊을게요.”
“그러지요. 쉬십시오, 공주님. 안색이 좋지 못합니다.”
마실로우는 조금도 걱정으로 들리지 않는 걱정을 늘어놓은 뒤 왕의 집무실을 떠났다.
“……지긋지긋해.”
리에네가 애꿎은 잉크병을 쓰러트렸다. 뚜껑이 닫혀 있었기에 잉크는 새지 않았다. 사실은 뭐든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혼자 하는 화풀이조차 리에네에게는 사치였다. 잉크병이 깨지면 그걸 다시 살 돈을 마련할 궁리를 해야 하는 사람은 리에네였다.
“나를 얼마나 뻔뻔한 인간으로 여길까.”
그 많은 돈을 전부 써 버리고 예물 하나 해주지 않겠다고 하면. 제 처지가 우습고 비참해 리에네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손가락 새로 고통스러운 자조가 새어나갔다.
“……아니, 이럴 시간에 뭐라도 해야지.”
리에네가 몸을 일으켰다. 번듯한 예물은 할 수 없어도 자신이 줄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