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덫 (1)2021.05.30.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깨가 내내 아팠으니까. 리에네가 움직이면 제 고개가 따라서 움직였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고개가 따라 움직이니 자연히 화살 구멍이 난 어깨가 당겼다. 이해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뻔한 사실까지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저는 리에네를 넋 빠지게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눈앞에 있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알고 계시다니…….”
“그렇다고 내게 거짓을 꾸며대는 것도 아니야.”
“…….”
페르모스가 그게 과연 정말이겠냐는 표정으로 블랙을 쳐다보았다. 사실 블랙도 헷갈리는 중이었다. 리에네가 클라인펠터 가에서 있었던 일을 끝내 숨기려 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죽지 않은 연인이 나우크로 숨어들었다면 있을 곳이야 뻔했다. 리에네는 아마도 연인을 만나기 위해 부고를 전한다는 핑계로 그 집으로 갔을 것이다. 거기서 만나서, 그래서……. 빌어먹을. 거기까지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입술에 피가 묻어 있었다. 대체 상처 없이 입술에 피가 묻을 만한 일이 뭐가 있을지, 도무지 마땅한 답이 없어 내내 거슬리던 참이었다. 상처를 확인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확인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헷갈리게 하는 것은 리에네의 반응이었다. 연인을 만나고 왔으니 저를 거부하지 않을까 했는데, 리에네는 얌전히 저가 하는 짓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그게 상처를 확인할 목적이었노라는 시답잖은 핑계를 진짜로 믿는 듯했다. 그게 자꾸 갈증을 부추겼다. 그는 리에네가 약속대로 저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제 비위를 맞추는 척하고 있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제 삶에서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 계속 붙잡아 확인하고 싶은 것도 처음이었다.
-동시에 멀어져요.
리에네가 그 말을 했을 땐,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건 리에네도 도무지 먼저 손을 떼지 못하고 있는 자신과 같은 상태라는 얘기였으니까.
-하나, 둘, 셋.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그저 진솔해 보였다. 끝도 없이 떨리는 손끝과 바싹 선 솜털, 욕구로 짙어지는 눈동자가 제 육체를 원한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그게 정말 거짓일 수도 있는 걸까.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그 여자는 그런 척도 할 수 있는 걸까. 그걸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어려운 존재도 처음이었다.
“제아무리 거짓말을 잘하는 인간이라도 그런 미세 반응까지 전부 만들어낼 수는 없어.”
“으음…… 그렇긴 하지요.”
용병 일을 하다 보면 첩자를 골라내거나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입은 거짓말을 술술 내뱉을 수 있어도, 몸은 그러지 못하는 인간이 태반이었다. 솜털이나 식은땀, 심장박동 같은 미세 반응은 거짓말을 알아낼 수 있는 표시였다. 리에네의 미세 반응은 그저 저를 원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뭐, 그러면 당분간은 지켜본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사생아인 척하는 장자도 그냥 놔둘까요?”
“아직 그 집구석에 뜯어낼 수 있는 게 더 있을 것이다. 그쪽에서 아쉬운 구석이 있을 때 최대한 뜯어내도록.”
페르모스가 히죽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 집구석이 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지요.”
“결국 없애야 할 곳이다. 미리 덫을 놔둬.”
“언젠가 걸리면 싹 치워 버리도록 말이지요.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블랙이 눈을 감았다. 어깨가 아팠다. ……빌어먹을. 이제는 리에네가 앞에 없어도 저는 리에네를 보고 있는 듯했다.
* * * 페르모스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웨로즈가 제 발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리에네는 경비대를 불러 웨로즈의 행방을 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비대 역시 웨로즈의 부재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터라 졸지에 웨로즈의 자리를 떠맡게 된 부대장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후우…….”
경비대를 돌려보낸 리에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웨로즈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나우크 성의 경비는 자연히 티와칸에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티와칸에서 손을 쓴 건가…… 이런 결과를 바라서.”
블랙이 싫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리에네 역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웨로즈가 사라졌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더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참 고심하느라 미간에 주름이 가는 것도 모르고 있던 참에 플램바드 부인이 찾아왔다. 탕탕.
“공주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잠시 기다리세요.”
부인이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에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었다. 역시나 플램바드 부인은 양손으로 커다란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이게 다 뭔가요?”
“바느질거리입니다. 혼례복이요.”
“그렇군요. 이쪽에 내려놓으세요.”
리에네는 벽난로 앞의 깔개를 가리켰다.
“여기 공주님의 상복도 가져왔습니다. 품을 줄이고 깃을 덧댔으니 지금은 상복다워 보일 겝니다.”
“수고 많았어요, 부인.”
내친 김에 리에네는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훨씬 단정해진 상복을 꼼꼼히 입혀 준 플램바드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문제가 있긴 하군요. 여전히 너무 예쁘십니다.”
“……이 정도면 괜찮아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
리에네가 멋쩍어진 얼굴로 거울을 치웠다. 옷도 갈아입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바느질을 할 시간이었다.
“치수는 다 재 오셨습니까?”
“대강요.”
허리 아래부터는 재어 보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 다리 길이가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싶었다. 선왕도 키가 큰 편이셨으니 하의는 대충 맞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럼 어디 보지요.”
플램바드 부인이 깔개 위에 예복을 넓게 펼쳐 놓았다. 리에네가 자를 펼쳐 수치를 비교했다.
“꽤 많이 고쳐야 되겠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래요?”
“어지간한 옷은 맞지도 않을 사람 같습니다. 어휴, 무슨 어깨가 그리 넓답니까. 혹시 공주님이 잘못 재신 건 아닙니까?”
“제대로 잰 것 같은데요…….”
치수를 잴 때 얘기를 꺼내자면 리에네는 할 말이 없었다. 블랙을 의식하느라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저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건 숫자를 너무 빨리 세지 말라는 블랙의 목소리뿐이었다.
“이런 치수는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요. 정말 이럴까…… 이런 어깨에 한번 안겨 보면 무슨 기분이 들런…… 어마, 제가 그만 못 할 말을 했습니다.”
혼잣말을 중얼대던 플램바드 부인이 제풀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부인.”
“꼭 그러셔야 합니다. 제가 억지로 혼인을 하셔야 하는 공주님 앞에서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건지…….”
리에네가 고개를 돌려 잠깐 웃음을 참았다.
“이렇게 화려한 옷을 손보는 건 오랜만이잖아요. 부인도 조금은 들떠서 그렇겠죠.”
“그야…… 그렇지요. 그간 이런 일이 통 있었어야지요. 선왕께서 돌아가신 뒤로는 좋은 옷감을 만질 일이 통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게요.”
플램바드 부인의 바느질 솜씨는 나우크에서 가장 뛰어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매양 낡은 헌 옷을 기우는 일이나 해왔으니 간만에 신이 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혹시 옷감이 모자랄까요?”
“그래서 이 망토를 조금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대관식 날 길게 제단 아래로 늘어지게 만들어진 옷이니 혼례식 때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지요. 여기를 잘라 어깨와 목에 덧대면 더 근사해 보일 겁니다.”
“그러게요.”
“하는 김에 허리띠도 만드는 건 어떻겠습니까? 발목에도 같은 천을 대도록 하지요.”
“아, 좋을 것 같아요.”
“얼마나 더 대야 합니까? 이것보단 바지 기장이 훨씬 더 길어야 하지요?”
“그게…….”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다리 길이는 재지 않았어요…….”
리에네가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니, 어찌 그걸 잊으셨습니까? 자칫 바지가 짧게 올라와 발목이 다 보이면 어쩌려고요.”
“대충 맞을 줄 알았어요.”
사실 잴 수가 없었어요. 그 남자가 실수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아니, 제가 그 남자한테 홀리는 바람에.
“쯧쯧……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치수를 다시 재 오는 게 좋겠습니다. 만에라도 하나 혼례식 예복이 몸에 잘 맞지 않으면 어쩝니까.”
“그러게요…….”
이번에도 목소리가 참 작았다. 리에네가 과연 바지 기장을 제대로 잴 수 있을지 망설이고 있자 플램바드 부인은 그 모습을 오해했다.
“공주님. 그자를 다시 대하기 싫으신 겝니까?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꼭 싫다는 게 아니라…….”
“그렇지요. 어찌 기껍겠습니까. 제가 미처 공주님 마음을 헤아리질 못했네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공주님은 양쪽 소매를 떼고 계세요.”
“꼭 싫은 건 아니에요.”
리에네가 다시 한번 말했지만 오해는 풀 길이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아무리 그 사내를 꺼려한들 그게 어디 공주님만 하겠습니까? 그럼 잠시 혼자 계세요.”
바느질거리를 잔뜩 늘어놓은 플램바드 부인이 서둘러 리에네의 침실을 떠났다.
“아닌데…….”
혼자 남은 리에네가 괜히 얼굴이 붉어져서 가위를 만지작거렸다.
“진짜 아닌데…….”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게 그렇게나 이상한 일일까.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어쩐지 조금 마음을 무겁게 했다. 블랙의 방을 찾아간 플램바드 부인은 그가 수하들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을 타고 뒤쫓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부인은 경비대를 보내 리에네의 침실로 찾아 줄 것을 요청했다. * * * 플램바드 부인이 돌아온 뒤부터 리에네는 그냥 입을 다물고 바느질에 열중했다. 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이 방으로 와달라고 했다는 말을 하며 부인은 내내 리에네의 눈치를 봤다. 싫지 않다고 몇 번이고 얘기를 해도 썩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관두자. 나중에는 알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공주님.”
바늘이 사르륵 천을 통과하는 소리만이 들려오던 침실에 다시 사람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네, 부인.”
“혼인식이 이제 열흘 남짓 남은 게지요?”
“그렇죠. 내일 장례식을 치르면 그다음 날부터 정확히 열흘이에요.”
“그럼 음…… 공주님 달거리 날짜와 겹치지 않습니까?”
“아…… 앗.”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에 리에네는 바늘로 천이 아니라 제 손가락을 찔렀다.
“저런. 괜찮으세요?”
부인이 훌쩍 다가와 리에네의 손을 가져갔다. 엄지손톱 끝에서 빨간 피가 한 방울 솟아올랐다.
“아이고, 저런. 하필이면 손톱 아래를 찌르셨습니까.”
찔려도 제일 아픈 곳을 찔렸다.
“손을 이리 줘 보십시오.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야겠습니다. 제가 어서 가서…….”
“안 돼요.”
일어나려던 부인을 리에네가 덥석 잡았다. 엄지손톱 밑에서 피가 퐁퐁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리에네는 아픈 줄도 몰랐다.
“네? 뭐가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날짜…… 달거리 날짜 말이에요.”
얼굴이 백지처럼 하얬다.
“공주님…….”
비로소 부인의 얼굴이 리에네처럼 심각해졌다.
“들키면…… 안 될 거예요. 아니, 안 돼요.”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진정하라는 것처럼 리에네의 손등을 도닥였다.
“저야 정치나 이런 건 잘 모르지만 말입니다…… 혼인을 하기로 했는데 꼭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겁니까?”
“그게…… 네. 그래야 해요. 그래야 나우크의 통치권이 티와칸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어요.”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리에네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달거리를 감추는 방법은 없나요?”
“그걸 어찌 감추겠습니까. 그야 한 방을 쓰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혼인식이라면 그래도 초야를 치러야지 않습니까.”
“아…… 어쩌면 좋지. 그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날짜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새하얗던 얼굴에 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럼 방법은…….”
“초야를 거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인의 얼굴색도 리에네를 닮아 갔다.
“그런데 그자가 과연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