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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덫 (3) (19/145)

19. 덫 (3)2021.06.06.

아는 걸까. 다 알면서 일부러 묻는 걸까. 지금 이 남자가 하는 말은 내가 저 창문을 열기 전에 네 입으로 자백하라는 뜻일까. 리에네는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딛고 매달려 있을 창문 쪽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6550942207226.jpg“네…… 그렇습니다.”

16550942207231.jpg“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뭐든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남자는 그렇게만 말했다.

16550942207231.jpg“그럼 재십시오.”

16550942207226.jpg“…….”

그럴 수가 없었다. 블랙을 이 방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멀어지게 한 다음 라피트를 돌려보내야 했다. 당장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 저 밖에서 난간을 밟고 서 있는 라피트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에 하나 라피트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일이라도 생기면 뒤따를 일은 훨씬 더 끔찍할 것이다.

16550942207226.jpg“다른 곳에 가서 해요.”

리에네가 블랙에게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며 작게 말했다. 이런 짓을 해야 한다는 게 부끄럽고 난처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블랙을 내보낼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짐작이긴 하지만 블랙이 라피트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면, 치수를 다 쟀다고 선선히 떠나진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길지 남아서 지켜보려고 할 거야. 틀림없이. 리에네가 생각하는 블랙은 그랬다. 예리하고 감이 좋았으며 몸이든 머리든 빨랐다. 만일 그가 소문대로 전쟁과 살육밖에 모르는 야만인이었으면 이토록 위험하게,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16550942207231.jpg“왭니까?”

역시나 그는 이 방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리에네는 목소리를 더 낮춰야 했다. 덕분에 리에네의 음성은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누군가를 유혹할 때 그러듯이.

16550942207226.jpg“여기는 부인이 있으니까요.”

16550942207231.jpg“…….”

그 말에 블랙은 말없이 리에네를 훑었다. 너무 연하고 맑은 눈은 눈 코 입 사이에 숨은 아주 작은 표정까지 전부 들춰내는 듯했다. 그가 리에네를 흉내내듯 고개를 낮추고 속삭였다.

16550942207231.jpg“그럼 부인을 내보내요.”

16550942207226.jpg“그건 안 돼요.”

16550942207231.jpg“왜.”

16550942207226.jpg“바느질감이 여기 다 있어서요.”

16550942207231.jpg“…….”

16550942207226.jpg“그러니까…… 부인을 밖에서 오래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이 가득 붉어졌다.

16550942207231.jpg“이래서 내가 공주님 생각을 멈출 수 없나 봅니다.”

블랙이 쥐고 있던 머리칼을 끌어당겼다. 리에네는 저항 없이 이끌려갔다. 남들이 보기엔 벌써부터 너무 가까웠던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더 좁아졌다. 맞닿을 것처럼.

16550942207231.jpg“어떻게 나올지 통 짐작할 수가 없어서.”

16550942207226.jpg“그건 무슨 뜻으로…….”

16550942207231.jpg“어디로 가면 됩니까.”

블랙이 양손으로 리에네의 팔을 잡고 나직하게 물었다.

16550942207226.jpg“옆……방으로요.”

그는 그대로 리에네의 몸을 돌려세웠다. 쿵! 걸음은 빨랐고, 문이 열리는 속도도 빨랐다. 옆방은 생각보다 더 가까웠다. * * * 텅! 뭔가가 벽에 힘껏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제 몸은 아니었다. 아프지 않았으니까. 리에네는 제 등이 벽에 닿기 전, 블랙이 미리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았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입술이 맞붙었다. 고개를 숙여 몸을 낮춘 블랙이 제 몸을 뒤덮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갔다. 두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매달리는 리에네를, 블랙이 한 팔로 들어 올려 높이를 맞추었다. 키스는 뜨거웠고 제 몸은 장작 같았다. 한 번 불씨가 피워지자 전체가 다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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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42207226.jpg“아, 잠깐……,”

블랙의 입술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찰나에 리에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42207231.jpg“싫습니까?”

16550942207226.jpg“아니요. 그게 아니라…….”

16550942207231.jpg“그럼 가만히 있어요.”

팔을 얹은 어깨가 넓고 든든했다. 두 발이 허공에 들려 있었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이대로 더 닿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16550942207226.jpg“…….”

리에네가 작게 숨을 내뱉으며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몸을 들썩이자 블랙이 잠깐 입술을 멈췄다. 그렇다고 바로 멈춘 건 아니었다. 블랙은 방금 전까지 들러붙어 있던 살갗을 쓸어내리며 아주 천천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16550942207231.jpg“자세가 불편합니까?”

16550942207226.jpg“아니…… 아니요.”

16550942207231.jpg“그럼 무섭습니까?”

무서웠다. 이러다 어떻게 되어버릴까 봐. 자꾸만 제 몸이 제 몸 같지가 않아서.

16550942207226.jpg“조금…….”

16550942207231.jpg“…….”

……. 이번에는 블랙이 한숨을 흘려보냈다. 숨결이 닿은 목덜미가 이상한 열기를 품었다. 제 머릿속도 함께 뜨거워지는 그런 열기였다.

16550942207231.jpg“무서워하지 말아요.”

그 말과 함께 두 발이 사뿐히 바닥에 닿았다. 블랙이 저를 내려놓았다. 갑자기 두 발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오해했구나. 무섭다는 게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다시 저를 들어서 입을 맞춰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블랙이 제 연인이었어도 그런 말은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을 것이다.

16550942207231.jpg“내가 너무 빨랐던 모양입니다.”

빨랐나…… 사실 잘 모르겠어.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몸이 달아오르던 것만 기억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느리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이 남자 혼자서만 빨랐다는 소리가 아니잖아. 내가 더 빨랐을지도 모르는데.

16550942207226.jpg“괜찮습니다…….”

리에네가 모기보다 작은 소리로 시선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지금처럼 격렬하게 입술을 섞은 다음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무리였다.

16550942207231.jpg“괜찮은 게 맞습니까?”

아래를 향하는 시선 안에 불쑥 블랙이 파고들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제 가슴께에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리에네가 당황해 손을 블랙의 눈에 얹었다.

16550942207226.jpg“왜…… 그렇게 보세요.”

16550942207231.jpg“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괜찮다고 해서.”

16550942207226.jpg“아니, 정말 괜찮아요.”

16550942207231.jpg“그렇습니까?”

16550942207226.jpg“네.”

16550942207231.jpg“그런데 눈은 왜 가립니까.”

16550942207226.jpg“그야…….”

그러게. 왜지. 이상하게 지금은 너무 부끄러워. 입을 맞춘 게 처음도 아닌데. 그게 아니라 눈을 가릴 생각이 들 만큼 그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얘기였다. 그전까지는 난처하거나 당황스러우면 몸을 뒤로 물렸다. 지금은 그를 피하는 대신 제 손으로 덮었다. 리에네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변화였다.

16550942207226.jpg“놓아드릴 테니 아래서는 쳐다보지 마세요.”

16550942207231.jpg“……그게 문제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16550942207226.jpg“네, 그럼.”

리에네가 블랙을 덮었던 제 손을 조심스레 치웠다. 천천히 떨어지는 손이 얼굴을 쓸었다. 이 정도면 매만지는 것과 별반 차이도 없을 것이다. 리에네의 손이 완전히 떠나기 전, 블랙이 재빨리 손목을 붙들어 제 얼굴에 머물게 했다.

16550942207231.jpg“이것도 나쁘진 않군요.”

16550942207226.jpg“뭐가…… 말입니까?”

16550942207231.jpg“공주님이 나를 만지는 것.”

16550942207226.jpg“…….”

블랙은 리에네의 손목을 살짝 돌려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16550942207231.jpg“그래서 오늘은 참겠습니다.”

16550942207226.jpg“무엇을요?”

16550942207231.jpg“클라인펠터 가의 사생아를.”

16550942207226.jpg“……!”

리에네가 석상처럼 굳는 사이 블랙은 이번에는 손등에 입술을 댔다. 정중하게 키스를 하는 남자가 이렇게나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16550942207231.jpg“이제 나우크 성의 치안을 책임지는 건 티와칸입니다. 내 허락이 없이 입성하는 자가 선의를 지녔다고 간주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은…….”

초옥, 입술이 부드럽게 손등을 훑다 떨어졌다.

16550942207231.jpg“말했듯이, 참겠습니다. 공주님이 나를 만졌으니.”

16550942207226.jpg“…….”

리에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을 놓아준 블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16550942207231.jpg“치수는 어디를 재야 합니까?”

  블랙이 그렇게 물었을 때에야 리에네는 자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남은 치수를 마저 재는 것은 플램바드 부인이 되었다. * * *

16550942280033.jpg“말씀하신 대로 곱게 놔줬습니다.”

페르모스는 불만이 많았다. 그가 곱게 놔줬다고 하는 것은 라피트 클라인펠터였다. 누가 성으로 몰래 숨어드는데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오래된 성이니만큼 뒷구멍이 하도 많아 잠깐 놓치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보고를 받긴 했다. 클라인펠터 가에서 온 쥐 한 마리가 숨어들었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페르모스는 히죽 웃었다. 이걸로 클라인펠터 가를 더 쥐어짜 내자는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기세를 몰아 뿌리를 뽑아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쥐새끼가 가는 곳이 리에네의 침실이라는 얘기까지 더해지자 웃음이 멈췄다. 왜냐면 블랙이 웃지 않았으니까. 웃는 게 아니라 그 반대였다. 블랙은 표시가 날 정도로 확 굳었다. 전쟁의 신께 맹세코 페르모스는 블랙이 이렇게나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광경을 처음 목격했다. 클라인펠터의 쥐새끼는 죽지 않은 기사단장이라는 게 확실했고, 그가 리에네의 침실을 찾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연인들의 밀회에 가까울 듯싶었다. 리에네 공주는 연인을 잊지 못했다. 하긴, 벌써 마음을 완전히 고쳐먹었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었다. 둘은 제법 오래된 연인이었고, 쥐새끼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뛰는 꼴을 보면 리에네 공주를 쉽게 놔줄 마음이 없는 것도 확실했다. 무엇보다 아이의 친부이기도 했으니 공주로서도 잘라내듯이 마음 정리를 하진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블랙이 직접 듣고 봐야 한다는 점이었다. ……틀렸어, 틀렸어. 넘어가셨어. 저렇게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걸 봐서는 블랙의 마음은 이미 리에네 공주에게 기울었다. 하지만 그게 리에네 공주에게 헤어진 연인과 재주껏 밀회를 계속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줄 수는 없었다. 이제껏 제 여자라는 존재를 곁에 둬본 적이 없긴 했지만, 블랙이 그렇게 배알 없는 사내는 아닐 것이다. 배알이 없기는. 누구보다 가차 없는 분이. 지금껏 리에네 공주에게 베풀던 주군의 자비도 오늘로 끝이었다. 혼약을 맺은 상태에서 침실로 정부를 끌어들였다면 그건 마땅히 누군가의 목이 날아가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얄궂게도 그 순간 전언이 왔다. 리에네 공주가 주군이 와주시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블랙은 벌써 가버리고 없었다. 그것 참. 운이 좋은 건지, 영악한 건지. 적어도 리에네 공주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는 주군의 말은 옳았다. 그 선하고 무구해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진짜인지, 아니면 감탄할 정도로 정교한 가면인지 그도 아직 알 수가 없었다.

16550942280033.jpg“여전히 목이 붙은 채 제 구멍으로 잘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리에네 공주를 보고 온 블랙은 어쩐지 공주를 닮아 버렸다. 통 종잡을 수 없는 얼굴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는 뜻이었다.

16550942280033.jpg“정말로 덮어 두실 겁니까?”

페르모스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16550942207231.jpg“……이번은.”

블랙의 대답은 한참 뜸을 들인 후에나 들려왔다. 쉽게 내린 결론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16550942280033.jpg“이유가 뭔지 여쭤도 되겠…… 아니 아니, 꼭 여쭙고 싶습니다. 클라인펠터 가를 저렇게 방치해 두는 건 좋지 않습니다. 몇백의 사병 따위야 문제가 아닙니다만, 아시다시피 쥐새끼는 샤르카 왕국과 줄이 닿아 있지 않습니까.”

16550942207231.jpg“이번은 넘어가기로 했어.”

16550942280033.jpg“아니, 그러니까 왜냐는 말입니다. 이번은 대체 왜…….”

16550942207231.jpg“대가를 받았으니까.”

16550942280033.jpg“대가…… 대가요? 어떤 대가를요? 설마 클라인펠터 가에서요?”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건 그 집구석밖에 없었으니까.

16550942207231.jpg“아니.”

16550942280033.jpg“그럼요?”

16550942207231.jpg“공주가.”

이어지는 대꾸는 귀찮다는 기색이 묻어 나왔다. 페르모스는 본능적으로 질문을 줄여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대가가 뭔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물론 그 대가가 고작 먼저 얼굴을 만진 정도라는 걸 알면 차라리 그냥 궁금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더 나을 것이다.

16550942280033.jpg“네, 그럼 그러시다니……, 부디 그 대가가 오늘 날린 기회를 보상할 수 있는 것이길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주군께서 이렇게 무르게 구셨다간 같은 일이 또다시 있을 겁니다.”

페르모스가 주제넘을 각오를 하고 덧붙이는데, 의외로 단호한 답이 들려왔다.

16550942207231.jpg“……아니, 없을 거야.”

16550942280033.jpg“저런. 어째서 그렇습니까?”

16550942207231.jpg“공주가 부른 게 아니니까.”

16550942280033.jpg“음…… 어떻게 아셨습니까?”

16550942207231.jpg“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두 사람을 동시에 부르진 않았겠지.”

16550942280033.jpg“그야 뭐…… 그건 그렇습니다.”

페르모스도 그 점이 좀 헷갈리긴 했다. 그렇다면 리에네 공주는 겉으로 보이는 그대로 무구하단 소리일까. 그게 주군의 마음을 저렇게 내내 무른 푸딩처럼 만들고 있는 걸까.

16550942280033.jpg“그럼 주군께서는 리에네 공주를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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