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종제 클리마 (2)2021.07.11.
“공주님이 외출을 하셨습니다.”
“뭐?”
“어디로?”
블랙과 페르모스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둘 다 몹시 바쁜 와중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가장 급한 것은 왕실의 수입 구조와 채권 규모를 파악하는 일이었는데, 십 년 치를 한꺼번에 살피려니 여간 번잡한 게 아니었다. 거기에 신전 계단 공사가 있었고, 대사제를 살해한 범인도 찾아야 했으며, 클라인펠터 가에 대한 감시도 늦출 수가 없었다. 페르모스는 차라리 전쟁터에서 뒹구는 게 훨씬 더 몸도 마음도 편했다며 내내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달갑지 않은 일이 하나 더 생겨난 듯싶었다.
“여쭤보니 신전 근처로 음식을 나눠 주러 간다고 하시던데요.”
“부지런도 하시지. 누가 수행하는데?”
“경비대에서 한 명 데려간다고 하셨습니다.”
페르모스가 콧등을 홱 구겼다.
“뭐? 경비대 한 명? 그걸 그냥 보냈어?”
보고를 하러 온 용병이 블랙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했다.
“그럼 어쩝니까. 강제로 붙들어 둘 수도 없고. 주군께서도 예의 바르게 굴라고 하셨는데.”
“물어는 봤어야지. 사람은 붙였고?”
“하나 보내 놨습니다. 더 붙일까요?”
“하나는 부족하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지금 가서…….”
뭔가를 지시하려던 페르모스의 말이 막혔다. 블랙이 몸을 일으킨 탓이었다.
“내가 가겠다.”
“네……? 아니, 지금 말입니까?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될 텐데요?”
“일이 지루했어.”
블랙이 좀 전까지 보고 있던 왕실 공문서를 아무렇게나 툭 내던졌다.
“다녀올 동안 끝내 놔.”
“네? ……네?”
페르모스가 두 눈이 빠질 것처럼 크게 뜨고 거푸 되물었지만 블랙은 이미 방을 나서고 있었다.
“아니, 무슨 저런…….”
“그럼 저도 나가 보겠습니다. 일 보십쇼.”
산더미 같은 종이 더미 속에 혼자 남겨진 페르모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뒤통수를 북북 문질렀다.
“이건 좀…… 아니, 이러면 안 되지 않나.”
어제부터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어제는 저를 버리고 먼저 가시더니, 이제는 아예 일까지 다 떠밀어 버렸다.
“주군께서 이러실 줄이야.”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평생 혼인은커녕 연애도 안 하실 줄 알았는데. ……이러다 나만 혼자 남겠는데.”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어 조금 울적해졌다. * * *
“저기서 기다려 주세요.”
신전 앞에서 리에네는 함께 온 경비대 부대장을 떼어 놓았다.
“공주님이 직접 주시려고요? 차라리 제게 맡기십시오. 제가 전하고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노인에게 물어볼 것은 아직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얘기였다.
“여기서 혹시 무슨 일이 없나 주위를 살펴 주세요. 특히나 클라인펠터 가의 사병들이 보이면 조심하시고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리에네는 거지 노인이 지팡이를 팔에 끼고 앉아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길이라고 해도 큰길가의 입구라 부대장이 언제든 살펴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일전에 클라인펠터 가의 저택에서 강제 혼인식을 올릴 뻔했던 이후로, 리에네도 경계심이 강해졌다.
“안녕하…….”
인사를 하며 다가서던 리에네가 걸음을 멈췄다. 거지 노인에게는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발목까지 덮는 짙은 로브에 허리에는 밧줄을 둘러 허리띠를 대신한 차림새는 그가 신전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정식 부제와는 옷감이 다르니 그는 종제일 것이다.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노인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노인의 허벅지 위에 사제들이 먹는 물빵 한 덩이를 내려놓았다. 정작 이상한 일은 그다음이었다. 퍽! 노인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물빵을 집어 거리에 팽개쳤다.
“……?”
그리고는 지팡이를 들어 종제를 때리기 시작했다. 탁, 탁! 한껏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 노인이 종제를 때리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허약한 노인이라고 해도, 저 두꺼운 나무 지팡이로 사정없이 맞으면 몹시 아플 것이다.
“그만두세요!”
그러나 종제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맞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리에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노인을 말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
코끝까지 후드를 내리고 있던 종제는 리에네를 발견하고는 놀라 입을 벌렸다.
“왜 맞고만 있는 거죠? 노인분께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요?”
“…….”
리에네와 마주친 눈이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종제는 입술을 달싹대더니 몸을 돌려 그대로 달아나려고 했다.
“가지 말아요! 이건 명령입니다.”
“…….”
발이 멈칫, 멈춰 섰다. 그러나 고개를 한 번 털어낸 종제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명령을 어기는 건가요?”
리에네가 재빨리 손을 뻗어 종제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헐렁한 종제복이 뒤로 젖혀지며 상처 난 이마와 피에 젖은 셔츠가 드러났다.
“무슨…… 다쳤잖아요!”
다친 것을 들킨 사람이나 알아챈 사람이나 둘 다 놀랐다. 노인도 그런지 하나 남은 눈을 잔뜩 찌푸렸다. 방금 지팡이에 맞아서 다쳤다고 하기에는 피가 너무 많았다.
“어쩌다 이랬어요?”
대답은 한참 만에 들려왔다.
“……속죄 기도를 올렸습니다.”
“속죄 기도? 그게 뭔데 이렇게 피를 흘리나요?”
“피 흘리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리에네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주 오래전, 극단적인 고행을 하는 사제들이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며 올리던 기도였다. 지금은 어떤 사제도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 종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어떤 신께서 당신의 자식들이 피 흘리길 원하신다는 건가요.”
“…….”
종제는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고 있나요?”
“…….”
“아니라는 말이군요.”
리에네가 착잡해진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신전의 일에 왕실이 간섭하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알게 된 이상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
“꼭 치료를 받도록 하세요. 조만간 신전에 들를 테니 그때 치료를 받았는지 확인하겠어요. 종제님은 이름이 뭔가요?”
종제는 난처한 듯 한참 입술을 우물대다 겨우 답을 했다.
“……클리마.”
“클리마 종제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니까 꼭 상처를 돌보세요. 아니면 신전에 공식적으로 얘기를 하겠어요.”
“…….”
클리마가 흠짓 어깨를 떨었다.
“그럼 이만 가도 좋습니다. 나우크의 군주로서 나우크를 위해 신께 봉사하는 종제의 삶에 늘 경의를 표합니다.”
클리마는 한참 머뭇대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골목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대의 차례군요.”
리에네는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석상처럼 앉아 있던 노인에게 돌아섰다.
“먼저 왜 종제님을 때렸는지 그 이유부터 들어보죠. 종제님과는 잘 아는 사인가요?”
노인은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만 달싹일 뿐이었다.
“말해 두는데, 나는 오늘 궁금한 것을 전부 들을 각오를 하고 왔어요. 여기서 말을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면 말을 할 때까지 감옥에 가둬 두겠어요.”
“…….”
노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쪽을 향해 뻐끔대는 눈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표시 같기도 했다.
“종제님 얘기가 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얘기부터 하죠.”
“…….”
“로드 티와칸은 누구에게 누구의 복수를 하려는 건가요.”
“아르사크의 딸은…….”
노인이 천천히 뭉개진 입술을 떼는 순간이었다.
“공주님!”
나우크 경비대의 부대장이 리에네를 불렀다.
“티와칸의 수장이 오고 있습니다.”
“네?”
리에네가 부대장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큰길 끝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커다란 체구가 블랙이라는 건 도무지 몰라볼 수가 없었다. * * *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노인의 정체를 블랙에게 들키는 건 너무 위험했다. 블랙이 제 입으로 나우크에 온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이상, 그 이유를 남이 먼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을 옮겨 주세요. 안 보이게.”
리에네는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노인에게 건넨 뒤 부대장에게 말했다. 그런 다음 지체 없이 골목을 나섰다.
“로드 티와칸.”
블랙을 부르자 그가 눈을 마주쳤다. 이 계절의 해는 추워지는 공기를 대신하듯 유난히 따가웠다. 거리를 전부 발가벗길 것처럼 내리쬐는 햇볕 아래 블랙의 생김새도 숨김없이 드러났다. ……석상 같아. 사람이 아니라, 그저 쳐다보라고 만들어 놓은 조각상 같아. 다른 사람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길을 다니는 사람들이 저마다 한 번씩 블랙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눈이 떼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고개를 꺾어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위태롭게 걸었다. 눈도 깜박이지 않는 것 같아. 블랙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정말로 석상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그를 쳐다보고 있자니 눈이 부셨다. 해가 너무 강렬한 탓인지, 아니면 그가 눈부신 탓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대는 사이, 그가 걸음을 옮겨 리에네의 앞으로 다가왔다.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네?”
“공주님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랬나요?”
리에네가 고개를 돌려 제 차림새를 살폈다.
“일전에도 입었던 옷인데요.”
제 모습이 너무 평범해 몰라봤나 싶었다. 왕족이라 해도 제 차림새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장식 없는 의복은 소박했고, 나우크에서 가장 흔한 머리칼이 갈색이었다. 제 머리칼에는 금색이 좀 더 많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게 유별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조각 같아 보였습니다.”
“아…….”
블랙이 저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이상해서 심장이 불시에 뜨끔 멈추는 기분이었다. 왜 이런 말을 하지. 이 남자는 듣기 좋은 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복수하려는 거라면서.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건데.
“……너무 과한 말입니다.”
리에네는 블랙의 말을 담아 두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유가 있겠지. 내게 상냥하게 구는 이유가.
“무슨 말을 해도 과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그의 다정함이 거북했던 리에네가 화제를 돌렸다.
“외출을 했다기에 마중을 나왔습니다. 볼일은 다 본 겁니까?”
“네.”
마중을 나왔다는 말이 터무니없이 다정하게 들렸다. 누군지 전혀 모르는 거지 노인까지 블랙이 복수를 하려 한다고 말하는 지금에서도 그가 다정하게 여겨지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나는 이 남자가 좋은 걸까. 그래서 이 남자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믿기 싫을 걸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성으로 돌아가요. 플램바드 부인에게 바느질거리를 떠넘기고 왔어요. 아마 목이 늘어날 정도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리에네가 시선을 살짝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블랙은 말없이 팔을 내밀었고, 그와 함께 걷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진 리에네는 단단한 팔에 손을 얹었다.
“혼자 하는 외출은 자주 있는 일입니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올 때는 말을 타고 왔고, 각자 동행한 사람들이 말고삐를 두 개씩 쥐고 있었지만 다시 말을 타고 가자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손을 얹고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길거리의 모두가 힐긋힐긋 돌아보았다. 서로가 눈이 어지러울 만큼 아름다운 무엇으로 보인다는 두 사람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혼자가 아니었는데요. 경비대 부대장과 함께 왔어요.”
“하나는 너무 적습니다.”
“그럴 리가요. 나우크는 작은 곳이라 번잡하게 호위가 붙을 필요가 없는걸요.”
“그 말은 찬성할 수가 없는데.”
블랙이 언급하는 게 얼마 전 클라인펠터 가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리에네가 애써 당황을 삼켰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나우크는 원래 그런 곳이었습니다.”
“앞으로는 나를 불러요.”
“네?”
리에네가 작게 되물었다.
“과한 일이에요. 로드 티와칸께서는 저보다 더 할 일이 많은 분이잖아요.”
“공주님과 동행하는 것도 내 일입니다.”
“…….”
……그래. 이런 게 다정하다는 거야. 쓸데없이. 자꾸 심장이 뜨끔해지는 기분이라 리에네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신전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대사제가 정해지면 그때부터 하려고 합니다.”
“음…… 대사제가 공사에 꼭 필요한가요?”
“그렇진 않지만 협상을 할 사람이 없는 건 곤란해서.”
“아.”
처음부터 혼인식을 담보로 한 공사였으니, 혼인식을 무사히 치르도록 확답을 받고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얘기였다. 빈틈이 없네. 누가 대사제가 되든 이 남자를 상대하려면 끙끙 앓겠어. 다음 대사제도 물론 클라인펠터의 입김이 닿은 자가 되겠지만, 어쩐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대사제든 누구든 블랙이 휘둘리는 상상은 조금도 되지 않았다. 이 남자가 진짜 내 정혼자라면. 그저 내 편이라면. 그럼 나는 정말로 감사했을 거야.
“……?”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블랙의 팔에 얹은 손에 힘을 준 모양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블랙이 걸음을 멈추고 리에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은 저주라도 걸린 것 같았다. 리에네는 여전히 이 남자에게 쏟아지는 햇살은 너무 눈부시다고 생각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 순간이었다. 큰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낡은 수레에 뭔지 모를 나무통을 가득 싣고 가던 누군가가 하필 블랙의 등 뒤에 멈춰 섰다.
“주군! 뒤를 보십시오!”
저 멀리서 따라오던 티와칸의 용병이 소리를 쳤다. 그 전에 블랙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탁, 우르르르! 우당탕탕! 짐을 묶은 끈이 끊어지며 수레에 실린 짐이 블랙과 리에네를 향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