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진혼가 (3)2021.06.20.
물론 마실로우는 부정했다. 떠보듯이 은근슬쩍 충고를 하는 것과 대놓고 클라인펠터 가의 만행을 얘기하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마실로우가 그렇게까지 뻔뻔하고 무례한 인간은 아니었다.
“보복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당치 않다니요. 방금 그런 의도로 말하지 않았나요. 클라인펠터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다고요.”
“그렇게나 언짢아하시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언짢다고 왕실에 위해를 가하나요?”
“위해라니요. 저는 맹세코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참 쉽군요, 경. 말이라는 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니 안 했다고 하면 그만이고요.”
“……흐음, 큼.”
할 말이 없던지 마실로우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말은 흔적을 남기진 않을지언정 한 번 내뱉으면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
마실로우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리에네가 하는 말은 옳았지만 그렇다고 세상 일이 옳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우크의 일은 거진 클라인펠터 가의 입맛에 맞춰 돌아갔다. 누구보다 리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서임장은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그렇게 쉽게는 서명하지 않겠다고 해주세요.”
리에네가 피곤하지만 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클라인펠터 가와 타협하는 건 신물이 났지만 그만큼 익숙하기도 했다. 라피트의 신분을 린든 클라인펠터가 포기할 일은 없었다. 마실로우의 말대로 더 험악하게 굴기 전에 차라리 거래를 하는 게 나았다.
“왕실 빚을 얼마나 탕감해 줄 용의가 있는지 물어보세요. 장자의 신분에 얼마나 값을 매기는지 한 번 두고 보죠.”
“…….”
마실로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 보세요.”
“서임장은…….”
“값부터 정하고요.”
“알겠습니다.”
마실로우가 떠났다.
“후우…….”
리에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출 일이 또 하나 생겼네.”
느닷없이 나타난 클라인펠터 가의 사생아를 침실에 숨겨 주는 것도 모자라 정식 기사 작위까지 내리겠다고 하면 티와칸에서는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리에네가 옛 연인을 감싸고 도는 줄 알 것이다.
“기분이 안 좋아.”
이상하게도 그런 오해는 싫었다. 블랙이 저를 라피트와 한데 묶어서 본다고 생각하면 누명을 쓴 것처럼 몹시 억울할 것 같았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리에네가 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꼭 부정을 들킬까 염려하는 사람 같잖아.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차라리 그보다는 과연 블랙이 장례식을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보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부디 피를 보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날 밤 늦게였다. 피를 보진 않았지만 사고가 생기긴 했다.
* * *
“……네? 뭐라고요?”
리에네는 경비대가 가져온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달이 하얗다 못해 파래져 가는 늦은 밤이었다.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가 서서히 멎을 무렵이기도 했다. 자정이 지나면 무덤은 흙으로 봉인되고 신이 망자들의 혼을 거두어 가게 되어 있었다.
“그게…… 처음에는 종이 문제였습니다.”
종을 탑에 매달아 둔 사슬이 끊어졌다고 했다. 비록 낡긴 했지만 사제들이 매일 보살피는 사슬이 갑자기 녹슬 리도 없고, 하여간 그래서 잠깐 소란이 있었다고 했다. 여력이 되는 사람들이 다들 탑으로 몰려가 종을 다시 매단다고 한참 낑낑거렸다. 그래도 장례식은 이어졌다. 대사제는 무덤을 덮을 흙에 축성을 했다. 이제 관을 묘지로 옮겨 묻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게…….”
말을 하면서도 경비대의 부대장은 영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졌다고…….”
“네?”
“저도 도저히 믿지 못하겠지만 목격자들의 말은 그랬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굴러내려, 음, 신의 계단을 무너트렸다고요.”
“…….”
리에네도 마찬가지였다. 영문을 몰랐지만 블랙이 한 짓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피를 보진 않았지만 길을 망가트렸다. 신전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길은 신의 계단 하나밖에 없었다. 자연히 신전은 고립되었다. 관에 든 시신들을 묘지로 운반할 수도 없었다. 장례식은 연기였다. 계단을 재건할 때까지.
“그게…… 말이 되나요?”
그 바위는 사실 린든 클라인펠터가 미리 준비해 놓은 함정이었다. 리에네가 이 사실까지 알았다면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상태라도 갑자기 속이 시원해졌다.
“물론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공주님.”
부대장이 어색하게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래서 다들…… 대사제가 무슨 불경한 일을 저질러 신께서 노여워하신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공주님. 사제들이야 아니라고 펄쩍 뛰고는 있지만, 하필 장례식 날 계단이 무너져 내리는 건 너무도 신의 분노 같지 않습니까.”
리에네가 입을 가렸다. 웨로즈라면 그게 웃음을 참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테지만 부대장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음…… 공주님께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냐는 소문도 떠돌고 있습니다.”
“세상에.”
필사적으로 참던 웃음이 결국 더는 못 참고 새어 나갔다.
“고, 공주님……?”
부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는 리에네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세상에나. 그 남자, 뭐야.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마법사라도 고용한 건가. 리에네의 마음을 가장 무겁고도 아프게 했던 건 유족들을 위로해 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건 아마도 나우크의 사람들을 리에네에게서 등 돌리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계기가 됐을 것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군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그 군주가 외면하는 상황은 이제껏 없었다. ……그랬는데 그걸 대사제의 잘못으로 만들어 버렸네. 갑자기 저한테 유리한 소문이 돌 리 없었다. 이건 분명히 티와칸의 작품이었다.
“신이 분노하셨는데 공주님께서는 즈…… 즐거워 보이십니다…….”
부대장이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께서 저를 위해 화를 내신 거잖아요.”
“네?”
“저를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이가 대사제이니까요.”
“아, 그…… 그런 얘기도 있긴 했습니다만…… 그게 사실이었습니까?”
“네. 그러니 신이 노여워하실 만한 일이었다고 하세요. 내일 새벽 신의 광장에서 나우크 경비대의 이름으로 포고문을 읽도록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리에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너진 계단을 재건하는 데 돈이 필요하겠군요. 대사제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되네요.”
“네? 기대라 하셨습니까? 그게…… 아무래도 그만한 공사가 있으면 제법 큰 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부담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에요.”
과연 린든 클라인펠터가 그 돈을 다 내어줄지. 리에네가 알기론 아니었다. 대사제의 쌈짓돈과는 규모가 완전히 다른 돈이었다. 대사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왕실에 몸을 굽히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좋은 소식을 전해 준 것에 감사해요. 그만 나가 보세요.”
“예. 공주님. 부디 평온한 밤을.”
부대장이 한쪽 무릎을 굽혀 예의를 취한 다음 물러갔다. 혼자 남은 집무실이 자정만큼이나 고요해졌다. 시야에 파릇해진 달이 들어왔다.
“늦게까지 남아 있길 잘했네.”
그래서 이런 기분 좋은 소식도 전해 듣고. 혼잣말을 중얼대던 리에네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이 좋다고 생각한 게 대체 얼마 만이지. 아주 오래됐을 것이다. 티와칸이 성을 포위하기 훨씬 전부터 좋은 소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있기나 한지 까마득했다. ……이상해. 아주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가져다준 사람이 하필 블랙이라는 사실이 몹시 이상하게 여겨졌다. * * *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툭…… 툭. 조금 이상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나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잠깐 망설이다 이불을 걷어낸 리에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문을 향했다. 문에 귀를 대자 노크 소리가 다시 희미하게 들려왔다. 툭, 툭.
“…….”
숨을 죽인 것 같은 소리였다. 꼭 문을 열어 달라는 뜻으로 하는 노크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남자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을 땐 손이 벌써 빗장을 올리고 있었다.
“……아.”
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아주 뒤늦게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문이 열렸고, 저는 블랙을 마주 보는 중이었다.
“어떻게…… 이 시간에…….”
리에네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들어가도 됩니까?”
“그건 안…….”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발이 뒤로 움직였다. 마치 들어오라고 길을 열어 주는 것처럼.
“그럼.”
블랙이 리에네가 물러선 공간을 재빠르게 파고들어 왔다. 쿵. 블랙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왜……. ……이 시간에, 찾아왔는지요.”
말을 하는 중간에 침을 한 번 삼켜야 했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몰랐지만 블랙은 남의 침실을 방문할 만한 차림새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옷이 더러워져 있었다. 흙먼지인 듯싶었다. 아마도 그는 이제 막 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몰골인지 따로 살피지도 않고 곧장 이 방으로 온 모양이었다.
“일이 해결됐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
그건 나도 이미 들었는데.
“내일 대사제가 연락을 해 올 겁니다. 내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쪽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아요.”
“……네. 그러겠습니다.”
“부서진 데가 있어서 돈이 좀 들 겁니다. 그것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그리고…… 아예 그쪽과 얘기하는 건 내게 맡겼으면 합니다. 그편이 나을 겁니다.”
“그것도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그게 다군요.”
그답지 않게 싱거운 말을 한 블랙이 별안간 입매를 비틀었다.
“너무 짧은데.”
“뭐가…… 짧은가요?”
“이 시간.”
“……?”
“여기 오기 전까지 꽤 바빴습니다. 생각보다 절벽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도 했고.”
“절벽……이요?”
왠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신전 뒤편의 절벽을 말하는 거야. 계단을 이용하진 않았을 테니까.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기어올라 종을 망가트렸을 것이다. 그렇게 이목을 분산시킨 뒤 신의 계단을 부쉈다는 바위를 움직였을 것이다. 블랙이 흙투성이가 된 이유도 그래서 알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그랬던 게 여기 서서 이 얘기를 하려던 것이었는데…… 그런 것치곤 너무 짧아서.”
거의 혼잣말처럼 나지막한 속삭임을 중얼거린 블랙이 불쑥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옆방을 써도 됩니까?”
“그건…….”
너무 빨라. 저벅. 블랙이 대답보다 빠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만져도 됩니까?”
“어디를…….”
“어디든. 괜찮다고 하는 곳을.”
저벅. 침대 옆에 켜 놓은 작은 촛불이 다가오는 블랙을 차츰 더 선명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리에네는 제 뺨으로 다가오는 블랙의 손에도 흙이 묻어 있다는 걸 알았다.
“아, 잠깐…….”
리에네가 고개를 젖혀 블랙의 손을 피했다.
“……이런.”
블랙 또한 촛불이 닿는 곳에 와서야 제 손이 더럽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이렇게 더러운 손은 싫겠군요.”
“그게 아니라.”
리에네가 엉거주춤 멈춰 선 블랙의 손목을 잡아 손등이 잘 보이도록 밝은 곳으로 가져갔다.
“상처가 났습니다.”
“……?”
잠깐 놀라는 것으로 보아 제 손등에 길게 긁힌 상처가 생겼다는 걸 처음 알아챈 눈치였다.
“절벽에서 그러셨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
흙먼지와 뒤엉킨 핏자국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기분 좋았던 그 소식은, 이렇게 만들어졌네. 이 남자가 이렇게 다쳐 가면서. 더러워져 가면서.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 남자가, 여기에 복수를 하기 위해 왔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 상대가 나만 아니라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도 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우크의 공주가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저 뜬소문이길. 클라인펠터나 웨로즈 경이나 다들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길. 부디.
“이쪽으로 오세요. 일단 상처부터 좀 닦아야겠어요.”
리에네가 블랙의 손목을 잡은 채 침실 옆 욕실로 이끌었다.
“그 전에.”
블랙은 가만히 손을 붙들린 채 놔두었지만 선뜻 걸음마저 따르진 않았다. 대신 제자리에 서서 고집스럽게 같은 질문을 했다. 지금 꼭 대답을 들어야 하는 사람처럼. 그전까지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처럼.
“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떤 답을요.”
“나는 이제 옆방을 쓰게 되는 겁니까?”
그랬다. 그게 대가였으니까.
“네.”
“그리고 하나 더.”
리에네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져도 됩니까?”
“…….”
왜 계속 저러는 걸까.
“물론 손을 씻고 나서.”
“치료까지 다 하고 나서요.”
“좋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블랙은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