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밀회 (30/145)

30. 밀회2021.07.14.

16550944843118.jpg“피해요!”

블랙이 리에네를 밀쳐냈다. 그 덕에 리에네가 아슬아슬하게 물러서는 사이, 묵직한 굉음을 내는 짐들이 블랙을 덮쳤다.

16550944843124.jpg“로드 티와칸!”

리에네가 비명을 질렀다. 거리가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 뿌연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나무통들이 요란하게도 굴러갔다. 다들 맞으면 뼈가 부러질 것 같은 나무통을 피해 고함을 지르며 달아났다.

16550944843124.jpg“로드 티와……. ……읍!”

그 소란 속에서, 누군가가 리에네의 등 뒤로 접근해 입을 틀어막았다.

16550944843134.jpg“소리 내지 말아요.”

16550944843124.jpg“……!”

리에네는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들었다.

16550944843134.jpg“들키면 안 되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리에네의 몸을 강제로 잡아끌었다. 다음 순간 리에네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 * *

16550944843124.jpg“……흣! 미쳤나요?”

입을 막은 손이 사라졌다. 막혔던 숨을 토해내자마자 리에네가 소리를 질렀다. 사실은 더 험한 말을 하고 싶었다.

16550944843124.jpg“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대체 왜 그런…….”

16550944843153.jpg“리에네.”

범인은 라피트였다. 라피트가 리에네의 손을 잡아 제 이마에 댔다. 사람들이 다 보는 곳에서 미친 짓을 저지른 주제에 태도는 더없이 정중하고 애틋해서 기가 찼다.

16550944843153.jpg“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둘만 마주 보는 곳에서. 누가 들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16550944843124.jpg“……그대는, 미쳤어요.”

리에네가 진심으로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 있는 곳은 창문이 없는 짐 마차 안이었다. 저를 납치하기 위해 제법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6550944843124.jpg“당장 마차를 세워요.”

리에네가 매정하게 잡아 뽑는 손을, 라피트가 고집스럽게 움켜쥐었다.

16550944843153.jpg“리에네. 잠시라도 그자에 대한 걱정을 멈출 수는 없습니까?”

16550944843124.jpg“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16550944843153.jpg“지금쯤이면 그자는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16550944843124.jpg“그러니까 내려 달라고요!”

갑자기 왈칵, 무섬증이 몰려들었다. 눈앞에 쏟아지는 나무통들이 스쳐 갔다. 마지막으로 들은 건 피하라는 블랙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창백해진 손이 무섭게 떨리기 시작했다. 죽었을까. 아니, 아니야. 그 사람은 안 죽어. 십 년간 전쟁터에서 살았어도 안 죽었어. 그런 사람이 갑자기 길거리에서 죽을 리가 없잖아. 안 죽었어. 안 죽어.

16550944843124.jpg“안…… 죽었어.”

시야가 흐려졌다. 물기가 흐르지 않고 고이면 시야가 그렇게 왜곡될 수도 있었다. 저를 붙잡는 라피트가 블랙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깨달았다. 자신이 이렇게나 간절히, 그 남자가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16550944843124.jpg“안 죽었다고.”

리에네는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흘러내리자 비로소 라피트가 라피트로 보였다.

16550944843124.jpg“내려줘요. 그리고 그대는 이 길로 도망쳐요.”

리에네가 다시 손을 잡아 뽑았다.

16550944843124.jpg“다시는 나우크의 땅을 밟지 말아요. 이 말을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16550944843153.jpg“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대의 마음을 모르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라피트는 여전히 리에네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16550944843153.jpg“잔인한 말로 나를 떼어놓으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제 더는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겠습니다. 리에네, 제발…… 이제는 솔직해져도 됩니다. 그자는 죽었습니다! 죽지 않았더라도 곧 죽을 겁니다! 내가 설마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벌였을 것이라 믿는 겁니까?”

16550944843124.jpg“무슨…… 무슨 말이에요, 그게?”

16550944843153.jpg“그자가 맨몸으로 혼자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내가 놓칠 리 없잖습니까. 비록 처음에는 그대만 마주할 생각이었지만, 그자가 나타났다는 얘기에 계획을 더했습니다. 부상을 당한 그자를 클라인펠터 가의 기사들이 처리하…….”

쾅! 라피트가 쏟아내던 말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리에네를 싣고 빠르게 달리던 짐 마차가 무언가에 부딪쳐 거세게 흔들렸다. 안타깝게도 창문이 없는 짐 마차 안에서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문은 밖에서 닫고 잠그는 식이라 안에서는 문을 열 수도 없었다.

16550944843153.jpg“무슨 일이야!”

라피트가 마부석 쪽을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대답처럼 들려오는 것은 비명이었다.

16550944874775.jpg“으아악!”

쿵! 비명이 멀어져 갔다. 누군가 달리는 마차에서 마부를 강제로 끌어내려 바닥으로 집어 던지는 광경이 연상되었다. 그저 상상만이 아닌 듯, 라피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히이이잉! 다음 순간 마차가 멎었다. 급하게 멎는 통에 마차가 크게 흔들렸고, 일어서던 라피트가 넘어지며 리에네의 몸을 덮었다. 쾅! 그 상태에서 마차의 문이 열렸다.

16550944843124.jpg“…….”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리에네가 눈을 깜박였다. 그 언젠가와 같았다. 갑작스러운 해에 눈이 부시고, 시린 눈에 비치는 것은 누군가의 검은 실루엣이었다. 역광 탓에 한 덩이 어둠으로 보이는 그를 보며 리에네는 그런 생각을 했다. 몹시 크고, 사나운 짐승 같다고. 지금도 그랬다.

16550944843118.jpg“…….”

짐승처럼 연한 푸른 눈이 이쪽을 향해 번들거렸다.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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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44843118.jpg“내려요.”

사람이 하는 말인데 제 귀에는 꼭 짐승이 목을 울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제 몸을 덮은 라피트를 블랙이 내팽개쳤을 때였다. 퍼억! 발목이 붙들린 라피트가 저만치 날아 길바닥에 처박혔다.

16550944843124.jpg“……!”

리에네는 놀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16550944843118.jpg“내려요.”

또 한 번, 같은 말이 들려왔다.

16550944843124.jpg“…….”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지금 저는 블랙을 마주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안도였다. 봐. 안 죽었잖아. 왜 죽었다고 한 거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16550944843124.jpg“로드…….”

하지만 안도는 금세 사라졌다.

16550944843118.jpg“아니면 끌어내겠습니다.”

16550944843124.jpg“…….”

블랙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다정함 따위는 없었다. 시선과 표정에도 마찬가지였다.

16550944843118.jpg“그러길 바랍니까?”

16550944843124.jpg“……아니……. 아닙니다.”

리에네가 치맛자락을 모아 쥐고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알았지만 온몸이 얼얼했다. 마차가 흔들리며 여기저기 부딪친 모양이었다.

16550944843124.jpg“어떻게…….”

마차에서 내려서자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티와칸의 용병들이 말을 탄 채 마차를 에워싸고 있었다. 마부는 보이지 않았고, 저만치 날아가 처박혔던 라피트는 이미 용병들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라피트의 계획은 실패였다. 티와칸들이 어떻게 이리도 빨리 짐 마차를 뒤쫓아 왔는지 그건 몰랐지만, 적어도 그들의 발이 몹시 빠르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블랙의 옷은 절반이나 피에 젖어 있었다.

16550944843124.jpg“많이 다치셨어요?”

저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나갔다. 블랙은 다가오는 손을 뒷걸음질로 가볍게 피했다.

16550944843118.jpg“만지지 말아요. 나 혼자 흘린 건 아닙니다. 그게 궁금한 겁니까?”

16550944843124.jpg“그럼 다행……. ……네?”

16550944843118.jpg“내가 죽을 만큼 다쳤을지 알고 싶은 겁니까?”

16550944843124.jpg“그게…… 무슨…….”

16550944843118.jpg“말했을 텐데. 클라인펠터 가의 사생아를 봐주는 건 그날 한 번뿐이라고.”

16550944843124.jpg“…….”

리에네는 블랙에게서 왜 다정함이 사라졌는지 이제 깨달았다. 단둘이 걷던 도중에 갑작스러운 사고가 생겼고, 자신은 사라졌다. 뒤쫓아 와 보니 헤어진 연인과 짐 마차에 숨어 어디론가 달려가던 중이었다. 마차 문을 열었을 때 저와 옛 연인은 꼭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처럼 뒤엉켜 있었다……. 블랙의 눈에는 이 모든 일에 처음부터 리에네가 끼어들어 있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리에네가 절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16550944843124.jpg“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 있던 일은…….”

16550944843118.jpg“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16550944843124.jpg“네. 제 의지로 마차를 탄 게 아닙니다. 강제로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그저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16550944843118.jpg“……그랬군요.”

그랬군, 이라는 말에는 일말의 이해도, 감흥도 없었다. 블랙은 리에네가 한 말을 믿지 않았다.

16550944843118.jpg“그렇다면 클라인펠터 가의 사생아가 저 혼자 반역이라도 꿈꾼 모양입니다. 가서 놈을 끌고 와. 여기서 목을 잘라. 시체는 버리고 머리만 그 집으로 돌려보내.”

16550944874775.jpg“예, 주군.”

명령은 명확하고 답은 신속했다. 그렇지 못한 것은 리에네였다.

16550944843124.jpg“로드 티와칸!”

리에네가 다급히 블랙을 붙잡았다. 옷자락을 쥔 손가락에 질척하게 피가 묻었다. 새삼 그가 많이 다쳤다는 것을 알았다.

16550944843118.jpg“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16550944843124.jpg“안 돼요.”

16550944843118.jpg“뭐가 안 됩니까?”

리에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클라인펠터 가문이 저주스럽고, 끝난 관계에 집착하는 라피트가 답답하고 넌더리 나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일 것이다. 그래도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건 곧 전쟁을 의미했다. 이 작고 궁핍한 왕국이 반으로 찢어져 서로를 죽이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저는 그 어느 쪽도 고를 수가 없었다.

16550944843124.jpg“저 사람을…… 죽이지 마세요.”

16550944843118.jpg“나우크는 반역자의 목도 붙여 두는 곳입니까?”

16550944843124.jpg“그자의 이름이 클라인펠터라면.”

리에네가 마른침을 삼켰다. 침이 아니라 가시를 삼키는 듯했다.

16550944843124.jpg“대가가 너무 큽니다. 클라인펠터는 절대 이 처형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16550944843118.jpg“내가 감당할 겁니다.”

16550944843124.jpg“아니요. 그건 안 돼요.”

톡, 토톡.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자 질척하게 배어 나오던 핏물이 아예 주르륵 흘러 발등으로 떨어졌다.

16550944843124.jpg“결국 피 흘리는 건 나우크가 될 테니까. 클라인펠터를 죽인다는 건 나우크의 절반을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클라인펠터가 왕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면 귀족의회에 소속된 가문들은 전부 클라인펠터의 편에 설 것이다. 티와칸이 그들을 전부 죽인다고 해도, 그건 반란을 진압한 게 아니었다. 이 왕국을 잘게 쪼개서 으깨 놓는 것에 불과했다.

16550944843124.jpg“이미 나우크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제가 후회하는 건 그전에 로드 티와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거예요. 그랬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까.”

라피트가 지원군을 빌려오기 위해 샤르카 왕국으로 가는 것을 말렸다면. 차라리 그때 억지로 이어 가던 반쪽짜리 연인 관계를 끝내고 곧장 청혼을 승낙했다면. 그랬다면 백이나 되는 목숨이 죽을 일도 없었고, 라피트 클라인펠터 하나를 살리기 위해 계속 위태로운 거짓말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도, 그래서 달거리 날짜에 바들바들 떠는 일도, 경험이 없는 걸 숨기는 방법을 찾아 헤맬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복수든 뭐든 하려고 했던 것을 했겠죠. 그럼 나는 당신의 진짜 마음이 뭔지 헷갈려서 매 순간 머리가 터질 것 같지도 않았을 테고.

16550944843124.jpg“제발…… 저 사람을 죽이진 마세요. 나는…… 나우크를 지키고 싶습니다.”

유난히 매섭게 번들대는 눈동자가 리에네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다. 그럴 때마다 리에네는 저 눈앞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16550944843124.jpg“저 사람 하나가 아니라, 나우크를요.”

16550944843118.jpg“……안 믿어.”

블랙의 대답은 몹시 느리게 들려왔다. 리에네를 절망으로 밀어 넣는 말이었다.

16550944843118.jpg“공주님은 이제껏 내내 믿지 못할 변명과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해댔고…… 나는 이제 그걸 믿어 주는 게 싫어졌습니다.”

16550944843124.jpg“부디…… 믿어 주세요. 지금 제가 드린 말은 전부 진실입니다.”

16550944843118.jpg“그럴 리가.”

블랙이 입매를 비틀었다.

16550944843118.jpg“이제껏 공주님은 내게 거짓말을 더 많이 했을 텐데요. 지금 하는 말이 새삼 진실이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16550944843124.jpg“…….”

리에네가 할 말을 잃었다. 블랙이 옳았다. 아슬아슬한 거짓말로 위기를 피해 갔던 순간마다 블랙은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해준 것뿐이었다.

16550944843124.jpg“무엇이라도…… 걸겠습니다. 지금 한 말이 거짓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리에네는 간절했지만 블랙은 아니었다. 피식, 뒤틀린 웃음이 흘렀다.

16550944843118.jpg“내가 아무래도 공주님께 나쁜 버릇을 들여놓은 모양입니다.”

16550944843124.jpg“그게 무슨 말…….”

16550944843118.jpg“이번에도 적당히 몸으로 달래 주면 원하는 대로 넘어갈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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