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자정의 살인2021.07.04.
데엥, 뎅! 장례의 시작을 알리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모두 멎었다. 그러나 정작 식은 시작할 기미도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식을 주도해야 할 대사제가 자취를 감추었다. 같이 온 사제들도 대사제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말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밀로드 예하를 본 사람은 누구죠?”
기다리다 못한 리에네가 나서서 신전에서 온 사제와 부제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당황한 얼굴로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래도 누구든 본 사람이 있을 거잖아요. 그대들은 예하를 언제 보았나요?”
“그게…….”
사제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참 쑥덕쑥덕하더니 대강의 사정을 전했다. 일단 대사제가 신전에서 나온 것은 확실했다. 줄에 매달려 파들파들 떨면서 내려오던 그 모습을 다들 보았다. 일단 사제들부터 내려온 다음에 관이 내려왔고, 여섯 구의 관이 수레에 실렸다. 말에 탄 대사제를 봤다는 사제도 있었고, 못 봤다는 사제도 있었다. 이런저런 말들을 종합해 보면, 대사제의 행방이 묘연해진 곳은 왕실 예배당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가장 가까운 데서 예하를 보필했던 사람은요?”
“으음, 그게…….”
여기서 답이 모호해졌다. 대사제의 시중을 드는 이들은 종제였다. 보통 종제는 어린 부제들 중에서 고르는데, 그때그때 번갈아 가며 시중을 들었다.
“하지만 오늘 신전에서 내려온 종제는 없었습니다.”
오늘은 종제가 동행하지 않았다. 사제들이 일곱이나 동행하니 굳이 종제까지는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다른 목격자가 있나 찾아야겠군요.”
수레로 관을 운반한 이들은 티와칸이었다. 제단 앞에 선 리에네가 몸을 돌려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블랙을 찾았다. 제단 뒤에는 여섯 구의 관이 놓여 있었고, 그 뒤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거나 했다. 블랙은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로드 티와칸.”
그 역시 문제가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사제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신전에서 동행했던 이들에게 얘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네.”
블랙은 순순히 답을 한 뒤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몸짓이었지만 페르모스는 기민하게 신호를 감지하고 다가왔다.
“네, 주군.”
“대사제가 없어졌다는데 아는 바가 있나?”
“네? 대사제가요?”
페르모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어쩌다 그런 일이…… 지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사고가 있었다면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주군.”
페르모스가 후다닥 예배당을 벗어났다. 이쯤 되자 장례식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작은 웅성거림이 번져 왔다.
“누가…… 일부러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리에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사고가 있으면 의도가 있다는 말은 그렇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불만을 가진 자가 있으니.”
“아…… 하긴.”
리에네가 힐긋, 좌석 제일 뒤편에 앉은 클라인펠터 가의 인물들을 쳐다보았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보였다. 라피트는 제 얼굴을 알아볼 사람들을 의식한 탓인지 오지 않았다. 의도한 사고가 맞다면 린든 클라인펠터가 범인일 것이다. 하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오늘은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장례식이었다. 저들로서도 장자의 장례식을 미루는 건 원치 않는 척해야 했다.
“그래도 이유를 모르겠군요. 왕실 예배당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달리 마땅한 장소가 없는데요.”
“그렇다면 장소가 아니라 다른 데 불만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다른 데?”
“이를테면 사람이라거나.”
“…….”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순간이었다. 대사제가…… 티와칸의 돈을 받고 혼인식 날짜를 미루지 않기로 한 일로 화가 난 건가? 그래서 이렇게 분풀이를 한다고? ……아냐, 고작 분풀이만 할 인간이 아니야. 분명히 더 심한 일을 생각했을……. 텅! 생각은 예배당 문이 다급히 열리는 바람에 끊겼다.
“주군! 대사제를 찾은 것 같습니다!”
페르모스였다. 그가 용병들과 함께 예배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네? 어디서요?”
문제는 찾았다는 말이 무색하게 대사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모두의 시선이 페르모스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페르모스가 가리키는 것은 여섯 구의 관 중 하나였다. * * * 그으으응……. 관 뚜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격자를 찾으러 나갔던 페르모스는 그게 아닌 다른 정보를 알아 왔다. 관 하나가 유독 무거워진 것 같았다는 발언이었다.
“시체를 숨기는 덴 관만 한 게 없지요.”
페르모스가 조금씩 열리는 관 뚜껑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하나 사라졌고, 관 하나가 무거워졌으니 자연히 답은 사람이 관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응…… 텅! 마침내 관 뚜껑이 완전히 열렸다.
“아……!”
리에네가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관 속에는 시체가 두 구 들어 있었다. 억지로 욱여넣은 게 분명해 보이는 위쪽의 시체는 대사제가 맞았다.
“역시.”
페르모스가 외알 안경을 만지작대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감춰 놨으니 사고는 아니겠고…… 누가 일부러 죽였군요.”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리에네가 고개를 홱 돌려 린든 클라인펠터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당황한 듯 몸을 주춤 내밀고 대사제의 시체를 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헷갈렸다. 범인이 아닌 건가. 저자가 맞을 텐데. 왜 저렇게 놀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자긴 조금도 몰랐다는 것처럼.
“관이 하나 더 필요하겠군요.”
페르모스의 말에 사제들이 비로소 죽음을 실감하고 망연한 얼굴들을 했다. 무릎으로 주저앉아 기도문을 외우는 이도 있었다.
“그럼 오늘 장례식은 누가 주도합니까? 이럴 경우 대비가 되어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은 사제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게…… 아직 아무것도…….”
“장례식을 미뤄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 아무래도…… 대사제의 자리가 비어 있다면…….”
“저런. 설마 했는데요. 다음 대사제 후보는 정해져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부터 해야 합니까?”
“…….”
일곱 명의 사제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대사제 후보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보를 정하는 건 귀족 원로회였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안이 급하니 한시라도 빨리 원로회를 소집해 대사제 후보를 정해야겠습니다, 공주님.”
“…….”
리에네가 작게 이를 갈았다. 뻔뻔하긴.
“물론입니다, 클라인펠터 경.”
“조만간 회의를 마치고 새로운 대사제를 선봬드리지요.”
다음 대사제는 기필코 내 뜻을 따를 인간으로 보내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가자.”
린든 클라인펠터가 무리를 이끌고 예배당을 나섰다. 명색이 가문의 장자가 묻혀야 할 장례식인데 그는 신경 쓰는 표시조차 내지 않았다.
“이런 걸로 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잡아 왔다. 블랙이었다.
“……네?”
리에네가 턱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맑아 거울 같은 푸른 눈동자가 저를 비추었다.
“이제 나우크의 치안을 담당하는 건 납니다. 범인을 찾으면 될 일입니다.”
“아…….”
리에네가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블랙의 말이 맞았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가 이제껏 어떤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대의회를 견제할 세력이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아르사크 가문은 새 수호기사단을 맞이했고, 이제 나우크의 치안은 그들의 몫이 되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 대사제를 살해한 죄는 그 어떤 힘을 동원해서도 무마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충수였던 거로군요.”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증거만 잘 찾는다면.”
린든 클라인펠터에게 살인죄를 물을 근거가 필요했다. * * * 시신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장례식은 미루되 시신은 땅에 묻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섯 구의 시신이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갔다. 대사제의 시신은 관이 마련되지 않은 관계로 홀로 예배당에 남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이었던 장례식은 그래서 더 서글픈 기분이었다. 리에네는 흐느껴 우는 유족들을 새벽까지 위로한 뒤 금화를 한 닢씩 들려 보냈다.
“공주님이 가난한 이유가 있었군요.”
페르모스가 뺨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달빛이 자욱하게 깔린 길은 고요했다. 말들도 무덤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지 투레질 한 번 없이 묵묵히 걸었다. 블랙은 일부러 리에네와 거리를 넉넉히 둔 채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오늘 묻은 시체들이 제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그도 알았다. 새삼 후회한다거나 살인에 넌더리를 내는 게 아니었다. 리에네가 그렇게 여길까 봐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지도자의 덕목이긴 합니다만 본인 사정도 좀 신경 써야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상복조차 없어서 고쳐 입었다면서요.”
잠깐 침묵하던 블랙이 제 입술 선을 비틀었다.
“그런 사람이니 청혼을 받아들였겠지.”
“뭐,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만…….”
페르모스가 다시 뺨을 긁었다. 리에네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수록 괜히 마음이 번잡해졌다. 차라리 더 일찍 청혼을 하시지. 리에네 공주에게 공식적인 연인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랬더라도 잡음이야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사람이 죽어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페르모스는 티와칸이 손댄 곳치고 시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게 보기 드문 기적이라고 여기는 편이었지만, 유족 앞에서 고개를 숙인 리에네 공주를 보니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대사제를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그렇게까지 멍청한 작자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페르모스가 화제를 돌렸다. 사실 이쪽이 더 중요한 얘기였다. 클라인펠터는 블랙이 리에네 공주와 혼인하는 그 날까지 내내 걸림돌이 될 예정이었다. 무력을 쓰면 간단할 일을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하려니 꽤나 번거로웠다. 그렇다고 그냥 하던 대로 대충 목이나 베고 말자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블랙이 무얼 원하는지 어렴풋이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티와칸의 수장이 돌려받겠다고 한 것은 단순히 나우크의 땅이나 리에네 공주만이 아닌, 그가 잃었던 과거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피를 보는 일은 없어야 했다. 힘으로 갖는 것은 빼앗는 것이지 돌려받는 게 아니었다.
“설마하니 증거를 그렇게 완벽히 감췄다고 자신했을까요? 증거야 어떻게든 찾으면 되는 것을.”
“그게 의문이긴 해. 관에서 시체가 굴러 나왔을 땐 그자도 놀라는 눈치였다. 연극이 아니었어.”
“아…… 그럼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을까요? 아니면 뭐, 자객을 고용했더니 실수를 했다든지…….”
“뭔가 어긋났던 거겠지.”
“그럼 거기서부터 파고들면 되겠군요. 어디서 실수를 했는지 알면 증거도 나올 겁니다.”
“그래.”
평소처럼 짧게 말을 끊던 블랙이 잠시 뒤 한마디 덧붙였다.
“놓치지 마라.”
“네. 음…… 네?”
말을 마친 블랙이 먼저 앞서갔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에 남겨졌던 페르모스가 혼자 혀를 끌끌 찼다.
“어지간히도 신경이 쓰이시나 본데.”
리에네 쪽으로 다가간 블랙은 완전히 옆에 서는 대신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속도를 맞췄다. 블랙의 그런 모습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던 페르모스가 이제는 포기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주군이 저렇게 되실 줄 누가 알았을까…….”
하여간 놀라운 일이었다. * * * 퍽!
“정신이 나간 게냐!”
클라인펠터 가에는 작은 폭풍이 몰아쳤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눈에 보이는 전부를 쑥대밭으로 만들 것처럼 날뛰었다. 그가 집어던진 편지함에 이마를 얻어맞은 누군가가 소리 없이 피를 흘렸다.
“대체 왜 일을 그따위로 처리해! 시체를 관에 넣으면 어쩌자는 게야! 누가 죽였다는 걸 모르게 처리했어야지!”
누군가는 클라인펠터 가의 사주로 대사제를 죽인 자였다. 그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광경은 린든 클라인펠터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이 멍청한 놈! 들키려고 작정이라도 한 게 아니면 왜 그런 짓을 해!”
퍽, 퍽! 린든 클라인펠터가 사정없이 발길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