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움직이지 마2021.05.23.
“흐음…… 지레짐작했던 것보다는 괜찮군요.”
빛바랜 먼지가 쌓인 나무 트렁크를 열어 본 플램바드 부인의 평이었다.
“네. 제 생각도 그래요.”
리에네가 플램바드 부인을 데려온 곳은 왕실의 창고였다. 그중에는 선친이 입던 옷을 보관해 둔 트렁크가 있었다. 돈이 될 만한 장신구는 거의 다 팔아 버렸지만 그래도 손대지 않고 남겨 둔 게 있었다. 선친의 혼례식 예복도 그중 하나였다.
“자수 상태가 그대로예요.”
리에네는 한때의 부유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예복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 옷이 남아 있었을까요. 선왕의 유품은 거의 다 정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플램바드 부인은 돈이 없어 팔아치웠다는 얘기를 적당히 둘러 포장해 주었다.
“이 옷은 뭔가 아까웠거든요. 너무 잘 지어지기도 했지만, 왠지 좋은 기억이 남아 있어서…… 아, 잠깐만?”
말을 하다 말고 리에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이 옷이 분명 선친의 혼례식 예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바마마가 이 옷을 입으셨던 기억이 나한테 남아 있지? 리에네가 혼란스러워진 얼굴로 플램바드 부인에게 물었다.
“이 옷은…… 혼례복이 아닌가요?”
“생긴 건 그와 비슷한데, 제 기억으로는 다른 날 입으셨습니다.”
“언제요?”
“아마도 대관식 때 같습니다. 이리 훌륭한 예복은 아주 특별한 날에만 입는 게지요.”
“대관식…… 그럼 제가 태어난 다음에 대관식을 치르셨나요?”
“그러셨습니다.”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무의식중에 남겨 둔 걸까. 리에네는 지금 봐도 훌륭한 옷감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촘촘한 은사 자수는 아직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단추 장식도 그대로예요.”
진주와 루비를 하나씩 교차해 만든 단추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옷이 남아 있다는 걸 이제껏 잊고 있었다는 게 행운 같았다. 이 정도 옷이면 혼례식 예복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크기에 맞춰 조금만 손을 보면 될 것 같아요.”
“세탁을 한 뒤 깨끗하게 다리면 새 옷처럼 보일 겁니다.”
다행히 플램바드 부인은 옷을 고치는 데 긍정적이었다. 리에네가 어쩐지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으로 부인에게 말했다.
“저는 부인이 화를 내실 줄 알았어요.”
“제가요?”
“네. 귀한 옷을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게 준다고요.”
“그야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일이지요.”
플램바드 부인이 묘하게 씁쓰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까짓 게 아무리 안 된다고 해봤자 혼인은 치러질 게 아닙니까. 그래도 공주님의 혼인식인데 갖출 것은 갖춰야지요. 예절이라고는 쥐뿔도 모를 야만인들이 저들 멋대로 신랑에게 아무 옷이나 입히는 걸 보느니, 차라리 이게 낫겠습니다. 속은 야만인일지 몰라도 겉은 공주님께 어울리도록 만들어 봐야지요.”
리에네가 웃으며 플램바드 부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울고 싶은데요.”
“네? 제가 입을 잘못 놀렸습니까, 공주님?”
“아니요. 듣기 좋아서요.”
“아이고, 저런.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요…… 공주님도 참.”
플램바드 부인이 멋쩍게 볼을 붉혔다. 부인이 얼마나 저를 위하고 걱정하는지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요.”
가만히 리에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주던 플램바드 부인은 그냥 가만히 얘기를 듣기만 했다.
“물론 시작은 아주 나빴지만요. 그걸 모르는 건 아닌데…… 그냥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절 대할 때 그리 험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더하더라고요. 나는 정말로 사람이 바뀐 줄 알았어요.
“내가 다친 것 같으면 신경 쓰기도 하고…….”
오늘 그 남자가 상처를 찾는다고 내 입에 한 짓을 나는 아마 평생 못 잊을 거예요.
“무례할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그래서 별로 싫지 않아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자꾸만 그렇게 돼요.
“오늘은…… 나를 데리러 와 줘서 너무…….”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리에네가 조용히 삼켰다. 플램바드 부인은 제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알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면 착하고 심약한 부인은 저보다 더 충격을 받을 테니까.
“……안심이 됐어요.”
“그렇군요. 그럼 그자가 저 옷을 입어도 되겠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렸다.
“그리고 사실 보기에 그리 나쁜 사내는 아니라서요. 알맹이가 문제겠지만.”
그 말은 리에네를 소리 내어 웃게 만들었다.
“그건 잘생겼다는 말인가요?”
플램바드 부인은 라피트 클라인펠터에게도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뭘 또 묻고 그러십니까. 그냥 그런 거지요. 야만인이라고 다 보기 좋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나요, 어디.”
……뭐, 잘생기긴 잘생겼지. 처음 봤을 때는 믿고 싶지 않을 정도였어.
“저 옷이 잘 어울릴 겁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리에네와 플램바드 부인이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럼 제가 치수를 알아올게요.”
“그럼 저는 공주님의 상복을 고치는 대로 저 옷도 고치겠습니다.”
“나하고 같이 해요. 나도 거들고 싶으니까.”
“뜻대로 하세요, 공주님.”
리에네는 옷 치수를 재기 위해 블랙을 찾아갔다. * * * 그 시간 블랙은 자신이 머무는 방에서 수하들과 있었다. 함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넛 정도였는데 다들 체격이 커서 그런지 방이 비좁은 느낌이었다. 그 덩치들 사이에서도 블랙은 도드라졌다. 블랙의 키가 제일 컸는데, 희한하게도 그는 다른 이들처럼 거구로 보이는 게 아니라 날렵하고 늘씬해 보였다. 생김새가 달라서 그런가……. 리에네는 그가 보기 좋다던 플램바드 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서. 혼자서만 저렇게…… 매혹적이라.
“내게 볼일이 있는 겁니까?”
블랙이 리에네를 향해 물었다. 리에네는 그 전까지 자신이 빤히 블랙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네. 잠시 혼례식 예복을 상의할까 합니다.”
블랙이 리에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
“나가 봐.”
“예, 주군.”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블랙은 굳이 사람들을 내보냈다. 리에네는 그게 아직은 티와칸의 용병들을 불편해하는 자신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단둘이 남았네……. 그보다는 또다시 이 방에 그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어쩐지 자꾸만 키스를 해야 하는 이유가 생겨나는 이 방이라는 게.
“말하세요.”
블랙은 침대 앞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리에네가 자리에 앉아 그를 마주 보았다. 블랙은 침대에 누운 게 아니라 걸터앉아 있었는데, 상처를 드러내 놓기 위해서인지 셔츠를 반만 입은 채였다. 설마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겠지. 자기가 나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있어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한 생각이었다. 리에네가 고개를 저어 부적절한 생각을 몰아내며 말을 꺼냈다.
“로드 티와칸의 혼인 예복은 제가 마련할까 합니다. 예물이라 하기에는 부족하겠지만, 지금 제가 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성의입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리가 아닙니다.”
무리하고 싶어도 할 게 없었다. 국고는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으니까. 내일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리에네는 그만큼 더 가난해질 예정이었다.
“새로 짓는 게 아니라 선왕의 대관식 예복을 입으셨으면 합니다.”
“…….”
그 말에 잠깐 묘한 정적이 흘렀다.
“혹시 생각에 어긋난다면…….”
“그럴 건 없습니다.”
그 정적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블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치수를 재게 해주세요.”
“……지금 말입니까?”
“네.”
리에네는 플램바드 부인에게서 빌려온 자를 꺼내 들었다. 낡은 가죽 줄에 눈금 표시가 되어 있는 자는 이제껏 아주 많은 왕실의 의복을 만들어 왔다.
“먼저 상체를 재겠습니다. 팔을 양쪽으로 벌려 주세요.”
“…….”
블랙은 잠시 리에네를 바라보다 순순히 팔을 벌려 주었다. 리에네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에게 다가가 꼼꼼히 치수를 재었다. 손목 둘레를 재고 손목에서 팔꿈치, 그리고 다시 팔꿈치에서 어깨까지를 쟀다. 어깨를 잰 다음에는 목둘레를 재야 했다.
“이젠 팔을 내리셔도 됩니다.”
“…….”
블랙이 팔을 내리고, 리에네가 줄자로 그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리에네는 그가 내내 말이 없던 이유를 깨달았다. ……너무 가까워. 목둘레를 재려면 목을 감아야 했고, 그러다 보면 바짝 붙어서게 되었다. 그는 앉아 있고, 저는 허리를 살짝 숙인 자세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건 자신이 그에게 먼저 키스를 했을 때 취했던 자세였다. 그걸 깨닫자 시선이 블랙의 입술에 묶였다. 너무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다. 아…… 부인에게 재 달라고 할걸. 팔을 잴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던 손이 목에 닿아서는 굳은 듯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이게…… 이런 일이 될 줄 몰랐어. 블랙이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곧장 귓가를 데웠다.
“나는 지금 좀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이게 우리 약속의 일부인지.”
“네?”
리에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블랙의 목에는 여전히 줄자가 감겨 있었고, 리에네의 손은 그 끝자락 눈금이 겹치는 부분을 누르고 있었다.
“공주님도 나를 원하겠다고 약속했잖습니까. 지금이 그런 신호인지 묻는 겁니다.”
“아니, 저는…….”
말도 못 하게 당황스러운 기분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이건 정말 옷을 고치려고 그랬던 건데…….
“아닙니까?”
“그게…… 생각을 했던 건 아니라…….”
“그런 건 아닙니까?”
조금도 아니었다. 적어도 시작은 아니었었다.
“……네.”
그러자 블랙은 뭐라고 대꾸를 하는 대신 제 목에 자를 두른 리에네의 손가락 마디를 만지작거렸다.
“약속을 지키려던 건 아니었고, 그저 옷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알겠습니다.”
손을 만지던 손길이 사라졌다. 어쩐지 한숨을 내쉬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마저 재십시오.”
“…….”
리에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줄자의 눈금을 읽었다.
“여기는 다 됐습니다.”
목이 가장 곤란한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순서가 가슴둘레라는 것을 깨닫자 이제까지는 고작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팔을 들어 주…….”
자를 들고 몸을 더 낮추던 리에네가 갑자기 말을 끊자 블랙이 되물었다.
“이제는 가슴을 잴 차례입니까?”
아는구나.
“그래서 더 곤란해지셨고요.”
다 아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모르겠다. 그가 나무처럼 마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마음 편하게 치수를 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뭘 해도 불편하겠지. 뭘 해도 신경 쓰이고 뭘 해도 이렇게…… 떨릴 거야. 이 남자라서.
“되도록 가만히 계세요.”
리에네는 입술을 한 번 잘근 문 뒤 다시 자를 치켜들었다. 뭘 해도 떨릴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그냥 빨리 해치워 버리는 게 낫겠어.
“움직이지 마세요. 할 수 있는 한 빨리 할 테니까.”
“…….”
블랙이 후, 하는 낮은 숨소리를 내뱉더니 일어서서 팔을 들었다. 리에네는 해치워 버리자는 심정으로 팔을 벌려 그의 가슴에 자를 둘렀다. 두 팔을 벌린 그에게 한껏 안기는 자세라는 것은 저도 알았다. 알아.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잖아. 이런 일은 앞으로도 있을 거야. 그럴 때마다 일일이 휘둘릴 수는 없어. 나는 이 남자에게 어서 빨리 익숙해져야 해. 리에네는 억지로 블랙에게서 시선을 떼어내 눈금을 확인했다.
“이제 허리를 재겠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빠르게 떨어지는 손을, 블랙이 불쑥 쥐었다.
“천천히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네……?”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별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남자……. 리에네의 손을 끌어와 다시 제 가슴팍에 붙인 블랙이 느릿느릿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내가 움직이면 싫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