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진혼가 (2)2021.06.16.
바람이 불어왔다. 창틀에 위태롭게 서 있던 그 순간은 바람조차 까마득한 위협이었다. 바람에 섞여 그보다 더 위태로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리에네가 말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주세요.
방 안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귀를 곤두세우고 리에네의 목소리를 들었다.
-옆방으로요.
그건 야만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저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목숨을 걸고 이자를 옆방으로 데려갈 테니 당신은 무사히 도망치라는. 그때 제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리에네는 무력에 굴복했을 뿐이었다. 고고한 아르사크의 딸은 그 고귀한 심성 덕에 정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그 정혼은 약탈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그러니 다시 빼앗아 와야 했다.
“눈이 멀었구나. 이전보다 더 심하게 말이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조카를 향해 말했다. 라피트는 숙부를 마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눈이 먼 게 아니라 이제 눈을 뜬 겁니다.”
그전까지는 몰랐다. 끝내 동침을 허락하지 않은 리에네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알았다. 다시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숙부님도 명심하십시오. 어떤 경우라도 리에네 공주에게 직접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뭐라고?”
“그런 자는 결코 나우크의 통치권을 얻지 못합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입술을 실룩였다.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그러다 공주가 정말로 야만인과 혼인식을 치르면? 우리 가문은 그럼 닭 쫓던 개 꼴이 나는 게 아니냐?”
“그럴 일은 제가 만들지 않을 겁니다.”
라피트가 굳은 각오를 드러냈다.
“그 전에 반드시 되찾아 오겠습니다.”
“…….”
린든 클라인펠터는 혀를 한 번 찰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피트에게는 상관없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리에네의 혼인이 열흘 남짓 남았다. 그 전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손은 왜 다친 겁니까?”
신전에서 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 비슷했다. 다만 리에네가 울적한 얼굴로 내내 기운이 없을 뿐이었다. 길에서 어쩌다 마주친 사람들은 왜 장례식이 열리는 이 시간에 리에네가 말을 타고 성으로 가는 중인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들에게 린든 클라인펠터의 수작질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 아, 별일 아닙니다. 가위를 들고 잠깐 한눈을 팔았어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리에네는 한 박자 늦게 대꾸를 했다. 블랙의 시선이 손톱 아래에 꽂혔다.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정작 다친 사실을 잊고 있었던 리에네는 왠지 민망해져서 손을 움츠렸다.
“이젠 괜찮습니다.”
지혈제를 뿌리고 난 뒤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던 상처를 알아채다니 어지간히도 눈썰미가 좋은 모양이었다.
“가위를 바꿔야겠군요.”
블랙의 말에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잠깐 웃었다. 손톱 가위 같은 걸 바꿀 여유가 있을 리가. 플램바드 부인더러 조금만 덜 날카롭게 날을 갈아오라고 말해 두는 게 훨씬 빨랐다.
“작은 실수였으니 괜히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조심하면 되는 것을요.”
리에네가 블랙에게 쥐인 손을 잡아 뺐다. 살갗이 닿은 채 경계심을 늦추지 않기란 몹시 어려웠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말을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에네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성 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블랙이 더 빨랐다. 저는 분명히 그를 등 뒤에 두고 걷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제 눈앞에 있었다.
“……?”
남자는 빨리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으면 누구보다 민첩해지는 모양이었다.
“하실 말이라도 있는지요.”
“네.”
“하세요.”
옅은 물색 눈동자가 말보다 앞서 밀려들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게 큰일입니까?”
“……어쩌면요.”
리에네는 자신이 내내 걱정에 내리눌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지만 블랙은 놓치지 않았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저도 어떤 결과가 있을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썩 좋지는 않을 겁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리에네가 잠시 머뭇거렸다. 외지인에게 나우크의 사람을 적으로 삼는 듯한 말을 해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가지지 못한 걸 그대로 잊어버리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그렇다면 장례식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
리에네의 초록 눈이 툭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어떻게? ……아니, 왜?
“둘 중에 하나를 바꾸면 될 겁니다. 날짜든, 장소든.”
“그건 그렇겠지만…… 아니, 하지만 티와칸이 나서게 되면…….”
무력행사를 의미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결코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블랙은 리에네의 걱정을 알아챘다.
“칼로 해결한다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해결해 놓겠습니다. 내일까지.”
“…….”
이 남자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대체 왜. 이 남자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했잖아. 다들 이 남자는 복수를 하려는 거라고 말하잖아. 왜 나를 걱정해서 뭐든 해주려는 것처럼 구는 건데. 왜.
“어째서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왜 로드 티와칸께서 장례식에 신경을 쓰시는지 물었습니다.”
“내가 신경 쓰면 안 될 일입니까?”
“이 장례식은…….”
당신 때문이잖아. 당신이 죽인 자들을 땅에 묻는 자리인데.
“지금 나는 공주님의 정혼자입니다.”
“로드 티와칸,”
“공주님의 일은 곧 내 일입니다. 공주님이 무사히 지내도록 하는 것도 내 일이고.”
“…….”
헷갈려. 정말로 모르겠어. 이 남자가 나를 가지고 뭘 하려는지.
“그게 다인가요?”
“내가 다른 이유로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까?”
남들은 그렇게 말을 하니까.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이 그저 정혼자의 의무로 이러시는 게 맞습니까?”
“왜 그런…….”
그 말에 잠깐 입속에서 혀를 굴린 블랙이 느리게 눈매를 찌푸렸다.
“공주님한테 나는 그 정도 거리에 있나 보군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웨로즈의 전언까지 듣고 나자 의혹은 매일 자라났다.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는 제 입으로 말하지 않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이유가 있다고 하면 더 받아들이기 편합니까?”
“로드 티와칸…….”
리에네의 말을 끊은 블랙이 찌푸린 눈매를 바로 했다.
“그럼 다른 속셈이 있다고 여기십시오. 나는 공주님께 장례식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를 받고 싶습니다.”
“어떤…… 대가를 원하십니까.”
“뭘 주실 겁니까.”
글쎄……. 리에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이 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 저에게는 마땅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대가를 드리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제가 로드 티와칸께 드릴 수 있는 건 그리 대단하지 못할 겁니다. 나우크의 사정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줄 수 있는 걸 받겠습니다. 방을 바꿔 주십시오.”
“방이라면…… 지금 쓰고 있는 침실 말인가요?”
“공주님의 옆방을 쓰겠습니다. 정혼자로서.”
“…….”
그 말에 리에네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지금 리에네가 쓰는 방은 대대로 나우크의 통치자가 잠을 자던 침실이었다. 방이 복도에 바로 닿아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침실을 거쳐서 들어오게끔 되어 있었다. 침실과 침실 사이에는 욕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사실상 두 방이 하나인 셈이었다. 지금은 비어 있는 그 방은 당연히도 통치자의 배우자가 쓰는 곳이었다.
“그건…….”
“곤란합니까?”
“…….”
당연한 말이었다. 그건 한방을 쓰는 것과 다름없어. 내가 뭘 하든, 누굴 만나든 이 남자가 전부 알게 될 거야.
“혼인을 하고 나면 당연히 쓰실 방입니다. 지금은…….”
“혼인식까지 기다리면 그건 대가가 아닙니다.”
“…….”
“허락하시겠습니까?”
리에네가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두 방이 하나인 것처럼 만들어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통치자의 배우자가 그 어떤 부정도 저지를 수 없게 하려는 목적으로 짜인 구조였다. 남자가 저를 볼 수 있으면, 저 또한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이 정말로 무얼 하려는 건지, 나도 봐주겠어.
“네.”
리에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말로 장례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요. 하지만 명심해 주세요. 살인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더 이상 나우크에서 그 어떤 피도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방을 옮기는 건 내일이 되겠군요.”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쥐었다. 그저 손등에 예의를 표시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입술이 다친 손가락 끝에 와 닿았다.
“내일 뵙겠습니다.”
상처에 무언가가 닿자 순간 짜릿함이 전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리는 리에네에게 블랙이 말했다.
“손을 아끼세요.”
“…….”
“그럼.”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한 블랙이 손을 놓아주고 돌아섰다. 뭘 어떻게 하려는 걸까……. 리에네는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블랙의 등을 지켜보았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저 남자에게 나우크의 일을 맡겨도 되는 걸까. 하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블랙이 뭔가를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 * *
“고, 공주님?”
왕실 집무실에는 마실로우가 있었다.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그가 리에네를 보고는 당황해 펜을 툭 떨어트렸다.
“어쩐 일이시죠, 경?”
“장례식에 참석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저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무실을 찾았다는 얘기였다. 리에네는 마실로우가 글자를 쓰고 있던 무언가에 시선을 던졌다.
“클라인펠터 가가 강짜를 부려서 쫓겨났어요. 신전에는 발도 들여 보지 못했고요. 그런데 지금 뭘 하고 계셨나요?”
“아, 그게…… 곧 필요할 것 같아서…… 기사 서임장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서임장이요?”
“그렇……습니다.”
말을 하면서 마실로우는 계속 눈을 피했다. 떳떳하지 못한 짓인 게 분명했다.
“제가 모르고 있는 서임식이라도 있나요?”
“그게…… 클라인펠터 경께서 부탁을…….”
“…….”
그럴 줄 알았다. 클라인펠터가 아니라면 이렇게 제멋대로 굴 인간도 없을 것이다.
“이리 주세요.”
리에네가 손을 내밀자 마실로우가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다 완성하면 보여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공주님께서 서명을 하셔야 하니…….”
“네, 지금 볼게요.”
“아니, 그게…… 꼭 그러실 필요가…….”
“설마 없겠어요?”
“…….”
“어차피 지금 펜을 놓쳐서 잉크가 번졌을 거잖아요. 버리는 게 됐을 테니 그냥 보여 주세요.”
입술을 꼭 깨물던 마실로우가 결국 작성 중이던 서임장을 얌전히 내밀었다.
“……하.”
서임장을 딱 두 줄 읽어 내려간 리에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로페스 클라인펠터라. 그게 그 사람의 새 이름인가요?”
“공주님!”
마실로우가 화들짝 놀라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아…….”
리에네는 설마 라피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티와칸이 모를 것 같냐는 질문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이건 안 된다고 하세요.”
“공주님.”
방금 전까진 당황하던 마실로우가 그 말에 정색을 했다.
“아니 될 말씀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말이 기사 서임장이지, 이건 사생아를 이제 와서 귀족으로 인정해 달라는 말이잖아요.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다죠? 클라인펠터 경은 왕실이 우스운가 보군요.”
우스운 정도가 아니라 없애야 할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다.
“……거절하면 좋지 않습니다, 공주님.”
마실로우가 재차 충고를 했다.
“장례식에도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클라인펠터 경이 마음을 먹으면 더한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리에네가 입매를 비틀었다.
“더한 짓이라면 어떤 짓을요?”
“공주님.”
“구체적으로 언급이라도 하던가요? 내가 사생아를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어떤 보복을 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