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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종제 클리마 (1) (28/145)

28. 종제 클리마 (1)2021.07.07.

16550944355026.jpg“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구둣발 아래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춘기 무렵부터, 죽었어야 할 목숨을 클라인펠터 가에 의탁하면서부터 그는 린든 클라인펠터가 시키는 온갖 더러운 일을 맡아 처리했다. 전 대사제도 그가 죽였다. 다들 전 대사제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목이 부러져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이번에도 그런 식의 깔끔한 사고를 원했다.

16550944355026.jpg“……시간이 없었습니다. 너무 촉박한 데다 보는 눈들도 많아서…….”

발목까지 감기는 긴 로브를 입은 그가 눈을 내리깐 채 나직이 말을 했다.

16550944355026.jpg“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게냐!”

퍽!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매질이었다. 클라인펠터 가의 심부름꾼은 앓는 소리 한 번 없이 린든 클라인펠터의 분풀이를 견뎠다. 닥치는 대로 심부름꾼을 치고 밟아댄 린든 클라인펠터가 멈춰 서서 씩씩 가빠진 숨을 골랐다.

16550944355026.jpg“증거는 남기지 않았겠지?”

16550944355026.jpg“그렇습니다.”

16550944355026.jpg“들키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절대 내가 시켜서 한 짓이라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단 말이다.”

16550944355026.jpg“알겠습니다.”

16550944355026.jpg“절대 만만히 볼 놈들이 아니야. 절대…….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그게 자신과 클라인펠터 가의 끝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16550944355026.jpg“그럼 나는 네놈을 버릴 것이다.”

16550944355026.jpg“……네.”

심부름꾼이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그 모습에 조금은 걱정을 덜었다. 기이할 정도로 충직한 심부름꾼은 입이 무거웠다. 설령 최악의 상황이 되어 심부름꾼의 정체가 드러난다 한들, 그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16550944355026.jpg“나가.”

심부름꾼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이마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피를 그가 제 손바닥으로 받아냈다. 피를 닦는 게 아니라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염려하는 듯했다. 그는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레 로브에 매달린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렸다. 발소리를 죽여 린든 클라인펠터의 방을 나선 그는 하인들이 다니는 구석진 통로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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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켜지지 않은 어둑한 계단을 꼬불꼬불 내려가 지하로 들어선 그는 본관을 벗어나 그 뒤편의 자그마한 별채로 향했다. 별채가 보이자 그가 발을 멈췄다. 그리고 인근의 나무 뒤로 모습을 감췄다. 눈만 간신히 내민 그가 쳐다보는 쪽은 별채의 한 창문이었다. 색유리를 붙여 놓은 창문 안에서 흐릿한 그림자처럼 누군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마르고, 슬픔에 지쳐 보이는 여인이 대야를 들고 일어서는 중이었다.

16550944355026.jpg“…….”

여인을 지켜보는 심부름꾼의 눈도 어둑한 슬픔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여인은 그가 클라인펠터 가의 심부름꾼으로 온갖 더러운 짓을 해야 하는 이유였다. 잠시 후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모르게 클라인펠터 가를 빠져나와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신전이었고, 그의 이름은 종제 클리마였다. * * *

16550944383158.jpg“…….”

아무리 피곤해도 몸은 습관을 이겨내지 못했다. 리에네는 창문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이른 아침 해에 눈꺼풀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16550944383158.jpg“벌써 아침이네.”

피곤한 몸은 선뜻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에네가 눈을 뜬 채 숫자를 셌다.

16550944383158.jpg“하나…… 둘…… 셋.”

그러고 나서야 간신히 이불을 걷을 용기가 났다.

16550944383158.jpg“어제보다 더 추워졌어.”

맨발로 침대를 내려서자 살갗이 짜릿한 한기가 느껴졌다. 리에네는 서둘러 슬리퍼를 신고 잠옷 위에 숄을 둘렀다. 겨울은 싫었다. 추우면 괜히 삶이 더 버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 것도 아니었는데 온도가 조금 내려갔다고 벌써부터 이불 속이 그리워졌다.

16550944383158.jpg“서둘러야지.”

이럴수록 몸을 더 바지런하게 움직여야 했다. 까딱하면 게으름에 지기 쉬운 계절이었다. 어서 씻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으로 리에네는 다시 숄을 벗었다. 얇은 잠옷 차림이 된 리에네가 후다닥 욕실로 들어섰다.

16550944383158.jpg“……엇.”

그리고 욕실 문을 열자마자 몸이 굳었다. 욕실에는 벌써 사람이 있었다. 저처럼 얇은 속바지 한 장만 걸친 채, 씻을 생각이었는지 그 바지조차 허리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던 블랙이었다.

16550944383158.jpg“왜…… 여기…….”

너무 당황해서 리에네는 문을 닫고 나가야 한다는 걸 잊었다. 블랙이 왜 제 욕실에서 옷을 벗고 있는지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1655094440755.jpg“먼저 씻으시겠습니까?”

블랙이 허릿단에 손가락을 건 채 물었다.

16550944383158.jpg“아니, 그…… 왜 여기에…….”

1655094440755.jpg“깨어난 줄 몰랐습니다.”

16550944383158.jpg“그러니까 왜…….”

1655094440755.jpg“이제는 제 욕실이기도 하니까요.”

16550944383158.jpg“아…….”

이제 생각이 났다. 옆방을 쓰기로 했지, 참. 그러니까 욕실도 같이 쓰게 되는구나. 그럼 나는……. ……쾅! 퍼뜩 정신을 차린 리에네가 욕실 문을 닫았다.

16550944383158.jpg“실, 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봅니다.”

리에네가 닫힌 문 뒤에서 말했다. 아직도 놀란 탓에 혀가 잘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 걸 잊고 있으면 어떡해. 문 뒤에서 저벅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블랙이 문을 열까 싶어 리에네는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1655094440755.jpg“괜찮습니다.”

문을 열려는 게 아니라 이 말을 하려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손잡이를 놓을 수는 없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리에네의 얼굴이 뜨듯하게 달아올랐다.

16550944383158.jpg“앞으로는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럼 어서…… 씻으세요.”

1655094440755.jpg“이 욕실에는 욕조가 없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갑자기 블랙이 뭔가를 물어보는 바람에 리에네는 손잡이를 놓고 돌아설 틈을 놓쳤다.

16550944383158.jpg“네?”

1655094440755.jpg“욕조를 두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16550944383158.jpg“아, 욕조요. 그건…….”

원래는 욕실 한가운데 아주 크고 화려한 대리석 욕조가 있었다. 멋들어진 조각에, 금으로 가장자리를 두른 욕조가 있었을 때는 저 욕실이 지금처럼 쓸데없이 크고 황량하게 보이진 않았다. 욕조는 예전에 팔았다. 크고 훌륭한 대리석은 조각조각 잘려 지금은 클라인펠터 가의 정원석으로 쓰이는 중이었다.

16550944383158.jpg“……치웠습니다. 욕조가 있으면 물을 더 헤프게 쓰는 것 같아서.”

왠지 가슴이 따끔거렸다. 별것 아닌 거짓말이지만 매번 거짓을 말해야 하는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16550944383158.jpg“욕조가 필요하신가요?”

1655094440755.jpg“지금 당장 쓰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16550944383158.jpg“그럼…….”

1655094440755.jpg“언젠가는 목욕을 같이할 날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16550944383158.jpg“그게……. ……네?”

뭐라고 대꾸를 하려던 리에네가 그냥 입을 벌렸다. 목욕을…… 같이해? 왜?

1655094440755.jpg“그럼 욕조는 내가 마련하겠습니다.”

16550944383158.jpg“…….”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스륵, 툭. 조용해진 욕실 안쪽에서 옷감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랙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을 마저 벗는 소리였다. ……아니, 왜…….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욕을 왜 같이…… 하겠다는 거야. 찰박이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세수를 하는 듯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문지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어깨와 팔이 움직이는 모습과 찬물에 젖어 드는 머리칼,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젖은 속눈썹 같은 게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까 왜 같이……. 리에네가 더는 생각을 견디지 못하고 홱 몸을 돌렸다. 이건 다 저 남자 탓이야. 저렇게 생겨서 이상한 말이나 하니까. 리에네는 양손으로 귀를 막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물소리가 대체 뭐라고. 세수를 하면 원래 다 들리는 건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한참 쿵쾅거렸다. 방문을 닫은 리에네는 그 자리에 서서 요란한 심장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이러면 안 돼. 자꾸 저 남자를 향해서 경계심 외의 다른 감정을 품는 건 좋지 않았다. 저 남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야지. 왜 다들 저 남자의 목적이 복수라고 하는지 그것부터 알아내야지. 쓸데없는 생각 같은 걸 하지 말고. 리에네가 입 속에 고인 마른침을 삼켰다. 거지 노인을 만나야 했다. * * *

16550944355026.jpg“네? 어딜 가신다고요?”

16550944383158.jpg“신전 앞이요.”

16550944355026.jpg“거긴 갑자기 왜 가십니까? 신전에 볼일이 있으신 겝니까?”

16550944383158.jpg“네.”

어리둥절해 하며 묻는 플램바드 부인에게 리에네는 일부러 짧게 말을 끊었다. 부인에게까지 속사정을 다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블랙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제 몫이었고, 괜히 부인에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걱정을 안겨 주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부인은 솔직한 사람이라 블랙이 복수를 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앞에서 태연한 얼굴로 있지 못할 게 뻔했다.

16550944383158.jpg“어제 본 노인이 마음에 걸려서요. 신전에서 음식을 나눠 줬던 것 같은데 아직 계단이 고쳐지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음식을 가져다주려고요.”

16550944355026.jpg“그런 거라면 경비대를 시키세요. 손수 하시기엔 너무 번잡하지 않겠습니까?”

16550944383158.jpg“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요. 부인은 할 일이 많으시죠?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 말에 플램바드 부인이 펄쩍 뛰었다.

16550944355026.jpg“네?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혼자서 그 먼 데를 가시다니요!”

16550944383158.jpg“경비대에게 호위를 부탁하려고요.”

가능한 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티와칸은 아주 빠르게 나우크 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는 성 안에서도 경비대보다 티와칸의 모습이 더 자주 보였다. 자신이 외출에 나서면 블랙이 직접 호위를 한다고 나서거나 아니면 부하를 보낼 테니, 그 전에 경비대의 부대장에게 따로 말을 해서 빨리 다녀오는 수밖에 없었다.

16550944383158.jpg“음식을 조금 챙겨 주세요. 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으로요.”

16550944355026.jpg“꼭 하셔야겠다면 그래야지요. 하지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16550944383158.jpg“아니요. 부인께서는 혼례복을 만드셔야죠. 잊으셨어요? 혼인식이 이제 8일 남았어요.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매일 걱정을 했잖아요.”

16550944355026.jpg“아, 맞다. 그랬지. 그럼 저는 음식을 챙겨 드리고 부지런히…… 아, 그런데?”

16550944383158.jpg“네?”

플램바드 부인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44383158.jpg“왜요, 부인?”

16550944355026.jpg“혼인식 말입니다.”

16550944383158.jpg“네.”

16550944355026.jpg“그렇잖아도 제가 옷을 고치는 일 때문에 매일 날짜를 세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대사제께서 어제 그만…….”

부인이 재빨리 가슴 위에 성호를 그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16550944355026.jpg“네, 그리되셔서 새로운 대사제께서 오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16550944383158.jpg“그렇…….”

16550944355026.jpg“제가 기억하기론, 일전에 밀로드 예하께서 대사제로 이름을 올리셨을 땐 이전 모티야 예하께서 흙으로 돌아가신 뒤 꼬박 아흐레를 기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8일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혼인식이 8일 남았으니 그럼 주례는 어떻게 되는가 싶어서 말이지요. 예하의 죽음 앞에 바느질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며 신께서 저를 벌하지 않으실까 모르겠네요.”

16550944383158.jpg“아, 그래서…….”

리네에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죽였던 거야. 혼인식을 미루기 위해서. 클라인펠터가 대사제를 죽여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대사제가 선출되면 그는 신전의 율법에 따라 9일간 금식하며 신께 홀로 기도를 올려야 했다. 이를 신과의 대화라 일컬었는데, 신께서 새로운 대사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9일간의 금식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 하루도 양보할 수 없는 통과 의례였다.

16550944355026.jpg“공주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편찮으신 겝니까?”

플램바드 부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에네를 살폈다.

16550944383158.jpg“아뇨.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두려웠다. 그렇게 악착같이 혼인식을 미룬 클라인펠터가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그들은 절대 나우크의 통치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무력으로는 티와칸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음침하고 비열한 뒷수작을 꾸미고 있을 터였다.

16550944355026.jpg“정말 아프시진 않은 게지요?”

16550944383158.jpg“네…… 아픈 데는 없어요.”

16550944355026.jpg“그럼 그리 알겠습니다. 어제도 잘 못 주무셨을 테니 안색이 안 좋을 만도 하지요. 그래도 한 가지 걱정을 덜게 되어 다행입니다.”

16550944383158.jpg“네?”

되묻는 리에네에게 플램바드 부인이 안심하라는 듯, 팔을 토닥였다.

16550944355026.jpg“달거리 말입니다. 혼인식이 미뤄지게 되면 당연히 초야도 미뤄질 테니, 적어도 그 점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셈이지요.”

16550944383158.jpg“아…… 그렇네요.”

16550944355026.jpg“그럼 저는 음식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넉넉히 담지 못해도 너무 나무라진 마세요.”

16550944383158.jpg“그건 이해해요. 서둘러 주세요.”

16550944355026.jpg“네,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자리를 비웠다. 어떻게든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외출할 채비를 차리면서도, 머릿속은 내내 혼란스러웠다. 혼인식을 미룰 수 있어. 달거리도 감출 수 있어. 하지만 그건 클라인펠터가 무슨 짓을 꾸미도록 시간을 주는 셈이잖아.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혼자서는 도무지 매듭을 지을 수가 없는 혼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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