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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배신 (31/145)

31. 배신2021.07.18.

당황해 목소리가 커졌다.

16550945017868.jpg“무슨 그런……! 그런 게 아닙니다!”

16550945017874.jpg“아니면 뭡니까?”

16550945017868.jpg“…….”

하지만 블랙의 대꾸에는 입술이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가 그렇게나 달랐다. 저는 나우크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지만, 블랙에게는 옛 연인을 지키고자 질 나쁜 거짓을 남발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16550945017874.jpg“말했듯이, 나는 이제 공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손톱 밑 가시처럼 아팠다.

16550945017874.jpg“그래도 내가 저자를 살려두길 원합니까?”

16550945017868.jpg“……네.”

믿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가 죽어서는 안 됐다. 차라리 그가 죽은 게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아무리 들었어도, 나우크에서 클라인펠터의 죽음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16550945017874.jpg“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16550945017868.jpg“아…….”

순간 안도감이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리에네를 보며 블랙의 눈이 칼날처럼 좁아졌다.

16550945017874.jpg“대신 대가를 주십시오.”

16550945017868.jpg“어떤…….”

블랙이 리에네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귓가에 입술이 와 닿았다. 그는 제 입술을 리에네의 귓불에 뭉개듯 누르며 느리게 내뱉었다.

16550945017874.jpg“오늘 밤 공주님은 나와 한 침대를 써야 할 겁니다.”

16550945017868.jpg“뭐라……고요?”

블랙은 다른 말은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듯 팔을 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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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45017874.jpg“저걸 끌고 가. 묶어서 가둬.”

16550945031419.jpg“……네, 주군.”

저런 놈을 어떻게 안 죽이냐는 눈빛들이었지만, 용병들은 명령을 따랐다. 지금 뭐라고 토를 달기에는 블랙의 표정이 너무 살벌했다. 건드리면 어디든 잘려나갈 것 같았다.

16550945017874.jpg“공주님을 성으로 모셔와라. 나는 먼저 갈 테니.”

16550945031419.jpg“엇, 네? 먼저 가신다고요? 그 몸으로 혼자 말을 타신다는 겁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용병들을 뒤로한 채 블랙은 빠르게 걸어가 훌쩍 말에 올랐다.

16550945017874.jpg“이럇!”

두두두두……. 블랙을 태운 말이 눈 깜짝할 속도로 멀어졌다.

16550945017868.jpg“…….”

리에네는 가만히 서서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블랙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파……. 이제는 믿지 않는다는 그 말이 여전히 아팠다. * * *

16550945031419.jpg“세상에……! 공주님! 차림새가 왜 그렇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겝니까?”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막 노을로 바뀌어 가는 무렵이었다.

16550945031419.jpg“혼자 가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오실 때는…….”

예상했던 대로 플램바드 부인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잠깐 먹을 것만 나눠 주고 오겠다던 사람이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세 명이나 되는 용병들에게 둘러싸여 돌아오고 있으면 누구라도 호들갑을 떨 만했다.

16550945017868.jpg“그럴 일이 있었어요. 일단 좀 씻고 싶은데 물이 남았을까요?”

16550945031419.jpg“그럼요, 그럼요. 제가 쓸 물이라도 쓰셔야지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요.”

16550945017868.jpg“감사해요, 부인.”

리에네가 용병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들은 사실상 호위가 아니라 감시역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로 티와칸에게 저는 언제든 수장을 배신하고 달아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됐을 것이다. 거기에 대고 구구절절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할 마음은 없었지만, 감시마저 달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16550945017868.jpg“이제 호위는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용병들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16550945031419.jpg“편할 대로 하십시오. 저희는 주군께서 따로 말씀하실 때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16550945017868.jpg“성 안은 안전해요. 호위는 과합니다.”

16550945031419.jpg“주군의 생각은 다를 것 같습니다.”

16550945017868.jpg“…….”

결코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리에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6550945017868.jpg“그럼 의자라도 갖다 놓고 앉아 있어요. 방을 나서게 될 때면 내가 미리 알려주겠습니다.”

16550945031419.jpg“저희한테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알아서 하겠습니다.”

16550945017868.jpg“……그래요, 그럼.”

리에네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플램바드 부인은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한참 눈을 끔벅댔다. ……탁. 등 뒤로 침실 문을 닫고서야 부인이 물었다.

16550945031419.jpg“공주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자들이 왜 갑자기 저렇게 굴고 있답니까?”

16550945017868.jpg“하아…….”

내내 참았던 피로가 몰려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리에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16550945031419.jpg“어머나, 공주님! 대체 왜 이러세요!”

화들짝 놀란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다.

16550945017868.jpg“잠시만요. 잠깐만 앉아 있을게요.”

16550945031419.jpg“아니, 바닥에서 이러지 마시고 의자에라도 앉으세요.”

16550945017868.jpg“그럼 의자가 더러워지잖아요. 세탁은 이 옷 하나로 족해요.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16550945031419.jpg“…….”

부인은 잔뜩 지친 얼굴을 살피다 저도 리에네의 옆에 주저앉았다.

16550945031419.jpg“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요?”

16550945017868.jpg“……그렇죠.”

16550945031419.jpg“제게 말씀하실 일은 아닌 겁니까?”

16550945017868.jpg“아뇨.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

……말을 하려니, 마음이 아파서요. 왜 아픈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도 자꾸 아파요.

16550945017868.jpg“클라인펠터 가에서 로드 티와칸을 죽이려고 했어요.”

16550945031419.jpg“네?”

플램바드 부인이 거의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뒤늦게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걸 깨닫고 입을 막을 정도였다.

16550945031419.jpg“그, 그래서요? 그래서 죽었…… 죽었습니까?”

16550945017868.jpg“아니요.”

리에네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블랙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금 끓는 물처럼 가슴을 소란스럽게 했다.

16550945017868.jpg“하지만 다쳤어요. 많이.”

16550945031419.jpg“저런……. 그래서요? 아니, 클라인펠터 가에서 그런 짓을 했는데 왜 공주님께 화를 낸답니까?”

그 말은 조금 놀라웠다.

16550945017868.jpg“로드 티와칸이 내게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세요?”

16550945031419.jpg“공주님께 붙여 놓은 자들이 화를 내고 있으니까요.”

16550945017868.jpg“화를 내는 건 아니었는데요. 험하게 굴지도 않았고요.”

16550945031419.jpg“웬걸요. 어제까지 공주님을 대할 때 태도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16550945017868.jpg“그런……가요?”

16550945031419.jpg“제가 볼 땐 너무나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알았다. 티와칸의 용병들이 소문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이전까지 들었던 끔찍한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괴물에 더 가까웠는데, 막상 그런 모습을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에게 화가 난 지금도 말투가 거칠어졌을 뿐, 별다른 무례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 남자 때문이겠지. 그 남자가 내게 항상 정중했으니까.

16550945017868.jpg“로드 티와칸은 내가 클라인펠터 경과 함께 그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해요.”

16550945031419.jpg“네에?”

플램바드 부인이 눈을 어찌나 크게 떴는지 금방이라도 툭 빠질 것 같았다.

16550945031419.jpg“공주님, 설마…….”

16550945017868.jpg“아니요.”

리에네가 단호히 의심의 싹을 잘랐다.

16550945017868.jpg“나는 맹세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어요. 티와칸이 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지금 그런 짓을 하는 건 바보짓이에요.”

16550945031419.jpg“그렇지요! 그건 다섯 살짜리 어린애라도 알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클라인펠터 경은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답니까?”

16550945017868.jpg“저도 그걸 알고 싶어요. 대체 왜 그렇게 어리석게 굴고 있는지.”

라피트가 저를 납치해 짐마차에 실었고, 그걸 블랙이 뒤따라왔다는 사건의 전말을 전부 얘기하자 플램바드 부인은 아이고, 신음 소리를 냈다.

16550945031419.jpg“그건……. 누구라도 오해할 만하겠네요. 더군다나 그는 공주님이 그…… 클라인펠터 경의 아이를 가졌다고 믿고 있으니.”

16550945017868.jpg“그렇죠.”

리에네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16550945017868.jpg“그런 말을 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내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그런데…….”

목이 울컥 막혀와 리에네가 잠시 숨을 골랐다.

16550945017868.jpg“……그냥 너무, 갑갑해요.”

누가 내 심장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아. 그 남자를 믿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진데, 왜 이젠 나를 안 믿겠다는 말에 이렇게 기분이 무참한 건지 모르겠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의심해야 하는 걸까. 이게 과연 끝나기는 할까…….

16550945031419.jpg“아니라고 말하세요.”

리에네는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16550945017868.jpg“소용없었어요.”

16550945031419.jpg“믿을 때까지 하셔야지요. 한 번 깨진 믿음이 그리 쉽게 다시 붙겠습니까.”

16550945017868.jpg“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긴 할까요.”

16550945031419.jpg“왜 그런 말씀을 하셔요. 오해를 사서 괴로우신 게 아닙니까?”

16550945017868.jpg“맞아요. 그런데…… 오해를 푼다고 괜찮아질 사이도 아니잖아요.”

16550945031419.jpg“공주님…….”

16550945017868.jpg“나는 앞으로도 계속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해요. 그때마다 일일이 나를 믿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16550945031419.jpg“왜 그리 나쁘게 생각을 하십니까. 거짓말을 안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16550945017868.jpg“어떻게요. 당장 나는 달거리부터 숨겨야 하는데요.”

16550945031419.jpg“…….”

그대로 한동안 위태롭게 목을 꺾은 채 얼굴을 숨기고 있던 리에네가 천천히 등을 폈다.

16550945017868.jpg“이젠 됐어요. 씻을게요.”

16550945031419.jpg“공주님…… 더 계셔도 됩니다.”

플램바드 부인은 리에네가 조금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그렇게 대신했다.

16550945017868.jpg“이렇게 있다 보면 끝이 없어요.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죠. 씻고 나올 테니 옷을 준비해 주세요.”

16550945031419.jpg“……그럼 조금 기다리세요. 제가 물을 떠놓겠습니다.”

리에네가 거절할 거라 생각했던지, 플램바드 부인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냉큼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16550945017868.jpg“괜찮은데.”

리에네가 부인의 등을 보며 중얼거렸다.

16550945017868.jpg“정말로.”

엉망이 된 기분을 빼면, 사실 괜찮았다. 어쨌거나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는 죽지 않았고, 블랙도 마찬가지였다. 나우크는 무사했다. 그러니 다 괜찮아야 했다.

16550945017868.jpg“……아, 아닌가. 하나 안 괜찮은 게 있을지도.”

나우크가 무사한 대가로 저가 치러야 할 값이 있었다.

16550945017874.jpg-오늘 우리는 한 침대를 쓰게 될 겁니다.

갑자기 머릿속을 파고드는 블랙의 목소리에 리에네가 부르르 등줄기를 떨었다. 설마…… 아닐 거야. 혼인식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그런……. ……아닐 거야. 블랙이 빈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리에네는 그 말을 믿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다.

16550945017868.jpg“아닐 거야. 그렇게…… 그런 일을 강제할 사람은 아니야. 아니야.”

부정할수록 점점 부피를 늘려 가는 생각에 짓눌릴 것 같아 리에네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씻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엉망이 된 기분도, 다가올 밤에 대한 걱정도. 괜찮아져야 했다. * * * 같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리에네는 욕실 양쪽 문 모두 빗장을 내렸다. 옷을 벗고 거울 앞에 놓인 물그릇을 향해 돌아서는데 생각보다 더 몰골이 처참했다.

16550945017868.jpg“이건 뭐야.”

오른쪽 팔꿈치와 팔뚝, 옆구리 쪽에 파랗고 붉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마차에 실렸을 때 부딪치거나 했던 곳 같았다.

16550945017868.jpg“여기는 까졌네. 어쩐지 아프더라니.”

어이도 없고 허탈해서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16550945017868.jpg“그 사람은 정말 도움이 안 되네.”

그래도 한때는 연인이었던 인간이 지금은 말할 수 없이 번거로운 존재가 되었다.

16550945017868.jpg“싫다, 진짜.”

리에네는 라피트를 향해 들리지도 않을 험담을 하고는 까져서 피 흐르는 팔꿈치를 씻어냈다. 그새 피가 굳어 있어 씻기가 더 불편했다.

16550945017868.jpg“그러고 보니…… 그 남자도 다쳤는데.”

블랙은 이 정도가 아니라 옷이 다 젖었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수하들조차 말 타는 일을 말렸던 것을 보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심할지도 몰랐다.

16550945017868.jpg“치료는 했을까.”

먼저 출발한 블랙은 아직 성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를 간 건지, 몸은 괜찮은지 걱정이 됐다. 어느 순간부터 그를 향한 감정은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안타까움과 걱정, 고마움과 미안함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중이었다. 리에네는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많이 아프지 않기를. 리에네는 속마음을 삼키고 씻는 데 집중했다. 핏자국을 다 지우고 스스로 말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일이 터졌다. 우드득…… 퍽! 빗장을 잘 내려놓은 욕실 문이 뜯기듯 열렸다. 빗장을 걸어 놓은 받침대가 미는 힘에 떨어져 나갔다.

16550945017868.jpg“……!”

리에네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블랙이었다. 표정이 석상처럼 굳은 채, 그가 저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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