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나, 둘, 셋2021.05.26.
싫으냐고 묻는 건 반칙이었다.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언제나 답은 싫지 않다는 말 하나였으니까.
“움직이면…… 무얼 하시려고요.”
“할 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느리게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손짓이 목덜미에서 멎었다. 무시하기로 했던 그 감각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몸속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번져 갔다. 블랙의 가슴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떨리는 게 제 눈에도 보였다.
“그 많은 걸 다 할 수는……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렇습니까?”
블랙의 한쪽 눈썹이 꿈틀 휘었다.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
“지금은 혼인식 준비가 아주 바쁘고 그래서…….”
말을 하면서도 무슨 핑계인가 싶었다. 자신은 그에게 안겨 꼼짝도 없이 몸을 떨고만 있는데.
“그럼 짧게 하면 됩니까?”
뭘 한 건데. 그를 말릴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그에게 서로를 원하는 관계가 되자고 제안했던 건 리에네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꼭 그를 말리기를 바라는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아까 그대로 보낸 게 실수였어.”
이런 말을 속삭인 블랙이 리에네의 허리를 감아 들었다. 상체가 뒤로 젖혀졌지만 불안하진 않았다. 넓은 손바닥이 등을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리에네는 저 팔이 자신을 얼마나 안락하게 감싸는지 알고 있었다.
“…….”
블랙이 턱을 쥐고 입술을 겹쳤을 때 리에네는 실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처만 확인하고 말았던 게 아쉬웠다는 뜻이었다. 거기서 닫아걸었던 욕구가 내내 몸속에 남아 심기가 어지러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기회를 찾아 터트리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나도 그랬는데. 나도 내내 당신이 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내내 몸이 떨렸는데. 그렇게 정신없는 키스가 이어졌다. 한 번 중단되었던 욕구는 다시 시작되었을 땐 더 거세고 탐욕스러웠다. 한차례 두 사람을 해일처럼 휩쓸고 간 욕구가 천천히 밀려 나갔을 때, 리에네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감고서 맞붙은 입술의 감각을 간절히 느끼는 중이었다. 입술이 아주 느리게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가까웠다.
“짧게 하려면 여기서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블랙은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빼며 말했다. 리에네가 원하면 언제든 그를 벗어날 수 있었다.
“……네.”
그 말에는 리에네도 동감이었다. 미쳤어. 나는 아직도 아쉬운 것 같아. 그러니까 더욱더 여기서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그만두자는 말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만두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서로 닿은 채 머물러 있었다. 등을 받친 커다란 손이 아주 천천히 살갗을 톡톡 두드렸다. 그 작은 동작조차도 너무 자극적이었다. 리에네는 블랙의 소매를 힘껏 움켜쥐고 작게 말했다.
“숫자를 셀 테니까 동시에 멀어져요.”
“…….”
블랙이 뭐라고 알지 못할 소리를 잇새로 흘렸다.
“시도는 해 보는 걸로.”
“네. ……하나, 둘, 셋.”
숫자를 센 리에네가 블랙의 소매를 놓고 발을 뒤로 물렸다.
“……?”
그런데 블랙은 아니었다. 리에네가 왜 가만히 있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가 엄지로 리에네의 입가를 문질렀다.
“숫자가 너무 빨랐던 것 같습니다.”
“그랬……나요?”
“다시 세요. 이번에는 천천히.”
“천천히 센다고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는데요.”
“별 효과는 없을 겁니다.”
“그럼 왜 천천히 하라고 하는 건가요?”
“시간이라도 벌려고.”
“네?”
블랙은 대꾸 대신 리에네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덥석 안기게 되어도 이전처럼 당황이 크진 않았다. 이렇게 더 있고 싶어. ……정말로 미친 것 같아. 블랙은 이제 그만 숫자를 세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리에네는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에게 안긴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 * *
“이런…… 제가 방해한 겁니까?”
블랙을 찾아온 이는 페르모스였다.
“나중에 다시 올까요?”
“……?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방해는 제가 하지 않았나 싶군요. 편히 얘기하시도록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리에네는 페르모스가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노크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은 서로를 붙든 손을 놓았다. 거리도 적당히 떨어졌고 리에네는 플램바드 부인에게 빌려온 줄자도 챙겼다.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페르모스가 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주님.”
하지만 그건 리에네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블랙의 눈만 봐도 두 사람 사이에 한바탕 정염이 불붙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페르모스는 그 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재미 삼아 가지고 노시는 건 아닐 테고. 그런 걸 재밌다고 여길 인간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쓸데없는 일이라고 할 성격이었다.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새 진심이 되셨다고 하자니 그건 또 시간이 너무 짧잖아. 게다가 리에네 공주에게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오늘만 해도 리에네 공주는 연인의 집에 다녀왔고, 거기서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하는 중이었다. 이 모든 걸 블랙도 알았다. 그런데도 신경을 안 쓰신다는 건가…… 아닐 텐데. 그럴 분이 아닌데.
“어, 음…… 그래도 이 얘기는 공주님이 계신 데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웨로즈 경의 행방은 찾지 못했습니다. 별다른 단서도 없고요.”
“네? 클라인펠터 가에 없다는 말인가요?”
당연히 거기에 있을 줄 알았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강제 혼인식을 계획하며 방해가 될 웨로즈를 잠깐 가둬 놓거나 따돌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혼인식이 무산되었으니 웨로즈도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네. 그게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페르모스가 외알 안경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그만한 기사에게 변고가 생겼을 땐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요. 그리고 클라인펠터 가의 반응을 보면 사람을 숨겨 두고 있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리에네의 말대로 웨로즈가 클라인펠터 가에 갇혀 있다고 하면 어떻게든 표시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린든 클라인펠터는 당당했다. 원하면 어디든 찾아보되, 대신 찾지 못하면 그 대가를 내놓으라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했다. 저택 안에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저택 밖으로 빼돌렸다고 하기에도 석연찮았다. 일단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고, 수색을 핑계로 거리 곳곳에 깔아 둔 티와칸의 눈을 전부 다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제 발로 모습을 감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도 안 돼…… 웨로즈 경이 그럴 리 없어요!”
나우크의 경비대장이 그런 무책임한 짓을 할 리 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정황이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요.”
“그래서 말인데, 그렇게 스스로 족적을 감춰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 게 아닐까요? 아주 다급한 일이라거나.”
“그런…….”
대체 그런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런 거라면 뭐, 일신에 큰 변고가 생긴 건 아니니까 사정이 나아지면 스스로 돌아오리라 생각됩니다. 아니면 공주님께 연락을 취하든지요.”
“그게…….”
아무리 들어도 혼란스러운 얘기였다. 리에네가 고개를 가로젓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엇, 공주님!”
놀라기는 페르모스가 놀라고, 블랙이 재빨리 리에네를 부축했다. 페르모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 뭐냐, 많이 놀라신 건 알겠지만 그래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듣기로는 홀몸이 아닐 때 크게 놀라는 건 위험……. ……아니, 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요. 가능한 한 항상 앉아 계시지요.”
페르모스가 적당히 얼버무리긴 했지만, 리에네는 저를 붙든 블랙의 팔근육이 긴장으로 당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맞아. 이 사람은 내가 임신했다고 알고 있지……. 조만간 유산을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거짓말을 해야 할 텐데,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뻔뻔하게 잘할 수 있을까. ……아니, 자신 없어. 그럼 그냥 차라리 솔직히 말할까. 아이를 가진 게 아니라고. 그럴 일조차 없었다고. 그럼 이 남자는 뭐라고 할까. 문제는 벌써 혼인 서약서를 썼다는 것이었다. 서약서에는 장차 태어날 아이의 성이 아르사크가 되는 데 동의하며 나우크의 통치권이 아이에게 이어지는 것을 보장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나우크의 통치권은 안전해졌다. 다시 말해 티와칸의 수장이 청혼으로 나우크를 집어삼키려 했어도, 아이가 태어나는 이상 통치권을 강도질해 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건 지켜야 하지 않을까. 아이는 리에네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리에네는 안전을 택했다. 여전히 티와칸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라는 안전장치를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여기 앉아요.”
블랙이 리에네를 거의 안다시피 해서 들어 올려 의자에 내려놓았다.
“크음, 흠.”
잠시 어색해지려는 공기를 눈치챈 페르모스가 헛기침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음, 이 사실도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클라인펠터 가의 가주가 대의장이던가요? 두 분의 혼인 선물로 금궤 두 짝과 새 침대, 그리고 고용인 다섯을 보내오기로 약속했습니다. 생긴 대로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인간이지 뭡니까. 나우크에서 제일 부자라면서 그렇게 구두쇠처럼 굴다니요.”
“네?”
리에네로 말할 것 같으면, 린든 클라인펠터가 혼인 선물을 내놓기로 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다.
“선물을 주기로 했다고요?”
선물이라니. 저주라면 모를까.
“뭐, 정확히는 주기로 한 게 아니라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내놓게 된 거랄까…… 그렇지만 주기는 줄 겁니다.”
“어떻게요?”
리에네가 숨 가쁘게 물었다. 린든 클라인펠터를 상대하고 온 페르모스는 리에네가 보이는 반응을 곧장 이해했다. 이 가난한 왕국에서 클라인펠터 가문이 매해 재산을 늘려갈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덜 사악한 저 공주님을 바짝바짝 쥐어짠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자랑으로 들리면 할 수 없겠습니다만, 제가 설득력이 강한 편입니다.”
“말로만 클라인펠터 경을 설득했다고요?”
“뭐, 아주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제가 말재주가 좋아 말이지요. 결국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했습니다.”
“그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요.”
리에네가 소리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그건 페르모스의 눈에도 좀 가엽게 비쳤다. 저 가냘픈 사람이 이 무너지는 왕국을 지탱하기 위해 어떤 고생을 해왔는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설마 저런 모습에 마음이 물러지시는 걸까. 지금은 왠지 나도 좀 그럴 것 같으니까. 블랙이 그렇게 동정심 넘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뭐 가끔은 인간이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페르모스는 그쯤에서 자신은 답을 모르는 의문을 접었다.
“믿으셔도 됩니다, 공주님.”
물론 린든 클라인펠터가 처음부터 얌전히 나온 건 아니었다. 페르모스가 적절히 협박을 섞은 결과였다. 페르모스는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죽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암시를 적당한 때에 드러냈고, 그 사실만큼은 어떻게든 감춰야 했던 린든 클라인펠터가 억지 양보를 한 셈이었다.
“그런데 완전 공짜는 아닙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아르사크 왕실에 대한 충성을 보이는 대가로 제 사생아를 인정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건 두 분이 결정하실 일이라 답을 하진 않았습니다.”
페르모스는 사생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리에네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을 눈치챘다. 역시. 그 사생아가 기사단장이겠군. 죽은 척 제 집구석으로 기어들어 와 다른 인물인 척하겠다 이거지. 반응을 보면 리에네도 클라인펠터 가문에서 그 사실을 알아챘던 것 같았다. 그 일로 뭔가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경비대장이 사라지고 리에네는 그 집에 갇히듯 남겨진 것을 보면 뻔했다. 뭐가 됐든 공주님은 그걸 자기 입으로는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염두에 둬야겠군. 리에네 공주는 아무래도 연인의 존재를 비밀에 부쳐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클라인펠터 가에서 있었던 일은 대강 이 정도입니다. 더 지시하실 일이 있겠습니까?”
“아니요. 나우크를 위해 해준 일에 감사드립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충성이야 마땅한 제 본분인 것을요.”
뜻밖의 선물을 얻은 채 리에네가 블랙의 방을 떠났다. 얼추 금액을 따지면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빚을 갚았던 약혼 선물보다 더 많을 듯했다. * * *
“공주님을 어쩔 생각이십니까?”
리에네가 떠난 뒤 페르모스는 별렀던 속내를 끄집어냈다. 블랙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벌써 짐작하시지 않았습니까. 장자가 죽자마자 어딘가에서 사생아가 튀어나왔다는데, 사실 그 장자가 안 죽은 거라면요. 일 더하기 일은 일이 아니라 이입니다.”
블랙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대개 침묵은 긍정이었다.
“공주님은 연인과 재회하고 오신 겁니다. 그게 주군을 배신할 속셈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일단 연인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알고 있어.”
사생아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리에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블랙도 보았다.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리에네가 보일 땐 제 눈은 그 여자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