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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덫 (2) (18/145)

18. 덫 (2)2021.06.02.

핑계를 대려면 댈 수는 있을 것이다. 아이를 가졌으니까, 초야를 치를 수 없다는 핑계 같은 것. 그러나 유통기한이 너무 짧은 핑계였다. 혼인을 하게 된 이상 리에네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가져야 했다. 친부는 물론 블랙이겠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아이는 약속대로 아르사크의 성을 물려받아 다음 대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리에네에게는 가장 좋은 결말이었다. 억지 청혼으로 인한 혼인이었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고 모두 지켜낼 수 있었다. ……내 입장에서는. 하지만 그 남자는 아니야. 블랙은 제 자식을 제 자식인 줄 모르고 살게 될 것이다. 마음이 또 다른 이유로 무거워졌다. 나우크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나는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걸까…….

16550942003713.jpg“공주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의 상념을 깨트렸다.

16550942003719.jpg“아, 잠깐…….”

16550942003713.jpg“초야를 거절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알 수가 없었다.

16550942003719.jpg“모르겠어요. 뭐라고 해야 하는지.”

초야를 미룬다면 달거리가 끝날 때까지였다. 그때까지 블랙을 제 침대로 들이지 않을 이유가 필요했다.

16550942003719.jpg“일단 생각을 좀…….”

쿵쿵!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리에네의 말을 잘랐다.

16550942003713.jpg“그자가 왔나 봅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몸을 일으켰다.

16550942003713.jpg“문을 열어 주고 오겠습니다. 공주님은 일단 표정부터 가다듬으세요.”

문을 향해 총총 걸어가는 플램바드 부인의 등을 보며 리에네는 얼굴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16550942003713.jpg“네, 문을 열어 드리겠…… 어마야!”

문을 열던 플램바드 부인이 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16550942003719.jpg“부인?”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던 리에네는 부인이 비명을 지른 이유를 발견하고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블랙이 온 게 아니었다.

16550942003752.jpg“제가 방금 무슨 말을 들어서 말입니다.”

라피트였다. 결코 나우크 성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될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라피트는 당황한 플램바드 부인을 떠밀듯이 지나치고는 그대로 문을 쾅 닫았다.

16550942003752.jpg“공주님이 제 아이를 가졌다던데…… 사실입니까?”

  * * * 물론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라피트가 더 잘 알고 있을 일이었다.

16550942003719.jpg“당장 나가요.”

리에네는 팔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16550942003719.jpg“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여기까지 오는 길을 티와칸이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짐작은 조금도 하지 못했나요? 돌아가요.”

16550942003752.jpg“답을 듣기 전에는 못 돌아갑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뒷골이 당겼다. 리에네가 발을 쿵 굴렀다.

16550942003719.jpg“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요! 그 누구보다 진실을 잘 알고 있을 그대가!”

16550942003752.jpg“모릅니다!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나는 보름도 넘게 당신 곁을 떠나 있었는데!”

리에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16550942003719.jpg“뭐라는…… 지금 뭐라는 건가요.”

16550942003752.jpg“공주님은 내게 동침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

16550942003719.jpg“이…….”

생전 써본 적이 없던 아주 험한 말이 나올 것 같아 리에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16550942003719.jpg“설마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그대가, 내게?”

16550942003752.jpg“나는 공주님의 입으로 하는 해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아이가 대체 무슨 말입니까.”

정말로 몰라서 묻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그렇게까지 멍청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리에네가 티와칸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아이라는 거짓을 끌어왔다는 것을. 그렇게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16550942003752.jpg“그 야만인에게 내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습니까?”

라피트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애틋해졌다.

16550942003752.jpg“내가 당신의 남자라고 말했습니까? 당신이 속한 사람은 나고 당신이 앞으로 낳을 아이의 아버지는 나라고 말한 겁니까?”

16550942003719.jpg“…….”

리에네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했던 거짓말이 계속 아귀가 뒤틀린 채 전혀 알 수 없는 괴물로 변질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16550942003752.jpg“당신은 언제든 내 사람이라고 말한 거잖습니까. 그 야만인에게.”

16550942003719.jpg“그게…… 그렇지 않아요.”

리에네는 마치 저를 안을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라피트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라피트가 즉시 그 거리를 따라왔다.

16550942003752.jpg“어째서 아닙니까?”

16550942003719.jpg“그저 청혼을 피하기 위해 한 말이었어요.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그쪽에서 청혼을 물릴 줄 알았어요.”

16550942003752.jpg“그러니까 같은 말이지 않습니까.”

16550942003719.jpg“달라요.”

리에네는 라피트 클라인펠터를 죽도록 사랑해서 청혼을 거절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라피트의 착각일 뿐이었다.

16550942003752.jpg“다르지 않습니다. 사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16550942003719.jpg“달라요. 나는…….”

리에네가 말을 멈췄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였다. 되짚어 보니 이 상황이 기가 차 견딜 수가 없었다. 라피트는 제 집에서 벌였던 짓을 리에네가 그새 다 잊었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손바닥에 아직 내 잇자국이 남아 있으면서. 그가 한 짓은 도를 넘었다. 그는 나우크의 통치권이 리에네에게 있으며, 자신은 리에네에게 복종하고 충성해야 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렸다. 그 역시 클라인펠터였다. 부정할 수 없는 그 집구석의 핏줄이었다. 그만은 다를 거라 믿었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게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

16550942003719.jpg“나는 로드 티와칸과 혼인할 거예요. 그리고 아이를 낳을 거고요. 그 아이는 아르사크의 성을 이어받아 나우크의 통치권자가 될 겁니다. 그게 내가 나우크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길이에요.”

16550942003752.jpg“하지만 이미 내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야만인이 다른 사내의 아이를 멀쩡히 내버려 둘 것 같습니까?”

16550942003719.jpg“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16550942003752.jpg“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내가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 야만인이 나우크에서 꿈꾸는 건 복수라고. 그게 누가 됐든 피를 볼 생각으로 온 겁니다.”

16550942003719.jpg“확인도 되지 않은 뜬소문이 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요하지 말아요. 나는 믿지 않습니다. 아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에 서약서를 쓰자는 제안 같은 건 하지도 않았겠죠.”

16550942003752.jpg“야만인들에게 서약서 따위가 무슨 의미란 말입니까. 언제든 잡아 찢으면 그만일 것을.”

16550942003719.jpg“네. 그러니 아예 쓰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찢어 없앨 것을 왜 번잡하게 만들고 있나요?”

16550942003752.jpg“그래야 공주님이 청혼을 받아들일 테니까요.”

16550942003719.jpg“아니요.”

리에네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새파란 자조였다.

16550942003719.jpg“그 사람은 그냥 성문을 부수면 됐어요. 나우크의 경비대를 전부 죽인 뒤 나를 제단 앞으로 끌고 갔으면 됐을 일이에요. 서약서 같은 건 필요도 없이 내 이름은 티와칸의 신부가 됐겠죠.”

16550942003752.jpg“리에네…….”

라피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를 마주하며 리에네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는 말을 했다.

16550942003719.jpg“알아들었으면 나가요. 나우크와 아르사크 가문에 마땅한 충성심이 남아 있다면 이 땅을 떠나라는 내 명령을 따라요. 그대는 더 이상 나의 연인이 아니고, 그러니 나는 그대의 주군일 뿐입니다.”

16550942003752.jpg“어떻게 그런…….”

라피트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금니를 무는 순간이었다.

16550942003713.jpg“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날아들었다.

16550942003713.jpg“큰일 났습니다! 그자가 오고 있습니다!”

16550942003719.jpg“뭐라고요?”

제 심장에서 덜컥,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 * * 리에네는 커다란 창문 밖으로 라피트를 나가게 했다. 창문 밖에는 간신히 서 있을 만한 난간이 있었다. 들키지 않게 거기서 몸을 숨기고 있어야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리에네는 다시 창문을 닫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라피트의 입을 막았다.

16550942003719.jpg“절대 소리를 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만일 들키기라도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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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컥! 창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플램바드 부인이 목소리를 높여 알렸다.

16550942003713.jpg“공주님! 로드 티와칸께서 오셨습니다.”

휙! 리에네가 다급히 창문 앞에서 돌아섰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리에네가 억지로 불안을 가라앉혔다.

16550942003719.jpg“안으로 들게 하세요.”

16550942003713.jpg“네,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떨리는 손으로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16550942003713.jpg“들어오시지요.”

아슬아슬한 시차를 두고 블랙이 들어섰다. 푸른 시선이 곧장 저를 향하는데, 자칫 혀를 깨물 뻔했다.

16550942089367.jpg“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저 푸른 눈은 이상하게도 뭐든 다 꿰뚫어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앞에서는 매번 필요 이상으로 긴장을 하게 되었다. ……침착해. 봤을 리 없어. 괜찮아. 여기 누가 숨어 있는 건 모를 거야.

16550942003719.jpg“아무 일도요. 왜 물으시는 겁니까?”

16550942089367.jpg“날 불렀다고 해서.”

16550942003719.jpg“네?”

리에네는 언뜻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눈을 깜박였다.

16550942089367.jpg“내가 필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 아니었습니까?”

16550942003719.jpg“아…….”

한시름을 덜었다. 용건이 전달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16550942003719.jpg“옷을 고치던 중에 치수를 미처 재지 못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시간이 되면 다시 뵐 수 있을까 했습니다.”

16550942089367.jpg“치수…… 그게 다였습니까?”

16550942003719.jpg“네.”

푸른 눈이 느리게 깜박거렸다. 리에네는 블랙이 미세하지만 미간을 찡그리는 것을 알아보았다. 짜증이 나는 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사람을 오가게 만들었다고. 그런 건가.

16550942089367.jpg“…….”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정확히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저에게 화를 내는 것 같진 않았다.

16550942089367.jpg“그럼 재십시오.”

성큼 리에네의 앞으로 다가온 블랙이 팔을 벌렸다.

16550942003719.jpg“아니, 이번에는…….”

이번에는 플램바드 부인이 잴 겁니다. 제가 아니라 부인의 앞으로 가주세요. 그렇게 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리에네는 바싹 다가선 블랙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땀 냄새. 가까이 다가서자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땀 냄새가 나고 있다는 걸. 이마 끝이 축축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땀을 흘려서일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16550942003719.jpg“설마…… 뛰어오셨나요?”

리에네가 작게 물었다.

16550942089367.jpg“네.”

16550942003719.jpg“왜…….”

16550942089367.jpg“말했듯이,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긴 줄 알았습니다.”

사르륵. 이건 블랙이 손을 들어 리에네의 머리칼을 한 줌 제 손가락 사이로 흘리는 소리였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사각 소리는 부드럽고 간질거렸다. 이러면…… 이상하잖아. 리에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면 내가 부른다는 말에 땀이 나도록 달려왔다는 말 같잖아. 이건 이상하잖아. 이건 마치 이 남자가 나를……. 그러니까 나를…….

16550942003719.jpg“로드 티와칸이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리에네는 제 뺨이 은은한 분홍빛으로 달궈지고 있다는 걸 몰랐다. 블랙을 부를 때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도 몰랐다.

16550942003719.jpg“치수를 재지 않으면 옷을 고칠 수가 없으니까요.”

16550942089367.jpg“그런 일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서두르지 말 걸 그랬습니다. 땀 냄새가 나는 인간으로 여길지도 모르는데.”

16550942003719.jpg“별로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땀 냄새라고는 하지만 체취가 진해진 느낌이었다. 날 것 같은 살 내음이 코끝에 감돌았는데, 역한 게 아니라 왠지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좀 멀어져야겠어. 이러다 부인에게 들킬 것 같아. 리에네가 블랙의 가슴에 살짝 손을 대어 미는 시늉을 했다. 물론 손끝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16550942003719.jpg“그럼 머리를 놓아주세요. 치수를 재겠습니다.”

16550942089367.jpg“조금만 더.”

그러나 블랙은 머리칼을 놓는 게 아니라 반대편 손으로 리에네의 손까지 쥐어 버렸다.

16550942003719.jpg“왜 이러시나요.”

리에네는 플램바드 부인을 의식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50942089367.jpg“나도 몰랐는데 놀랐던 모양입니다. 놀랐……. ……아니, 걱정을 한 건가. 하여간 썩 좋지는 않은 기분이라.”

16550942003719.jpg“걱정이요?”

리에네가 되묻자 블랙이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아프지는 않지만, 충분히 강렬하게.

16550942089367.jpg“클라인펠터 가의 사생아가 궁에 들어온 것 같다는 보고를 받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공주님이 나를 찾는다는 얘기가 함께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쿵! 심장이 덜컥, 저 혼자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알고 있었…….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났다. 블랙은 소리 없이 창백해지는 리네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제 손가락에 탐스러운 금갈색 머리카락을 감아올렸다. 이제 그 동작은 더 이상 부드럽고 간질대는 인사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단단한 결박이었다. 네 마음대로 내게서 멀어질 수 없다는.

16550942089367.jpg“날 부른 용건은 치수를 재는 일 하나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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