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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진혼가 (4) (24/145)

24. 진혼가 (4)2021.06.23.

욕실에 물이 남아 있던 게 다행이었다. 리에네는 수건을 물에 적셔 상처를 닦아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그새 눈이 어둠에 적응해 가까이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16550943511708.jpg“아팠겠네요.”

작다고는 할 수 없는 상처였다. 손이 커서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지만 같은 상처가 제 손등에 났다고 하면 느낌이 다를 터였다.

16550943511713.jpg“잘 몰랐습니다.”

16550943511708.jpg“어떻게 이런 상처를 모를 수 있죠?”

16550943511713.jpg“……마음이 급했을지도.”

이런 남자가 마음이 급했다는 얘기를 하니 낯설었다. 이 사람은 좀, 커다란 바위나 나무 같은 느낌인데.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은데. 이런 남자를 조급하게 만드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

16550943511708.jpg“자상약은 티와칸의 것을 바르는 게 낫겠습니다. 그쪽 약이 더 잘 듣는 것 같으니.”

상처에 묻은 흙먼지와 피딱지를 꼼꼼히 닦아낸 리에네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16550943511708.jpg“얼굴도 닦으시겠어요?”

손이 깨끗해지니 새삼 얼굴이 더 더러워 보였다.

16550943511713.jpg“……네.”

좀 전부터 블랙은 입을 열기 전에 잠깐씩 숨을 먼저 삼켰다.

16550943511708.jpg“그럼 조금만 더 가까이 오세요.”

손보다는 얼굴이 더 멀었다. 블랙이 성큼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16550943511708.jpg“이건 너무…….”

……가까운데. 리에네가 작게 중얼대자 블랙이 욕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16550943511713.jpg“이러면 됩니까?”

……여전히 가까웠다.

16550943511708.jpg“빨리 할게요.”

리에네는 때가 묻지 않는 깨끗한 부분을 골라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괜히 닦아 준다고 한 것 같아. 뒤로 조금 물러서라는 말을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촛불이 너무 환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 사람이…… 너무 잘 보여. 너무……. ……잘생겨 보여.

16550943511708.jpg“눈을 감아 주세요.”

자신이 그를 이렇게 자세히 보고 있듯이 그 역시 저를 보고 있을 것이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너무 연해서 얼음 조각 같은 눈이 이 거리에서 저를 지켜보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블랙은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는 것 같았다.

16550943511713.jpg“왭니까.”

16550943511708.jpg“너무…… 가까워서요.”

16550943511713.jpg“가깝지 않아도 보이는 건 똑같습니다.”

아냐, 절대 같지 않아. 이 거리에서는 아무것도 감춰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놀라움이나 찬탄이 전부 다 드러날 것이다.

16550943511708.jpg“그래도 감아 주세요.”

블랙이 느리게 중얼거렸다.

16550943511713.jpg“……싫은데.”

16550943511708.jpg“네?”

16550943511713.jpg“안 감을 겁니다.”

16550943511708.jpg“…….”

갑자기 무슨 고집이야. 눈에 물이 들어가도 난 몰라. 리에네가 보일 듯 말 듯 입술을 비죽대며 수건을 조금 거칠게 문질렀다. 투둑.

16550943511708.jpg“아……!”

그러다 제풀에 놀랐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졌던 이마 쪽 살갗이 쓸리며 갑자기 핏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16550943511708.jpg“여기도 다쳤잖아요!”

리에네가 놀라서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쪽에 진흙이라도 묻었나 싶었는데 찢어져 있었다. 손등보다 이쪽이 더 심했다.

16550943511708.jpg“이것도 모르고 있었나요?”

16550943511713.jpg“그건 알았습니다. 피가 멎어서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리에네가 수건으로 거칠게 문지르지 않았으면 새로 피가 흐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6550943511708.jpg“…….”

그러고 보니 내 잘못이네. 미안함으로 리에네의 손이 멎었다.

16550943511708.jpg“제가 괜한 짓을 했군요.”

16550943511713.jpg“그럴 리가.”

아래로 내려가는 리에네의 손을 블랙이 잡아 제 얼굴에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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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43511713.jpg“계속해요. 안 아프니까.”

……아프지 않을 리가.

16550943511708.jpg“이건 물로 씻어야 될 것 같아요. 손을 놔주세요.”

16550943511713.jpg“그래도 닦아 줄 겁니까?”

정말이지, 왜 이러는 거야. 물로 씻는 건 혼자 해도 되잖아. ……아, 손을 다쳤지. 저 손으로 물을 만지라고 하는 것도 못 할 짓 같았다. 리에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43511708.jpg“네. 손을 놓아주시면요.”

16550943511713.jpg“…….”

천천히 손이 자유로워졌다. 리에네는 수건을 내려놓은 뒤 블랙을 물그릇 받침대 앞으로 잡아끌었다.

16550943511708.jpg“눈을 감으셔야 해요.”

블랙은 순순히 물그릇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피가 난 부위에 물을 붓자 피가 번지는 게 보였다. 많이 다쳤잖아. 대체 왜 이런 상처를 그냥 내버려 둔 거야. 내게 올 시간에 치료부터 하지 않고서. 손길이 계속 조심스러워졌다. 찰방대는 물소리와 간간이 내뱉는 숨소리가 일렁이는 촛불에 기묘하게 섞여들어 갔다.

16550943511708.jpg“거의 다 된 것 같아요. 여기만 좀 더…….”

이마 안쪽은 불빛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환했으면 하고 바라던 그 순간, 거짓말처럼 촛불이 밝아졌다.

16550943511708.jpg“네, 됐어요. ……아,”

하지만 밝아지는 건 아주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갑자기 촛불은 훅 꺼지고, 심지가 다 탄 냄새가 코끝을 감돌다 사라졌다. 꺼지기 전 마지막 심지가 바짝 타오른 모양이었다.

16550943511708.jpg“불이 꺼졌네요.”

16550943511713.jpg“잘됐군요.”

어둠이 모든 것을 감싸 안은 공간은 기이하게 변했다. 소리를 감각으로 치환해 살갗을 간질였다. 고막을 부드럽게 울리는 블랙의 낮은 목소리는 발목을 적시는 물결 같았다.

16550943511708.jpg“뭐가…… 잘됐다는 건가요.”

16550943511713.jpg“다 씻은 다음 불이 꺼진 게.”

16550943511708.jpg“……?”

16550943511713.jpg“씻고 난 뒤 만져도 된다고 했으니까.”

16550943511708.jpg“그게……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묻고 싶어요.”

16550943511713.jpg“말하기엔 사소합니다.”

스륵. 블랙이 팔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살갗을 쓸었다. 손이 닿기도 전에 리에네는 숨을 들이쉬었다. 스륵. 이 정도 어둠이라면 앞을 한참 더듬어야 할 것 같은데 블랙은 단숨에 리에네의 허리를 감아 왔다. 그가 무릎으로 앉아 있는 터라 가슴께에 머리칼이 닿아 바스락거렸다. 양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하던 리에네는 블랙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에게 안겨 본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몇 배나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어두워서 그래. 어두운 데 있으면 사람은 조금씩 이상해지잖아.

16550943511708.jpg“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16550943511713.jpg“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지는데…….”

블랙이 리에네를 안은 채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16550943511713.jpg“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주님을 만지면 좋을 것 같다고.”

16550943511708.jpg“좀 이상한…… 이유 같은데요.”

16550943511713.jpg“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칠 때 그런 기분이 든 적은 처음이라.”

16550943511708.jpg“…….”

절벽 위에서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 아찔한 순간 블랙이 떠올렸다는 생각이 하필 자신이라는 게 낯설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런 이유라면 허락해 주고 싶었다.

16550943511708.jpg“위험했겠어요.”

어느샌가 제 손가락이 블랙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만지고 있었다.

16550943511713.jpg“……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16550943511708.jpg“그래도요.”

두 사람은 같은 자세로 잠시 어둠 속에 머물렀다. 리에네의 손가락이 블랙의 머리칼을 만지는 사르륵 소리가 아주 작게 어둠 속을 울릴 뿐이었다. 보기보다 부드럽네. 뒤늦게 자신이 블랙의 머리칼을 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리에네는 굳이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억셀 줄 알았는데. 이 남자는 보기와는 다른 구석이 참 많아. 오늘 일도 그랬다. 그가 이만한 위험을 감수하고 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다른 일들도 그럴까. 겪어 보면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들 이 남자의 목적은 복수라고 하지만, 사실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16550943511713.jpg“생각과는 다르군요.”

그때 블랙이 저와 아주 비슷한 말을 했다. 순간 손이 멈칫했다.

16550943511708.jpg“뭐가 다른가요?”

16550943511713.jpg“공주님이.”

16550943511708.jpg“어떻게요?”

16550943511713.jpg“만져도 되냐고 물으면 가만히 서서 참을 줄 알았습니다.”

16550943511708.jpg“그런데…….”

16550943511713.jpg“날 만져 줄 줄은 몰랐습니다.”

16550943511708.jpg“…….”

16550943511713.jpg“그게 나를 이렇게 기쁘게 할 줄도 몰랐고.”

그런 말로 리에네를 멈추게 만든 블랙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리에네와 마주 섰다.

16550943511713.jpg“다치길 잘했습니다.”

16550943511708.jpg“…….”

리에네는 그가 방금 전까지 머리를 어루만지던 제 손을 입가로 가져가 입술로 부드럽게 훑는 광경을 숨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 * * 예상대로였다. 대사제는 안색이 잿빛이 된 채 성으로 달려왔다. 신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계단이 망가졌기에 위에서 몸에 줄을 묶어 내려왔다고 했다. 듣기로는 오다가 몇 번 속을 게워냈다고 하더니 그 탓에 저렇게 죽을상인 모양이었다.

165509435977.jpg“그게 다 신께서 노하신 탓입니다!”

대사제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리에네는 가만히 눈썹을 웅크리며 화를 참았다. 신전은 그 어떤 곳보다 소문에 빠르고 민감한 곳이었다. 신전 계단이 무너진 게 신전에서 리에네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해 신이 노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대사제가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건 외려 그 소문을 의식해서 제 발을 저려하는 꼴이었다.

165509435977.jpg“티와칸 같은 불결하고 불경한 존재가 이 땅을 밟고 있으니 그러실 만도 하지요!”

접견실 상석에 앉은 리에네가 미간을 찡그리며 화를 참았다.

16550943511708.jpg“제가 듣기론 그 이유가 아니라던데요.”

165509435977.jpg“네? 아니, 공주님. 지금 신의 말씀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16550943511708.jpg“들은 바를 얘기하는 거예요. 신께서 노하신 건 제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요. 제 참석을 거부한 건 밀로드 예하시고요. 그렇다면 신의 진노는 대사제의 책임이 아닌가요?”

165509435977.jpg“감히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감히 누가 신께 그런 거짓을……!”

16550943511708.jpg“티와칸 때문에 화가 나셨다면 티와칸을 벌하셨을 테죠. 하지만 파괴된 건 신의 계단이잖아요. 그게 신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증거 아닌가요?”

165509435977.jpg“……!”

대사제가 할 말을 잃고 입을 쩍 벌렸다. 설마 리에네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야. 리에네가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은 대사제의 턱을 보며 생각했다. 티와칸을 물고 늘어지려면 증거라도 하나 챙겨 왔어야지. 블랙도 이럴 걸 예상해서 절벽을 기어오르는 위험을 감수했을 것이다. 새삼 그가 얼마나 대담하고 영리한지 느껴졌다.

165509435977.jpg“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사제가 잠시 후 힘겹게 부정의 말을 토했다.

165509435977.jpg“신께서 왜 당신의 선한 자식들에게 분노하신단 말입니까. 저 불결한 종자들을 놔두고요. 그렇지 않느냐?”

뒷말은 그를 모시고 온 사제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16550943617765.jpg“그렇습니다.”

사제들이 허둥지둥 대사제를 거들고 나섰다.

165509435977.jpg“터무니없는 소문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 신께서는 그런 경솔한 행동을 몹시 저어하십니다.”

16550943617765.jpg“맞습니다.”

리에네는 피곤하다는 듯 그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16550943511708.jpg“하아…….”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아침은 좀 피곤하긴 했다. 어젯밤 너무 늦게 잠이 든 탓이었다. 그 불 꺼진 욕실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 블랙은 몸을 일으키고 난 다음 또 한 번 리에네를 안았다. 한쪽이 앉아 있을 때와는 달리 몸이 완전히 파묻히는 것 같은 포옹이었다. 처음에는 숨이 막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나중에는 빈틈없이 꽉 안겨든 그 품이 꼭 저만을 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락하고 든든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둘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서로를 놓았다. 리에네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도 흘러간다는 사실에 놀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겨 있는 동작이 지루할 새가 없었다는 데 또 한 번 놀랐다. 대체 왜 그런 걸까. 그 남자와 함께 있으면 대부분 그래. 시간 가는 걸 모르겠어. 그런 사람은 처음이야…….

165509435977.jpg“……래서 신께선……, ……하시고 또……, ……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공주님? 공주님!”

리에네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저 혼자 열변을 토하던 대사제가 목소리를 꽥 높였다.

16550943511708.jpg“……말씀하세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리에네가 고개를 살짝 돌려 다시 대사제를 마주했다. 표정이 태연해 대사제가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었다.

16550943511708.jpg“그래서요? 원하시는 바를 말하세요.”

어차피 대사제는 계단을 고치는 비용을 신전에서 지불할 수 없다는 그런 말을 하려 했을 것이다.

165509435977.jpg“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제물을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티와칸의 불경함을 벌해야 할 것입니다.”

16550943511708.jpg“어떻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릴. 대체 누가 그럴 수 있는데. 신전이나 클라인펠터나 다들 뒤로 한발 물러서 있으면서 리에네에게만 이래라저래라하는 중이었다. 기가 찰 뿐이었다. 저들은 애초에 리에네의 사정은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껏 내내 그랬듯이 이 위태로운 왕국을 건사하는 건 리에네 혼자였다. 대사제가 리에네를 향해 당당히 헛소리를 내뱉었다.

165509435977.jpg“혼인을 미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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