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덫 (4)2021.06.09.
“아니.”
그 답은 또 너무 빠르게 들려와 페르모스는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마음을 끊어낸 건 아니야.”
블랙은 오늘 일을 그렇게 해석했다. 헤어진 연인이 일방적으로 찾아왔고, 리에네는 그를 숨겨 주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오늘을. 어울리지도 않게 유혹하는 흉내를 냈다. 그게 먹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잠깐 정신이 나갈 정도로 흥분했던 건 자신이었다. 리에네가 무섭다고 몸을 비트는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전까지는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이렇게 생긴 옷은 어떻게 벗겨야 하는지만 떠올리고 있었다. 열 때문도 아니고, 여자가 급해서도 아니었다. 자신은 리에네를 원했다. 원래 제 것이었기에 가지겠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그 여자가…….”
불쑥 입술이 열렸다. 페르모스는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나우크의 일부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우크를 가지려면 함께 가질 수밖에 없는 무엇이라고 여겼다. 오늘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나우크와 상관없이 리에네를 갖고 싶었다. 되찾고 싶었다. 애초에 빼앗긴 적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은 생각이 달라지셨다는 말씀이겠군요.”
잠깐 생각을 잇던 블랙이 곧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 달라지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되찾을 생각이다. 전부 다.”
되찾는다는 건 갖겠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였다. 그가 원래 가졌어야 했던 모습으로 되돌리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내 같은 건 끼어들 틈 없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도록.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가 가로채 간 리에네의 마음도 돌려받아야 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페르모스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니.
“주군이 진심이시라면 저 역시 진심이 되겠습니다.”
리에네가 내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블랙의 뜻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고른 사람을 두고 감히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공주님을 잘 지켜야겠군요. 다음은 없도록 말입니다.”
눈썹을 웅크려 주름을 만들고 있던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없어야 했다. 라피트 클라인펠터는 두 번 다시 리에네 공주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 * * 내내 잠을 설치던 리에네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 어제 일로 머리가 내내 복잡하더니, 결국은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 남자는 왜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까. 뭘 어쩔 생각으로. 나를 가지고 노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말 그대로 이번 한 번만 눈감겠다는 걸까. 내가 자기를 만져서. 그건 그 사람한테 내가 그만큼…… 어떤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일까. 어제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는 리에네도 알았다. 단순히 다른 남자가 침실에 몰래 들어온 것을 들키느냐 들키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라피트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고, 그의 정체를 자신이 내내 감추고 있었다는 것도 드러날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결과는 정혼자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걸 그렇게 쉽게 눈감아주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눈을 감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가 저에게 눈이 멀었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눈이 멀도록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이 세상에 그런 사내는 없어. 있다고 해도 그게 로드 티와칸은 아닐 거야. 그 남자가 청혼한 방식을 잊었어? 성은 포위됐고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어. 리에네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탁 내뱉었다.
“몰라. 그만 일어나야겠다.”
오늘은 장례식이었다. 장례식은 신전에서 맡아 하는 일이었지만 리에네도 참석은 해야 했다.
“일찍 일어난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니겠네.”
할 일이 있는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상복을 깨끗이 정돈하고 얼굴을 가릴 검은 천과 검은 장갑도 준비를 해두어야 했다. 너무 일찍 눈을 뜬 탓에 남들은 아직 잘 시간이었다. 세수할 물을 가져오는 건 직접 해야 될 듯싶었다.
“일단 장례식부터 치르고 나서…….”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면 이 미로 같은 상황도 조금은 정리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리에네가 속드레스 위에 상복을 입고 물병을 든 채 지하실로 향했다. * * * 우물이 있었지만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몇 년째 가뭄인 나우크는 한 방울의 물도 소중한 곳이었다. 성에서 쓰는 물은 하루에 한 번, 우물에서 길어와 지하실의 물동이에 채워 넣었다. 그 이상 물을 쓸 일이 있으면 리에네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리에네는 타당성을 따져야 했다. 끼이익. 새벽의 지하실은 고요했다. 따로 불을 켜진 않았지만 리에네는 익숙하게 물동이를 향해 걸었다. 제 손으로 물을 가져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공주님.”
“……!”
그러나 어둑한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너무 놀란 리에네는 하마터면 물병을 떨어트릴 뻔했다.
“앗! 아, 제가 잡았습니다!”
불안하게 출렁이던 물병을, 그 누군가가 재빨리 손바닥으로 받쳤다.
“누구…… 하이드?”
“네, 네. 접니다, 공주님. 놀라셨습니까?”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앗, 그게 말입니다…… 아, 이런. 들키지 말아야 하는데.”
하이드는 웨로즈가 예전에 종자로 삼은 이였다. 웨로즈가 아예 거처를 성 안으로 옮기게 되면서 제 집으로 돌아갔다고 예전에 얼핏 듣긴 했다. 웨로즈 말로는 애석하게도 기사가 될 만한 자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하이드는 뒤늦게 캄캄한 주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웨로즈 경께서 공주님께 전하라고 하셔서요.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꼭 공주님께 직접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물을 가지러 올 걸 어떻게 알고?”
“네? 아니, 그야 몰랐습니다. 공주님의 시녀가 오기라도 하면 부탁을 드릴 생각이었지요. 어차피 공주님 세숫물을 가지러 누구든 와야지 않습니까.”
그러자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겠지만, 어쨌거나 운이 좋았다.
“웨로즈 경은? 무사한 거야? 대체 어디 있는 건데?”
리에네가 묻자 하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젠 저도 모릅니다.”
“뭐? 너는 어디서 웨로즈 경을 봤는데?”
“웨로즈 경이 제가 일하는 방앗간으로 오셨어요. 저도 어찌나 놀랐던지…….”
웨로즈는 분명 클라인펠터 가에서 사라졌다. 거기서 무슨 해코지를 당했을 거라 짐작했는데,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웨로즈는 제 발로 움직이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하여간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이드는 또다시 주위를 살피며 리에네에게 손짓을 했다.
“귀 좀…….”
제대로 예의를 배운 자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리에네는 그 말을 들어주었다. 웨로즈가 신신당부를 한 얘기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야 했다. 귀가 바싹 다가서고 나자 하이드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자를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뭐?”
“그렇게 말하면 아실 거라고…… 그자의 목적은 복수라고 하셨습니다.”
“……!”
크게 벌어지는 리에네의 초록색 눈이 어둠 속에서 거의 잿빛으로 보였다. 리에네가 얼마나 놀랐는지 보지 못한 하이드가 뒷말을 이었다.
“항상 몸을 조심하시고 당신이 돌아오실 때까지 결혼식을 미루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그자의 비밀을 캐내서 들고 오시겠다고요.”
“그럼 웨로즈 경은…… 지금…….”
“네. 나우크를 떠나셨습니다.”
색이 바랜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그자의 부모가 나우크의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답니다.
-목적은 복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똑같은 얘기였다.
“대체 어떻게…….”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씹었다. 웨로즈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웨로즈가 갑자기 사라진 장소는 클라인펠터 저택이었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단서를 물었을 것이다. 복수라니. 처음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헤어진 연인이 악에 받쳐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헛소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려나.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었던 블랙의 행동을 복수라는 공식에 넣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남자의 복수는 그저 목을 치는 정도로는 해결이 안 되는 건가. 그보다 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끝을 보려는 건가. 단숨에 성벽을 부수고 내 목을 자르지 않은 건 나우크를 뿌리 끝부터 천천히 말려 죽이려는 거였나.
“뭐가 어떻다는 말씀입니까, 공주님?”
머리를 빗어서 장례식에 걸맞게 어두운 리본으로 묶어 주던 플램바드 부인이 혼잣말을 들었다.
“어머나, 세상에. 아니, 손톱을 뜯고 계셨습니까?”
뒤늦게 리에네의 손톱을 본 부인이 잔소리를 했다.
“아니, 말 못 하는 아이도 아니고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손톱 모양이 망가지지 않았습니까. 제 속이 다 상하네요. 좀 기다려 보세요.”
빗을 내려놓은 부인이 후다닥 함을 뒤져 손톱을 자르는 가위를 꺼내 들었다.
“아…….”
잘 씹혀서 끝이 나달대는 손톱을 보니 민망해졌다.
“손을 이리 주세요.”
“……죄송해요.”
리에네가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손톱 모양을 다듬으면서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거칩니다, 공주님.”
“아, 다듬지 못할 정도인가요? 대강만 해주세요. 제 손톱을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손톱도 손톱이지만 손 말입니다. 이게 어디…… 일국의 공주님 손이라 하겠습니까.”
“…….”
부인의 눈에는 곧 눈물이 글썽거릴 기세였다. 정말로 울겠다 싶던 리에네가 그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세 한탄을 하자면 끝이 없었고, 플램바드 부인은 아닌 척해도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나우크 같은 곳에서 고운 손으로 무얼 하겠어요. 그만두세요, 이제. 손톱은 제가 다듬을…… 아야.”
슷! 손을 가져오려던 게 그만 가윗날에 끄트머리를 긁게 되었다. 낡았지만 잘 갈아 놓은 가위가 사정없이 손톱 밑 여린 살을 갈라놓았다. 톡, 토독.
“세상에……! 공주님!”
리에네의 엄지손톱에서 피가 후드득 쏟아지는 것을 보고 플램바드 부인이 경악을 했다. 철컹! 가위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부인이 리에네의 손을 제 앞치마로 꼭 감싸쥐었다.
“이를 어쩌면 좋지요? 세상에나, 제가 이런 짓을…….”
“아니에요. 제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부인이 그러지 않았어요.”
“제가…… 맙소사. 피가 이렇게나 많이 나다니요. 많이도 다치셨습니다…….”
부인을 울리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어째 정말로 울리게 생겼다. 리에네는 아픈 표시도 내지 못하고 억지로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요. 그만 놔주세요.”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피가 아직 이렇게 흐르는데요.”
“곧 장례식이잖아요. 늦지 말아야죠.”
“그건 그런데…….”
부인은 차마 손을 놓지도 못하고 한참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래도 지혈제를 뿌려야 될 것 같습니다. 약을 가져오겠습니다. 공주님은 잠시만 상처를 쥐고 계세요.”
부인이 마지못해 손을 놓고 자리를 비웠다.
“아…… 많이 베였네.”
상처가 제법 컸다.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피를 보고 있자니 조금 섬뜩해졌다.
-복수할 겁니다. 나우크에.
도무지 떠나지 않는 생각이 붉은 피와 함께 현기증을 불러왔다.
“아파…….”
리에네가 손을 꼭 움켜쥐었다. 상처를 제 눈으로 보고 났더니 비로소 아파 왔다. 블랙이 제게 청혼한 진짜 이유를 직면하자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처럼.
“아파…… 정말로.”
부인이 없는 틈을 타 리에네가 눈물을 툭 떨구었다.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웨로즈가 전한 것은 말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려 봤지만 혼란은 손톱 아래 아픔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로 복수를 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럼 나는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절대로 마음을 늦춰서는 안 되었다. 그가 아무리 다정함을 꾸며내 제 눈을 멀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