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혼가 (5)2021.06.27.
“뭐라고요?”
혼인을 미루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는 건가?
“나우크의 신께서 저들의 죄를 모두 정화해 주실 때까지, 혼인은 안 됩니다. 만일 신의 뜻을 무시한다면 반드시 커다란 재앙이 뒤따를 겁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리에네가 주먹을 움켜쥐고 되물었다. 대사제가 힐끔대며 리에네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할 말은 했다.
“공주님. 신의 뜻이 강고함을 아셔야 합니다.”
“밀로드 예하야말로 지금 신의 이름을 빌려 왕실을 모독하고 있음을 아셔야지요.”
차분한 비아냥에 대사제가 콧김을 훅 내뿜었다.
“저는 신의 대리인이며 신의 말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아르사크의 딸이여.”
“신께서 대체 뭐라고 하셨는데요? 꿈에 나타나 내 혼인을 훼방 놓으라고 하시던가요?”
“허……! 어찌 이리도 신 앞에 불손하단 말입니까? 이제 보니 나우크의 시련은 아르사크의 딸을 벌하기 위해 신께서 내린 계시 같습니다!”
예전이라면 대사제가 감히 이런 막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궁지에 내몰려 악을 쓰는 기분이었다. 리에네는 어떻게든 티와칸과의 혼인을 막으려는 클라인펠터가 대사제를 몰아세웠음을 직감했다. 그러니 계단을 고치는 얘기가 아니라 혼인 날짜를 입에 올리고 있을 것이다.
“입을 조심하세요, 대사제. 이곳은 신전이 아니라 왕궁입니다.”
주먹을 움켜쥘지언정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던 리에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노기를 드러냈다.
“왕궁은 세속법으로 다스리는 곳입니다. 내게는 왕족을 모욕한 이들의 세 치 혀를 벌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그래도 신의 허락 없이 혼인을 하실 수는 없습…….”
대사제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늦었습니다.”
쿵! 접견실의 문이 큼직한 소리로 울었다. 블랙이 양손으로 문을 밀며 들어오는 중이었다.
* * *
“그그, 그그…….”
대사제의 안색이 샛노랗게 변했다.
“그그, 어, 어째서 접견실에 요, 용병이 제 마음대로…….”
그쯤에서 한숨이 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니 대사제가 용케 눈치도 안 본다 싶었다. 클라인펠터가 그의 등을 떠밀면서 용병 신분은 접견실에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헛소리를 해둔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로드 티와칸. 이리로.”
리에네는 친절히 대사제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는 대신 블랙을 제 옆자리로 불렀다. 이로써 그가 현재 왕실의 정혼자이며, 새로운 아르사크 수호기사단의 수장임을 공표한 셈이었다. 블랙은 리에네의 의도를 빠르게 알아챘다. 별다른 말 없이 그가 리에네가 앉은 상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무 말도 없으니 오히려 더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어디까지 했었죠? 아, 신께서 제 결혼을 훼방 놓으려 한다고 하셨죠. 그래서 대체 언제까지 미루라고 하시던가요?”
“그…….”
대사제가 기세 좋게 떠들던 입을 멈추고 눈알을 두르륵 굴렸다. 그는 리에네의 옆에 앉은 블랙을 곁눈질로도 한번 쳐다보지 못했다. ……효과가 좋네.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대사제가 쩔쩔매는 건 통쾌했지만 그 뻔한 태도 변화에 신물이 나기도 했다. 자신은 그렇게나 약하고 만만해 보인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공주님의 결혼 상대자를 신께서 허, 허락하실 때, 때까지…….”
“신께서 허락하시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죠?”
“그, 그야 대리자인 저를 통해 마, 말씀하실…….”
“결국 그 입이 문제라는 소리겠군.”
“으…… 헙?”
대사제가 헛숨을 삼켰다. 블랙이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들겨 소리를 내자 대사제가 엉겁결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얼음상이 되었다.
“선택지를 주겠다. 그 입을 내게 팔든가, 아니면 내가 열든가.”
“…….”
이해를 못 했는지, 아니면 명색이 대사제를 향해 보여야 할 예의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대사제는 턱이 굳은 듯했다.
“연다는 말이 너무 점잖은 모양이지. 그럼 다시 말하지. 그 입을 스스로 열든가, 아니면 내가 찢든가.”
“무, 무스…… 무슨 그런!”
마침내 대사제가 목소리를 냈다. 접견실이 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블랙이 툭, 다시 팔걸이를 두들겼다.
“조용히.”
“……?”
“무례하게 굴지 마라. 왕족 앞에서.”
“…….”
“고르기나 해. 여는 쪽인지, 찢기는 쪽인지.”
“…….”
정말로 턱이 굳은 건 아니었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뿐이었다. 나직하게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가 두려워서.
“고르지 않으면 내가 하겠다.”
툭. 숫자를 대신하듯 블랙이 팔걸이를 쳤다. 툭. 둘. 툭. 세 번째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대사제가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신의 대리인에게 이럴 수는……!”
그러나 그게 마지막 만용이었다. 툭, 하고 블랙의 손짓이 멎자 마치 신호처럼 접견실의 문이 쾅 닫혔다.
“으헛! 이럴 수가!”
대사제와 그 일행이 허겁지겁 등을 돌려 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닫힌 문이 도로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공주님! 어서 문을 여십시오!”
대사제가 매달릴 곳은 리에네뿐이었다. 야만인이라면 말이 안 통하겠지만 리에네는 그럴 수 없었다. 나우크의 통치자가 나우크의 신께서 제 입으로 만든 이를 경시할 수는 없었다.
“공주님!”
“열라고 하면 열겠습니다.”
블랙이 평소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느리게 말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태도였으나,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명확했다. 티와칸의 수장을 다룰 수 있는 건 리에네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대화가 한창이니 마무리를 지을 때까지 닫아 두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리에네도 그 사실을 알아챘다. 정확히 말하면 블랙이 그런 모습을 대사제에게 보여 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대사제는 티와칸이 있는 한 방금 전처럼 리에네에게 신을 운운하며 큰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아니,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이곳에서 무사히 나서려면 리에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티와칸의 수장은 리에네가 부탁하지 않는 한 결코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다시 대화를 나눠 보죠. 혼인식을 왜 늦춰야 한다고요?”
“…….”
대사제의 얼굴이 납처럼 굳었다. 불결한 존재를 신이 용납하지 않아 혼인을 미뤄야 한다는 말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 * * 대화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 대사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다 돌아갔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블랙은 통 크게도 신전의 계단을 고치는 비용을 전부 지불하기로 했다. 그것으로 대사제가 해야 하는 혼인 서약과 주례 모두 정해졌다. 중단되었던 장례식은 오늘 저녁 나우크 성의 예배당에서 마저 치르기로 했다. 관을 옮기는 일은 티와칸 용병들의 몫이 되었다. 이로써 대사제는 두 번 다시 티와칸을 신이 용납하지 않는 불결한 존재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불결한 존재는 관을 운반할 수 없었고, 그렇게 되면 시체들은 계단이 다 고쳐질 때까지 신전 안에서 썩어 가게 될 터였다. 리에네로서는 양보 하나 없이 원하는 것을 전부 얻어내는 협상이 처음이라 얼떨떨할 정도였다.
“이럴 줄 몰랐어요.”
대사제 일행이 도망치듯 떠난 뒤 접견실에는 리에네와 블랙 둘만이 남았다.
“대사제가 저렇게 겁을 잘 먹는 사람이었네요.”
리에네의 쓴웃음에는 그간 겪어야 했던 많은 일이 묻어나왔다.
“결과가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이걸 고작 마음에 든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더 엄청난 표현을 써야 될 것 같은데.
“그런데 너무 많은 돈을 쓰셨어요.”
리에네가 블랙을 보며 작게 덧붙였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그 돈을 전부 부담하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그러지 않았어도 대사제는 계속 혼인식을 미뤄야 한다고 우기진 않았을 거예요.”
“원하는 데 쓸 만큼은 가지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요.”
그렇게 가볍게 말하기엔 너무 큰 돈인데.
“내가 앞으로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면 무례가 됩니까?”
리에네가 잠깐 생각해 본 뒤 대답했다.
“……아뇨.”
나우크의 재정난은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너무 오래된 얘기였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부디 비가 좀 더 오기를 신께 빌며 하루하루를 버텨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는 그가 신기했다. 저러니까 착각할 것 같아.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든든한 지원군처럼 무슨 일이든 다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고. 그는 대체 이 혼인에서 무얼 얻으려고 이렇게 많은 손해를 감수하는 걸까.
“……그래도 된다면요.”
리에네는 속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웨로즈가 돌아오면 블랙이 숨긴 의도가 드러날 것이다. 그때까진. 조금쯤 이 든든한 기분을 간직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 길진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로드 티와칸. 장례식과 혼인식이 모두 원만히 해결된 건 로드 티와칸 덕분입니다.”
“…….”
리에네가 블랙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블랙은 인사를 받는 대신 입을 다물고 리에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신기해서.”
“뭐가 말인가요?”
“아니, 다시 말해야겠군요. 진심인지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내 인사가 부족했나.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겉치레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혼인 날짜 말입니다.”
“혼인 날짜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미루고 싶지 않은 게 공주님의 진심입니까?”
“그야 물론……. ……아,”
리에네는 한 박자 늦게 블랙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다. 어느샌가 저도 블랙과의 혼인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말을 하다 멈추고 입을 벌리는 리에네를 블랙이 샅샅이 훑었다. 꼭 리에네가 제 얼굴에 숨겨 놓은 거짓의 파편이라도 찾는 사람 같았다.
“물론?”
“물론…… 그렇다는 말이었습니다.”
“…….”
리에네의 대답에 블랙이 잠깐 멈칫하더니 입술을 옆으로 늘렸다. 아……. 이번에는 리에네가 멎을 차례였다. 저건…… 웃는 거지. 미세한 변화였지만 리에네에게는 너무 크게 다가왔다. 처음 봐. 저런 표정.
“돈이 아깝지 않군요.”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진 얼굴로 블랙이 말했다. 저 남자는 저런 말을 웃으면서 해. 그건 그가 그만큼 저와의 혼인에 기뻐한다는 소리 같아 리에네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착각할 것 같아.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 그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혼인은 이제 아흐레 앞으로 다가왔다. * * *
“이런 멍청한 작자를 봤나!”
쾅! 린든 클라인펠터가 분을 참지 못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잉크병이 흔들리며 울컥 잉크를 쏟았다. 더러워지는 탁자를 라피트가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게 다였다. 결국 린든 클라인펠터가 이를 갈며 넘어진 잉크병을 바로 세웠다.
“혼인을 미루게 하는 그 간단한 일도 해결을 못 해? 그런 주제에 대사제 자리를 꿰어 차고 있어?”
드륵! 린든 클라인펠터는 잉크로 젖어 든 탁자를 홱 밀치고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른 쓸 만한 작자를 찾아봐야지.”
대사제를 갈아치우겠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왔다. 제 생각에 빠져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라피트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뭐라고요, 숙부님?”
“그자로는 안 돼. 이미 넘어간 게야. 앞으로 무슨 일로도 써먹을 수 없을 게다.”
“대사제를 어떻게 대체한다는 말입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너는. 우리 가문에서 그 정도도 하지 못할 것 같으냐?”
나우크의 대사제는 종신직이었다. 하나가 죽어야 다음 대의 대사제가 선정되었다. 지금 린든 클라인펠터가 하는 말은 현 대사제를 죽이겠다는 의미였으며, 옛날 그 언젠가도 같은 일을 저지른 경험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