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의심2021.06.30.
라피트가 질린 얼굴로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런 곳이었습니까. 클라인펠터 가는.”
기가 차서 묻는 조카에게 린든 클라인펠터가 혀를 찼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장자인 네가 모른단 말이냐?”
“그런 짓까지 하지 않아도 이 조그만 땅에서 클라인펠터는 제일가는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런 짓까지 했으니 지금을 누리고 있는 게다. 그리고 제일가는 권력이라니?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나우크의 통치권이 엉뚱한 가문에 있는데!”
“그렇게나 통치권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그 통치권을 가진 리에네 공주가 어떤 수모를 겪고 있는지 알면서도?”
“그게 다 통치권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소리다. 그 어린 것은 제가 쥔 걸 다 쓰지도 못하고 있어.”
그렇게 만드는 게 클라인펠터 가였다. 대사제의 목까지 좌지우지하면서.
“대사제는 바꿔야 한다. 그리 알고 있거라.”
“…….”
라피트가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시려고요?”
“방법이 문제겠느냐.”
클라인펠터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대상이 대사제라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어서 후임을 찾아야겠군.”
아니, 그조차도 문제가 아니었다. 린든 클라인펠터에게는 그다음 대사제로 어떤 인물을 앉히느냐가 더 중요했다.
“말씀드리는데, 하지 마십시오. 대사제라니. 이 일이 탄로 나면 대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너는 그게 문제야.”
린든 클라인펠터가 조카를 노려보며 한숨을 씹어 내뱉었다.
“유약하고 무르지. 그러니 제 여자를 눈 뜨고도 빼앗긴 게다.”
그 말은 뾰족한 창처럼 아주 정확히 정곡을 찔렀다.
“숙부님!”
예상대로 라피트는 당장 자제력을 잃고 감정을 드러냈다.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리에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건 내가 압니다!”
제 목을 딸 기세인 조카가 린든에게는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여자 하나도 간수 못 하니 내가 이러는 게 아니냐. 대사제가 저쪽에 넘어갔으니 이제 혼인을 미룰 방법은 없다.”
“제가 만들 겁니다.”
“어떻게?”
“…….”
잠깐 생각이 멈춘 틈을 린든 클라인펠터가 뱀처럼 교활하게 파고들었다.
“대사제가 죽으면 다음 대사제가 선정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 물론 그사이 장례식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주례가 없으니 당연히 혼인도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러니 시간을 넉넉히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라피트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오늘이 좋겠구나. 마침 무덤가는 어두우니 말이다.”
어둠은 살인을 덮기 가장 좋은 장치였다.
“생각을 해 두어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니지. 어떻게 하면 가장 이득이 될지.”
“…….”
낮에 뜬 달처럼, 때 이른 시간에 음모가 피어올랐다. * * * 신전 계단이 무너진 여파가 제법 컸다. 그중에서 가장 망연자실한 이는 아마도 이틀에 한 번씩 신전에 올라 사제들이 먹는 물빵 한 덩어리를 얻어먹는 거지 노인일 것이다.
“…….”
거지 노인이 무너진 계단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땟물이 흐르는 지저분한 머리칼 너머 하나 남은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탁해 보였다. 팔은 두 개였지만 거지 노인은 손 하나를 온전히 쓰지 못했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쪼그라든 왼발은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짚을 때마다 흙바닥에 끌렸다. 저런 몸으로 그 높은 계단을 매번 오르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이, 거기! 위험하니까 비켜서!”
누가 노인에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한창 위에서 내려오는 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티와칸의 용병이었다. 흔치 않은 광경이라 제법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신전 앞은 텅 비어 있었다. 나우크의 사람들은 아직 티와칸을 두려워했다. 자칫 눈만 마주쳐도 목이 잘린다고 믿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거지 노인은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이상해진 것인지 길 한복판에 서서 내내 이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용병들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관이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방해가 되긴 했다.
“저자는…….”
거지 노인은 비키는 대신 용병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말을 건넸다. 가래가 쇳물처럼 끓는 칼칼한 음성은 누구도 알아듣기 힘들게 생겼다.
“뭐?”
노인이 오그라든 손을 힘겹게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끝에 걸리는 사람은 흑마를 타고 있는 블랙이었다.
“누구…….”
“음? 뭐라고?”
“누, 구…….”
안타깝게도 노인은 손발처럼 목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용병은 노인의 손끝과 블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티와칸의 용병들은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잔인한 학살자들이었지만 저들끼리는 견고한 규칙을 유지했다. 이유나 허락이 없는 한 무기를 들지 않은 자를 죽이는 일은 결코 없었다. 용병은 블랙을 몰라보는 노인이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답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눈이 성치 않은 모양이었다.
“티와칸의 수장이자 티와칸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들의 신이다.”
“…….”
“알았으면 비켜서. 방해가 된다.”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넋 나간 눈으로 블랙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이, 비키라니까.”
그 말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잿빛 수염으로 가려진 입술이 덜덜 떨리며 들리지 않을 소리를 만들었다. 돌아오는가. 나우크의 죄가. 그날 미처 다 흐르지 못했던 피가. 이제 와 마저 흐르려고 하는가……. 거지 노인이 나우크에 나타난 것은 21년 전의 일이었다. 아홉 개의 폭포가 말라붙고 극심한 가뭄의 전조가 시작된 것도 21년 전이었다. * * * 예배당으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상복을 입은 리에네는 가장 어둡게 핀 검은 장미를 머리에 꽂아 장식을 대신했다. 플램바드 부인은 그러니 머릿결이 더 고와 보인다는 생각을 했지만, 장례식이니만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성문이 활짝 열린 채였다. 신전에서 치렀어야 할 장례식 장소를 왕실 예배당으로 바꾼 것뿐이라 원래대로 참석을 원하는 이는 누구든 참석할 수 있어야 했다. 리에네는 꽤 많은 사람이 왕실 예배당으로 향하는 것을 알았다.
“이전 장례식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리에네가 작게 중얼대자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다들 궁금할 겝니다.”
“뭐가요? ……아.”
말을 하다 말고 리에네가 씁쓸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궁금하다는 말이겠구나. 사람들은 라피트 클라인펠터가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죽은 연인의 장례식에, 새 정혼자와 함께 참석할 리에네가 어떤지 보려 한다는 뜻이었다. 고약한 상황이네. 블랙과 티와칸을 향해 안 좋은 소리를 해댈지도 몰랐다. 클라인펠터 가에서 악담을 사주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나우크의 사람들이 리에네에게 애정을 보이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로드 티와칸에게 귀띔이라도 해야겠네요.”
“사람 입을 어찌 다 막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알려주면 좋을 겝니다. 화는 좀 덜 나겠지요.”
“……그럴까요.”
왠지 그 남자는 남이 욕 좀 했다고 화를 낼 것 같진 않은데. 그러고 보니 이제껏 블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를 생각하면 두려움은 늘 다른 감정과 함께 공존했다. ……희한한 사람. 싫지만 싫지 않았고, 무섭지 않지만 무서웠다.
“공주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한참 블랙을 떠올리고 있는데 플램바드 부인이 살짝 옷자락을 당기며 물었다.
“앞을 보셔야지요. 여기는 성 안처럼 길이 고르지 않습니다. 자칫 넘어지시겠습니다.”
“……아,”
리에네는 자신이 벌써 예배당 근처까지 왔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잠깐 생각을 했을 뿐이었는데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꼭 그가 시간을 빼앗아 간 것 같았다.
“그러게요. 정신 차려야겠…… 엇.”
툭! 아닌 게 아니라 때마침 발끝에 뭔가가 걸렸다. 하마터면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일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멈춘 리에네가 발끝을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닳아빠진 지팡이 끝이 일부러 그런 것처럼 길가에서 이쪽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
리에네가 시선을 움직여 지팡이를 이쪽으로 내밀고 있는 자를 찾았다. 신전 앞의 거지 노인이었다.
“부인. 잠시만요.”
리에네도 노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가끔 신전을 방문할 때 일부러 먹을 것을 챙겨 가서 손에 쥐여 주기도 했다. 삶이 딱할 뿐, 노인은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늘은 장례식에 가는 길이라 나눠 줄 게 없군요. 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
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리에네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곧 이 길로는 관이 옮겨질 거예요. 혹시 발에 채일 수도 있으니 지팡이를 잘 챙기도록 하세요.”
“……크의 딸. ……우크…… 죄인.”
“네?”
수염으로 뒤덮인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했나요?”
리에네가 노인을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가 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죄는…… 피로 이어지……, 과거…… 이제…… 아르사크의 딸…… 곧 피를 흘…… 것이다.”
“뭐……?”
리에네의 표정이 달라진다 싶었던지 플램바드 부인이 끼어들어 리에네의 팔을 붙들었다.
“공주님! 너무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어찌 믿으십니까.”
“잠깐만요. 내게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아요.”
그사이 오늘 성 안의 치안을 담당하는 티와칸의 용병들이 저 멀리서 득달같이 달려왔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두 명의 용병은 신속히 거지 노인을 잡아끌어 거리를 벌려 놓았다.
“네, 괜찮아요. 그런데 아직 얘기가 안 끝나서요. 좀 비켜 주시겠어요?”
“아, 그러셨습니까?”
용병들은 선뜻 몸을 비켰다. 그러나 눈은 매섭게 거지 노인에게 닿아 있었다. 자신들이 지키고 있으니 무슨 짓을 할 생각은 말라는 의도가 무섭게 드러났다. 리에네가 다시 노인을 마주해서 물었다.
“한 번 더 말해 주겠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노인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수.”
“……?”
리에네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흔드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야.”
소리를 향해 등을 돌렸더니 블랙이 서 있었다. 대체 언제 다가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공주님께서 이자와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블랙이 다가오자 용병들이 대답했다. 여유롭고 느슨한 자세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는데 희한하게도 블랙 앞에서는 칼로 자른 듯한 반듯함이 느껴졌다. 저들에게 블랙이 어떤 존재인지, 저들이 수장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
블랙의 눈이 거지 노인을 훑었다. 리에네는 노인의 하나 남은 눈이 블랙을 마주하는 순간 무섭도록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노인이 무어라 말을 했는지.
“그렇군요.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더 얘기를 나눠야 하는지 묻는 것이었다.
“아니요.”
리에네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혹시라도 손이 떨릴까 싶어 리에네는 그대로 블랙의 팔을 붙들었다.
“가엾게도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이 같아요. 계속 듣다간 장례식에 늦을 것 같으니 그냥 가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내게 할 얘기가 있다면 나중에 찾아오도록 하세요.”
마지막 말은 노인을 향한 것이었다. 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그저 눈꺼풀을 떨고만 있었다.
“그만 가도록 해요.”
“……원한다면.”
블랙이 제 팔을 붙든 리에네의 손등에 반대쪽 손을 올렸다. 그러자 몸이 반쯤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되었다. 블랙이 그 상태에서 천천히 발을 뗐다.
“괜찮습니까?”
“……네.”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지 않았다. 노인은, ……라고 했으니까. 리에네는 이를 꾹 물고 블랙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장례식이 무사히 끝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지시를 해두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다행이 아니었다. 노인은, ……라고 했다. -아르사크의 딸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중간중간 끊어지던 탁한 목소리가 지금은 소름이 끼칠 만큼 선명하게 이어져서 머릿속을 울렸다. -복수로 인해. 노인은 대체 누구일까. 그는 어떻게 블랙을 알고 있는 걸까. 그가 말하는 복수는, 블랙의 복수일까. 블랙이 복수하려는 상대는 결국 자신이라는 말일까.
“…….”
데엥, 뎅! 때마침 예배당의 종이 상념을 뒤흔들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