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진혼가 (1)2021.06.13.
장례식에 참석할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블랙은 벌써 말을 대기시켜 놓았다.
“아…….”
그를 발견한 리에네가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장례식에 함께 동행할 생각인지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둘렀다. 뒤편에 서 있는 티와칸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갑옷에 검은 망토, 검은 깃발을 보면 저들을 왜 죽음의 신이 대지에 버린 사생아라 불렀는지 알 것도 같았다. 블랙과 눈이 마주친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눈매를 찌푸렸다. ……저 남자, 쓸데없이 검은색이 잘 어울려. 장례식에 가기 전에 하는 생각치곤 정말이지 쓸데없고 부적절했지만 그래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도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을 텐데 왜 그땐 몰라봤을까.
“왔습니까.”
리에네가 걸음을 멈춘 채 서 있자 블랙이 먼저 다가왔다. 그의 눈이 리에네의 목덜미와 어깨 언저리를 훑었다.
“옷이 달라졌습니다.”
“네. 플램바드 부인이 고쳐 줬어요.”
“……더 나은 건가.”
블랙이 잠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역시 저에게 검은색이 너무 잘 받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줄, 리에네는 까마득히 몰랐다. 그사이 용병 하나가 블랙의 말을 끌고 왔다. 덩치가 몹시 큰 흑마였다. 첫눈에도 블랙이 타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타세요.”
블랙이 리에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이 말을 타나요?”
“같이 탈 겁니다.”
리에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도…… 저도 말이 있습니다.”
같은 말을 타고 가자는 건 너무했다. 리에네는 그와 함께 말을 탄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경계를 높여야 하는 이 시점에서 비슷한 일이 또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을 자초하는 건 좋지 않았다.
“따로 타고 가겠습니다.”
“안 됩니다.”
대답은 단호했다.
“또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말을 나눠 타면 대응이 더 늦습니다.”
“…….”
화살을 쏜 범인은 공식적으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거기에 대고 사실 그 범인은 라피트였고, 그가 내게 화살을 날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리에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올려드리겠습니다.”
블랙은 손을 달라고 하는 대신 아예 리에네를 안아 말에 올렸다. 제 몸이 너무 가볍게 들려 어이가 없었다. 어깨를 다쳤잖아. 벌써 그 상처가 낫지는 않았을 텐데. 알면 알수록 모를 것 같은 남자였다.
“출발하겠습니다.”
리에네를 사뿐히 말 위에 내려놓은 그가 이어서 말에 올랐다. 그 동작 역시 너무 가벼워서 말에 오르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남자는 너무 이상해.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이 남자는, 무슨 짓을 해도 어리숙하게 보이는 일이 없을 거야. 뭐든 능숙하고 여유롭게 해치울 것만 같았다. 말에 태우는 것도, 말을 타는 것도, 그 외의 다른 것도.
“…….”
더 이상 생각했다간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제 입술을 탐했는지도 떠오를 것 같아 리에네가 억지로 생각을 막았다. 잊지 마. 경계를 늦추면 안 돼. 다각다각. 말이 속도를 높이자 발굽 소리도 한층 더 요란해졌다. 그 와중에 저를 감싸 말고삐를 쥔 남자의 팔은 든든하게만 느껴져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 * * 신전은 나우크 성을 가로질러 북쪽 필리온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 신전에는 벌써 장례식을 알리는 음울하고 구슬픈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기다려요.”
신전으로 향하는 계단 아래 말을 세운 블랙이 말했다. 왜 그러나 했더니, 그가 먼저 말에서 뛰어내려 리에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내려와도 됩니다.”
저를 향하는 커다란 손을 보자 마른침이 삼켜졌다.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걸까. 복수가 목적이라면 다정하지 않아도 되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왜 내게.
“…….”
리에네는 끝내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남자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손은 시작이었다. 리에네의 손을 끌어당긴 블랙은 몸이 기우는 사이 허리를 감아 들었다. 두 발이 사뿐히 땅에 닿았다. 이러다 혼자서 말을 타고 내리는 방법을 까먹을 것 같았다.
“계단을 전부 걸어 올라가야 합니까?”
“네. 신전이니까요.”
신을 향한 경배의 일환이었다. 나우크의 통치권자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다만 신전까지 가는 길이 험한 것은 사람들을 신전에서 계속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몸이 성치 않거나 곤한 이들은 저 까마득한 계단을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젊디젊은 리에네도 신전을 한 번 다녀오면 다리에 피곤이 쌓여 간혹 쥐가 나거나 했다.
“그럼 가지요.”
리에네가 앞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블랙이 말없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 시간은 잠깐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막 오르기 시작했을 때 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얀 그림자들이 생겨났다. 사제들이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흰옷을 고집하는 사제들은 지금 상복을 입은 리에네 일행과 선명한 대비를 드러냈다.
“사제들이 왜…….”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계단은 오르는 것만큼 내려가는 것도 일이라서 사제들은 어지간하면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사크의 딸에게 대사제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감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계단을 우르르 내려온 사제들이 리에네에게 소리쳤다.
“위대하신 나우크의 수호신과 대사제의 뜻으로, 이번 장례식의 참석을 금하는 바입니다!”
“……?”
처음에는 거리가 멀어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지금 뭐라고 했나요?”
“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과 함께하는 한, 아르사크의 딸은 신전에 걸음 할 수 없습니다. 대사제께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란 나의 정혼자를 두고 하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
이건 대사제의 전언이 아니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하는 말이었다. 그는 나우크에서 리에네를 고립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리에네가 단호히 말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길을 여세요.”
“저희는 대사제의 말씀을 따를 뿐입니다.”
“나는 나우크의 군주입니다.”
“사제들의 군주는 신 외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충격과 분노로 손끝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대사제가 제 주머니를 채워 주는 린든 클라인펠터의 편에 섰다고 해도, 나우크의 통치권자를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럼 대사제를 불러오세요. 내 앞에서 직접 말해보라고 하세요.”
“대사제께서는 장례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미루라고 해요.”
“그게…… 다만 방법이 있다 하셨습니다!”
리에네가 강경하게 나오자 잠시 머뭇대던 사제가 잽싸게 말을 바꿨다.
“신을 저버린 자들을 아르사크의 딸이 저버린다면, 모든 과오를 용서하고 다시 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인다 하셨습니다.”
이게 본론이었다. 티와칸과 파혼하고 얌전히 말을 들으라는 소리였다. 리에네의 양쪽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가 나서였다.
“파혼이 내 말 한마디로 되는 일이었던가요? 대사제는 진심으로 그렇게 여긴다고 하던가요?”
바보가 아니라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청혼 승낙을 받기 위해 보름 간 성을 포위했던 병력이 그새 한 줌이 될 일은 없었다. 그걸 린든 클라인펠터가 모를 리도 없었다. 그러니 이건 나우크의 모두를 리에네에게서 등 돌리게 만들기 위해 벌이는 짓이었다. 리에네가 끝내 신전에서 발을 돌리면 소문은 이렇게 날 터였다. 신이 선택지를 줬음에도 나우크의 공주는 저 야만의 맛에 홀려 함께 신을 저버렸다고. 그러니 더는 나우크를 다스리게 할 수 없다고. 통치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그게 신의 뜻이라고.
“그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직접 나와서 말하라고 하세요! 비겁하게 신전 안에 숨어서 이러지 말고!”
리에네가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이자 사제들이 눈을 부릅떴다.
“아르사크의 딸은 신 앞에서 경건해지십시오! 신께서는 이런 무례를 허락지 않으실 겁니다!”
“무례는 누가 먼저……!”
말문이 막혔다. 이런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리에네가 꽉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대신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뵙죠. 내 앞에서도 같은 얘기를 하는지 두고 보겠어요.”
“잠깐.”
그런데 블랙의 나직한 음성이 리에네를 말렸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왜죠?”
날카로워진 시선으로 블랙이 사제들 너머를 응시했다.
“저들이 바보는 아닐 테니까.”
“그게…….”
리에네가 잠시 입술을 물었다. 그 말이 맞았다. 대사제가 아무리 멍청해도 저렇게 나올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신전에는 티와칸의 병력에 맞설 무력이 없었다. 티와칸이 이 계단을 오르고자 한다면 저들로서는 막아낼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놓고 온갖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도발하려는 것 같습니다.”
“왜…….”
“우리가 올라오길 바라는지도.”
위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어요. 그건 또 그것대로 트집을 잡으려고 들 거예요.”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합시다. 저 위에 뭐가 있는지 확실히 모르는 상황에서는 올라가지 않는 게 낫습니다.”
“…….”
블랙이 옳았다. 그는 클라인펠터 가가 일으키는 정치적인 상황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무패의 용병단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전술적인 판단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로드 티와칸을 따르는 게 현명하겠죠. ……알겠습니다.”
리에네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리에네는 언덕 위를 다시 돌아보았다. 사제들이 당황해 저들끼리 쑥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가 옳았어. 함정을 파놓고 나를 도발한 거였어. 새삼 분노가 치솟았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이제 대놓고 리에네의 통치권을 무시할 작정인 듯했다. 이건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럼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티와칸이 성을 포위했을 때, 적은 명확했다. 티와칸이 나우크의 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에서는 대체 누가 자신의 진짜 적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발밑을 조심해요.”
복잡한 생각은 튀어나온 돌부리가 되었다. 리에네가 자칫 발을 헛디딜 뻔하자 블랙이 재빨리 리에네를 안아 들었다.
“아…… 부끄럽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눈을 팔다니.”
“내가 봤으니 됐습니다.”
“…….”
이 남자는 적일까, 아닐까. 리에네는 그걸 알고 싶었다.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매번 세심하게도 지켜보는 이 남자가 과연 저에게 무엇인지. 복수란 원래 이렇게 다정한 걸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이럴 수가……!”
신전 앞마당에서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린든 클라인펠터가 짜증스럽게 입술을 비틀었다.
“설마 냄새를 맡았단 말이냐. 뱀처럼 영악한 놈.”
그 옆에서 말을 받는 것은 라피트 클라인펠터였다.
“……차라리 다행입니다. 만일 리에네 공주가 죽었다면 나우크에서 쫓겨나는 건 클라인펠터가 됐을 겁니다.”
라피트, 아니 이제는 로페스 클라인펠터라 해야 하는 그가 굳은 눈짓으로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위태롭게 묶어 둔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신전 앞마당에 있기에는 퍽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저런 바위는 투석기에 묶여 있어야 했다.
“…….”
린든 클라인펠터가 어깨를 틀어 이런 말을 내뱉는 조카를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야만인들의 수장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쳤는데도?”
도발이 성공해 티와칸이 무력으로 계단을 올라오면 그때 바위를 아래로 굴릴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다들 바위 밑에 납작하게 깔려 죽거나, 아니면 까마득한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쳐서 터져 죽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사제나 리에네 공주가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린든 클라인펠터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인정하세요. 리에네 공주는 나우크에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함부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쯧…… 못난 놈 같으니.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게냐? 저런 음탕한 여자에게?”
“말조심하십시오, 숙부님.”
로페스라는 새 이름을 얻은 장자가 눈을 치켜떴다. 새파란 분노가 눈을 칼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누구도 내 앞에서 리에네 공주를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공주가 어떤 짓까지 했는지 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