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불꽃 (1)2021.07.21.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는 듯했지만 다행히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재빨리 근처에 놓아둔 수건을 집어 맨몸을 가린 리에네가 말했다.
“무, 무슨, 짓…….”
손과는 달리 입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왜, 왜 이렇…… 빗장을 내려놓았…….”
그제야 블랙이 시선을 떼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어쩐지.”
“……?”
“안 열린다 싶더니 빗장 때문이었나.”
“…….”
그러니까 일부러 연 게 아니라 잠가 놓은 줄 몰랐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블랙은 오늘을 계기로 그간의 정중함을 팽개치고 막무가내로 굴 작정을 했던 게 아니었다. 그를 보니 씻고 싶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블랙은 사고로 인한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그대로였다.
“그, 그럼 이만 나가 주세요. 저는 다 씻었으니 금방 욕실을 비워 드리겠습니다.”
“다쳤습니까?”
“……네?”
블랙은 리에네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대로 서서 물었다.
“팔과 옆구리에.”
“아…….”
리에네가 몸을 감추려고 자세를 비틀며 다시 말했다.
“네. 그만 나가 주…….”
“언제 다친 겁니까? 수레가 넘어졌을 때?”
그때는 아니었다. 수레가 넘어지며 나무통이 쏟아질 때는 블랙이 저를 먼저 밀었고, 그 덕에 제 몸에는 뭐가 닿을 새가 없었다.
“아니요. 마차에 탔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 쳐다보세요. 정혼자라 해도 이건 결례입니다.”
“아…….”
블랙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그가 시선을 피한 채 등을 돌렸다. 빗장이 뜯어진 문으로 다시 나가려던 그가 뒤돌아선 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아닌 건가.”
“네?”
거리 탓인지 리에네에게는 그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블랙은 다시 고개를 돌리는 일 없이 그대로 문을 나갔다. 탁. 열릴 때와는 달리, 닫힐 때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후…….”
리에네는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람.”
떨어져 나간 빗장이 쓸데없이 넓은 욕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성문을 닫는 빗장처럼 거대하진 않았지만 욕실의 빗장도 제법 묵직하고 단단했다. 그걸 고작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고 힘으로 밀어내 버린 블랙이 이상한 것이었다. 새삼 그와 자신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났다. 어떤 짓이든 그가 힘으로 강제하면 저는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나갔잖아.”
보지 말라고 하니 보지 않았고, 나가 달라고 하니 군말 없이 나갔다. 리에네는 그게 블랙이라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 남자는…… 내가 싫다는 건 하지 않을 거야. 그런 사람이야.”
지금으로서는 믿을 게 그것뿐이었다. * * * 블랙이 들어왔을 때는 거의 다 씻고 난 뒤였다. 리에네는 더없이 빠르게 물기를 닦아내고 욕실을 나와 부인이 가져다 놓은 옷을 챙겨 입었다. 그런 다음 다시 욕실로 들어가 자신이 쓴 물 그릇을 비우고 새로 물을 채워 넣었다. 다친 사람에게 손수 물을 채워 쓰라는 건 너무 야박한 짓 같아서였다. 탕탕. 할 일을 마친 리에네가 욕실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가 블랙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이제 욕실을 써도 됩니다.”
안에서는 대꾸가 없었다.
“……로드 티와칸?”
리에네가 고개를 갸웃대다 몸을 돌렸다. 잠깐 자리를 비웠나 싶었다. 그러다 다시 돌아가 침실 문을 열었다. 왠지 자리를 비운 게 아닐 것 같았다. 탁!
“……. 로드 티와칸!”
문을 열자 바닥에 길게 쓰러져 있는 블랙이 보였다. 파랗게 질린 리에네가 블랙을 향해 달려갔다.
“로드 티와칸! 정신을 차려 보세요!”
엉겁결에 머리를 끌어안고 뺨을 두들겼더니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로드 티와칸!”
“……아.”
쓰러져 있던 사람치고는 제법 또렷한 말이 흘러나왔다. 새파란 눈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바닥에 앉은 채 제 머리를 무릎 위에 놓고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는 리에네를 훑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답이 없어서…… 하아, 들어와 봤더니 바닥에 쓰러져 계셨어요.”
아직도 놀라서 숨이 차는 건 리에네였다.
“……깜박 잠이 든 모양입니다.”
“네? 바닥에서요?”
“피를 흘렸을 땐 가끔.”
“…….”
리에네는 영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누운 채 저를 보고 있는 블랙을 마주 보았다.
“다치셨잖아요. 그래서 정신을 잃은 게 아닌가요?”
“깼으니 됐습니다.”
“…….”
왜 그 순간 그의 몸에 가득한 상처가 생각났을까. 다친 걸 잘 모르나 봐, 이 사람은. 아픈 것도 모르고. 다쳐도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그러면서 왜 남이 다친 건 그렇게 쳐다보는데.
“일어나 보세요.”
리에네가 블랙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블랙이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중간에 한 번 인상을 쓰긴 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두 다리로 섰다.
“거기 있을 겁니까?”
블랙이 욕실을 향하며 물었다. 들어가기 전에 옷을 벗겠다는 뜻이었다.
“……아니요.”
리에네가 고개를 한 번 내젓고 일어섰다.
“따라오세요.”
“……?”
블랙이 의아해하는 사이, 리에네가 그를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갔다. * * *
“옷을 벗으세요. 평소 씻을 때처럼요.”
“…….”
블랙이 리에네를 쳐다보았다. 약간 어이가 없는 듯,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씻는 걸 거들게요. 또 쓰러질지도 모르는 사람을 혼자 놔둘 수는 없어요.”
“괜찮습니다.”
“아닌 것 같아요. 벗으세요.”
“좀 다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요.”
“…….”
블랙이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찡그렸다.
“왜 이러는 겁니까?”
“말씀드렸잖아요. 환자라서 그렇다고.”
“그럴 정도는 아닙니다.”
“저야말로 왜 이러는지 묻고 싶네요. 제가 상처를 봐 드리겠다고 한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 오늘은 왜 안 된다는 건가요?”
작게 구겨져 있던 미간에 주름이 좀 더 깊어졌다.
“그게 아니라…… 클라인펠터의 목을 붙여 뒀다고 이러는 거라면 됐습니다. 공주님이 치르기로 한 대가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
그 말에 리에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리에네는 다시 차분한 표정을 지어냈다.
“대가와는 상관없어요. 로드 티와칸은 다치셨고, 애석하게도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데는 관심이 없는 듯하니 제가 대신하겠다는 것뿐입니다.”
“그걸 왜 공주님이 대신하겠다는 겁니까?”
“제 정혼자니까요.”
“…….”
리에네는 블랙의 한쪽 눈썹이 구겨지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유쾌하지 않다는 건 확실했다. 내가 저 남자라도 그럴 거야. 오늘 같은 일을 겪고 나서라면.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혼인 서약서가 오간 뒤부터는 늘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머리로든 몸으로든, 정혼자를 두고 부정을 저지르진 않았습니다. 제 이름이 아르사크인 이상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믿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의 마음이지 제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해서 다친 사람을 내버려 두고 싶진 않았다.
“제가 미덥지 못하다면 다른 이라도 부르세요, 제발.”
“…….”
블랙은 그 자리에 선 채 더러워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손을 치우고 얼굴이 전부 드러났을 때는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씻을 때는 다 벗습니다.”
그 말에는 리에네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어디까지 남겨두면 되겠습니까?”
최소한만 남겨두기로 했다. 블랙은 무릎 위로 올라오는 속바지 하나만 입은 채 리에네가 기다리고 있는 욕실로 들어왔다. * * * 비명이 나올 뻔했다. 블랙이 멀쩡한 얼굴로 태연하게 서 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이 이렇게 다쳤다면 침대에 누워 끙끙 앓기부터 했을 것이다.
“안 다친 데가 없네요.”
리에네는 여기저기 부어오르고 터져 있는 살갗을 보며 한숨을 흘렸다. 등을 돌리고 있는 터라 제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뼈가 다친 게 아니라면 크게 불편하진 않아서…….”
블랙이 변명처럼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는 살면서 변명을 해본 일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자신이 변명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저 평소라면 당연했을 일이 왜 리에네 앞에서는 곤란하게 들리는지 이상하다고만 여겼다.
“그래도 여기는 빨리 아물었네요. 벌써 다 나은 거 같아요.”
꼼꼼히 핏자국과 흙먼지를 닦아낸 리에네가 얼마 전 화살이 박혔던 어깨 부근을 조심스레 쓸며 말했다.
“……읏.”
블랙이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틀었다. 리에네가 당황해 얼른 손을 떼어냈다.
“죄송해요. 아직도 아픈 줄 몰랐어요.”
“아프진 않습니다.”
“……? 그러면…….”
“부드러워서.”
“……?”
부드러운데 왜 피할까. ……아, 간지럽다는 말이겠구나. 블랙의 반응을 그렇게 이해한 리에네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흉이 지고 있으니까 간지러울 수 있지. 조심해야겠다.
“등만 해도 상처가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씻을 생각이셨어요?”
그냥 물을 뿌리면 너무 아플 것 같아 리에네는 수건을 물에 적셔 살살 닦아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 몸으로 혼자 씻을 생각을 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별생각 안 했습니다. 물이나 끼얹었을 겁니다.”
“하아…….”
짐작했던 대로였다. 그는 제 아픔에 둔감했다. ……나는 아닌데. 나는 너무 아파 보여서 건드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거의 다 됐어요. 조금만 참으세요.”
“괜찮습니다. 빨리 마치려 들지 않아도.”
“제가 안 괜찮아요.”
상처를 더 보고 있다간 밤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파 보이는 걸 지나 자신도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등은 다 됐어요. 남은 곳은 아마도 손이 닿으실 듯한데…….”
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는 어쩐지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제가 했으면 합니다.”
블랙이 힐긋 고개를 돌려 리에네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정혼자라서?”
“아니요. 로드 티와칸께서는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않을 게 뻔해서요.”
“…….”
무슨 생각에선지 블랙은 입을 다물고 리에네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렇게 고개를 틀고 있으면 목이 아프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괜찮다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래서 리에네는 스스로 자리를 옮겼다. 욕실 의자에 앉은 블랙은 자리가 좁아 보였고, 저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눈이 마주치자 새삼 곤란해졌다. 괜히 한다고 했나. 이렇게 얼굴이 보이면 나는 태연할 수가 없는데.
“……괜찮지 않습니다.”
리에네가 물에 적신 수건을 빗장뼈에 갖다 대는 순간이었다. 블랙이 고개를 뒤로 젖혀 리에네의 손길을 피했다. 수건을 쥔 손이 빈 공간에 남아 어색하게 굳어 버렸다.
“그러면 정말로 오늘 일의 대가를 받아내고 싶어질 거라.”
“그게……. ……아.”
리에네는 조금 늦게 블랙의 말을 이해했다. 그것도 귀로 들은 말을 해석한 게 아니라 시선으로 알아차렸다. 블랙은 화살을 맞고 열이 올랐던 그때보다 더 불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 아니잖아요.”
순간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바람에 목소리가 갈라진 채 흘러나왔다. 리에네는 손을 입에 대고 괜히 헛기침을 했다. 블랙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리에네가 하는 짓을 응시했다.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로드 티와칸은 그런 끔찍한 일을 강제할 분이 아니잖아요.”
순간 블랙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나와 자는 게 끔찍한 일입니까?”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가 준비가 안 됐는데 강제로 하실 분은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이제껏 제게 그런 모습을 보이셨으니까요. 제게 늘 정중하셨던 것을 압니다.”
블랙이 쓰게 웃었다.
“내가 정중했다고…… 그랬다고 해도 동침은 다른 일입니다.”
“아니요. 같은 일이에요. 청혼을 거절할 힘도 없는 제게 정중하다는 건 로드 티와칸께서 그만큼 저를 배려하고 위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가 원치 않는 일을 강제할 리 없어요.”
“…….”
쓴웃음이 짙어졌다. 웃음이 멎은 다음, 블랙이 리에네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헷갈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