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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불꽃 (2) (33/145)

33. 불꽃 (2)2021.07.25.

리에네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16550945464854.jpg“나는 공주님이 지나치게 영리한 건지, 아니면 말이 안 되게 순진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1655094546486.jpg“……둘 다 칭찬은 아닌 것 같군요.”

16550945464854.jpg“내가 공주님 말이라면 뭐에 쓰인 것처럼 거절을 못 한다는 걸 알아서 그럽니까?”

1655094546486.jpg“그건…… 그런가요?”

16550945464854.jpg“알잖습니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1655094546486.jpg“…….”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을 해주었는지. 대가를 운운했지만 사실 받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도.

16550945464854.jpg“하지만 언제까지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블랙이 손을 뻗어 리에네가 들고 있는 수건을 잡아챘다.

16550945464854.jpg“나가요. 내가 아직 괜찮은 사내인 척하고 있을 때.”

손이 비었다. 리에네는 빈손을 보고 있다가 그가 했듯이 다시 수건을 빼앗아 왔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이 남자는 나를 오해하고, 나는 그 오해가 괴로운 그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야. 나는 그렇게 있고 싶지 않아.

1655094546486.jpg“나는 로드 티와칸이 괜찮은 사내 이상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무섭지 않아요.

1655094546486.jpg“그러니까 그대로 계세요.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정혼자를 돌보겠습니다.”

16550945464854.jpg“…….”

블랙의 뺨 근육이 경련처럼 꿈틀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불쾌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 상처를 전부 씻기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거기에 리에네가 우겨 머리까지 감기고 났더니 저녁이 훌쩍 지나 버렸다. 블랙은 그런 일까지 해줄 필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리에네는 그가 상처를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머리를 감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여간 그래서 욕실을 나왔을 때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어쩐 일인지 저보다 블랙이 더 지쳐 보여 그게 좀 의아하긴 했다. 수하를 시켜 약을 꼭 바르시라는 당부를 몇 번씩이나 한 뒤, 리에네는 제 방으로 돌아왔다. 팔이 너무 무거워서 잠옷을 갈아입는 데에도 플램바드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저녁 식사를 하셔야 한다는 부인을 억지로 돌려보낸 뒤 리에네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너무 긴 하루였다. 곧장 눈을 감고 잠이 들고 싶었는데, 누웠더니 등이 아파 신음이 나왔다.

1655094546486.jpg“아…… 왜 이제야 아프고 그래…….”

리에네가 억지로 몸을 돌려 누웠다. 아예 배를 깔고 엎드렸더니 간신히 좀 나아졌다.

1655094546486.jpg“그때 등을 부딪쳤나…… 멍은 옆구리에 들었는데.”

나는 멍만 들어도 이렇게 아픈데, 그 남자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남자는 내내 다치기만 하는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원인을 제공한 라피트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이게 다 그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이 다섯 살짜리 애보다 못하게 굴어서. 대체 왜 벌써 끝난 사이라는 걸 못 알아듣는 거야. 그러고 보니 라피트가 어떻게 됐는지 그걸 물어보지 않았다. 가둬 놓으라고 했으니 어딘가에 갇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일은 난리가 나겠군. 린든 클라인펠터가 분에 차서 날뛰겠지. 당장 마실로우 경을 보내서 나를 쥐어짜려 들 텐데. 그건 또 어쩌지. ……하아, 그만두자. 지금은. 생각은 내일 가서 해. 자기 직전까지 그 집안 인간들을 떠올리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간 십중팔구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차라리 기분이 좋아지는 걸 생각하자. 등이 아픈 것도 잊을 만한 좋은 생각. 그런 게 뭐가 있을까……. 문득 떠오르는 건 블랙의 낮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16550945464854.jpg-나가요. 내가 아직 괜찮을 때.

갑자기 볼을 따라 사르륵 소름이 번졌다. 목덜미가 저릿하게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그 말이 헷갈리지. 내용이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감정이 헷갈렸다. 그 말은 여느 때의 블랙처럼 다정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위험하게 들려왔다. 무기 하나 없이, 난폭한 육식 짐승 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짐승이 결코 저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안전한 기분도 들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리에네가 엎드린 채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블랙에게는 말이 됐다. 그 남자는 처음부터 그렇게나 모순적이었으니까. 그만 자자. 리에네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이제 악몽은 안 꿀 것 같아. 등이 아프지만 잠이 들면 모를 것이다. 지금은 자는 게 최선이었다.

1655094546486.jpg“……?”

그러나 오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끼이익, 탁. 뭘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침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1655094546486.jpg“누구…….”

애써 몸을 일으키던 리에네는 문가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을 발견했다. * * * 왜…… 왜 온 거야. 설마…….

16550945464854.jpg“대가를 받으러 왔습니다.”

1655094546486.jpg“…….”

잠옷이 구겨지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사실 손이 저도 모르게 잠옷을 움켜쥐느라 내는 소리였다.

1655094546486.jpg“안……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목이 꾹 막혀서 제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블랙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주위가 온통 고요한 가운데 저를 보는 푸른색 시선만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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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45464854.jpg“공주님도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습니까.”

1655094546486.jpg“저는…….”

16550945464854.jpg“나도 하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공주님은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1655094546486.jpg“뭐가 하고 싶은……데요?”

16550945464854.jpg“싫다는 걸 하진 않을 겁니다.”

1655094546486.jpg“…….”

아무래도 그가 하고 싶다는 건 자신이 생각했던 그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리에네는 블랙이 뭔가를 손에 들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1655094546486.jpg“그게…… 뭔가요?”

16550945464854.jpg“약입니다. 돌아서서 앉아요.”

1655094546486.jpg“…….”

리에네가 머뭇대다 그가 시키는 대로 등을 돌리고 앉았다. 침대에 블랙의 무게가 내려앉았다. 그는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 앉아 리에네의 등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16550945464854.jpg“나는 벗으라고는 안 할 겁니다.”

……그럼 뭐라고 할 건가요.

16550945464854.jpg“대신 참아요. 간지러워도.”

……? 스륵, 옷자락이 들렸다.

1655094546486.jpg“무슨…….”

리에네가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블랙은 잠옷 아래로 파고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1655094546486.jpg“자, 잠깐만요.”

리에네는 애써 몸을 틀어 블랙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다 등과 옆구리가 아파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

16550945464854.jpg“자세를 바로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잘못 앉으면 더 아파요.”

1655094546486.jpg“뭘 하시려고요.”

16550945464854.jpg“내 정혼자를 돌볼 겁니다. 남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치곤 본인도 치료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1655094546486.jpg“아니, 잠깐…… 저는 손이 닿는 위치예요. 제가 바를 수 있어요.”

16550945464854.jpg“나는 아니었습니까?”

1655094546486.jpg“그건…….”

16550945464854.jpg“돌아앉으세요. 아니면 계속 얼굴을 보고 있든가.”

1655094546486.jpg“…….”

블랙은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리에네가 아무리 힘주어 손목을 붙들어도 그는 어렵지 않게 그 손을 움직였다.

1655094546486.jpg“대가를 받아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리에네가 작게 물었다.

16550945464854.jpg“이걸로 대신하겠다고 하면 싫습니까?”

……그럴 리가. 블랙은 고르는 게 무의미한 선택지를 내밀었다. 제 입으로 약을 바르는 것보다 동침이 낫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실제로도 약이 나았다. 하지만 이건……. 이건 좀 이상한데. 이건 이 남자가 내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말 같잖아. 대가를 받아가는 대신.

1655094546486.jpg“왜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결국 리에네는 고개를 돌렸다. 뺨이 자꾸 달아올라 무릎에 두 팔을 얹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16550945464854.jpg“무슨 생각 말입니까?”

1655094546486.jpg“약이요.”

16550945464854.jpg“공주님이 바를 것 같지 않아서요.”

1655094546486.jpg“그러니까 그냥 약을 주시면…….”

16550945464854.jpg“그럼 내가 만질 수 없으니까.”

1655094546486.jpg“…….”

16550945464854.jpg“그리고 혼자 손을 대기에는 꽤 어려운 위치에도 멍이 있었습니다.”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아, 봤겠구나. 새삼 부끄러웠다. 어디까지 봤을지. 나도 이 남자가 벗은 걸 봤으니까 된……. ……되긴 뭐가 돼.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

1655094546486.jpg“드, 등에도 있어요?”

리에네가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블랙의 손은 이제 완전히 잠옷 아래로 들어와 있었다.

16550945464854.jpg“네.”

약을 바른 손가락이 등 가운데를 건드렸다. 그 작은 감촉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해 리에네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16550945464854.jpg“여기에. 아픕니까?”

1655094546486.jpg“그…… 조금…….”

괜찮다고 하면 저 선명한 감촉이 얼마나 더 진해질까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아픈 게 아니라 수상했다. 간질대고 저릿했다. 시원하게 긁고 싶은 간지러움이 아니라 뒤돌아서서 제 상처를 어루만지는 남자를 꽉 안고 싶은 그런 감각이었다.

16550945464854.jpg“살살하고 있는데.”

그건 알았다. 너무 살살해서 문제였다.

1655094546486.jpg“빨리…… 해주세요.”

남자가 손을 떼야 이 수상한 간지러움이 끝날 것이다.

16550945464854.jpg“싫습니다.”

1655094546486.jpg“……네?”

그런데 짓궂게도, 블랙이 이렇게 나왔다.

16550945464854.jpg“천천히 할 겁니다. 나는 오래 만지고 싶으니까.”

리에네가 이를 한 번 꾹 깨물고 난 뒤 말했다.

1655094546486.jpg“그런 말은 좀…… 너무…… 점잖지 못한 것 같은데요. 약을 발라주는 사람이 하기에는.”

16550945464854.jpg“압니다. 그런데 이젠 점잖게 보일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등줄기를 따라 느리게 움직이던 손이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리에네가 알고 있는 옆구리 쪽이었다. 그곳은 등보다 몇 배는 더 저릿했다. 리에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었다.

1655094546486.jpg“그, 그만…….”

16550945464854.jpg“참으세요. 나도 그랬으니.”

블랙은 옆구리에도 천천히 약을 펴 발랐다. 오늘 그는 다정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강압적이었다. 평소의 그와는 어딘가가 달랐다. 점잖게 보일 생각이 없다는 말이 그런 뜻일까. 그런데 왜.

1655094546486.jpg“점잖게 보이는 게 왜 싫으세요?”

16550945464854.jpg“소용이 없는 것 같아서.”

1655094546486.jpg“무슨 소용이요?”

16550945464854.jpg“공주님을 갖는데.”

1655094546486.jpg“……소용이 없을 것 같진 않아요. 점잖지 못한 사내를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리에네는 잠시 생각한 뒤에 말을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블랙의 말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16550945464854.jpg“공주님에게 다른 사내가 없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655094546486.jpg“…….”

16550945464854.jpg“공주님이 스스로 잊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오늘 보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생각을 바꿨습니다.”

약을 바르던 손이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잠옷 안에서 멍이 든 부위를 부드럽게 감싼 채 머물렀다.

1655094546486.jpg“저는……. ……말했듯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16550945464854.jpg“나도 말했습니다. 이젠 믿지 않는다고.”

1655094546486.jpg“그 사람에게는 한 번도…….”

애정을 품어 본 적 없어요. 연인이었지만 연인으로 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어요. 그 사람의 연인으로 살 때 나는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었어요. 그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리에네는 옛 연인의 아이를 가졌다고 알려진 상황이었다. 이제 와 라피트 클라인펠터를 좋아한 적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을 모면하기 위한 값싼 거짓말처럼 들릴 게 뻔했다.

1655094546486.jpg“……한 번도 제 처지에 대해 다른 말을 들려준 적 없습니다. 저는 로드 티와칸과 혼인할 것이고, 장차 제가 낳게 될 아이는 로드 티와칸이 친부가 되리라고 말해두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16550945464854.jpg“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과, 마음까지 전부 잘라내는 건 다른 얘기 같습니다. 공주님을 보면.”

1655094546486.jpg“…….”

블랙은 몸의 부정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리에네가 옛 연인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1655094546486.jpg“그건…… 애를…… 쓰겠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16550945464854.jpg“네. 애쓰세요, 더.”

살갗에 닿은 블랙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렇다고 아픈 부위를 거세게 움켜쥐는 건 아니었다. 그는 애태우듯이, 느릿느릿 살갗을 쓸었다.

16550945464854.jpg“내가 공주님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블랙의 고개가 이쪽으로 기울었다. 정수리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가 가까워졌다.

16550945464854.jpg“입 맞출 겁니다.”

그는 이제 입을 맞춰도 되냐고 묻지 않았다.

16550945464854.jpg“여기에.”

그가 다른 손으로 짚은 곳은 머리칼이 드리워진 뒷목이었다. 한 손으로는 맨살을 어루만지는 채, 그가 머리칼을 한쪽 어깨로 모았다. 둥글게 숙인 목덜미가 드러났다. 리에네는 제 뒷목이 얼마나 희고 가는지, 그래서 블랙에게는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1655094546486.jpg“…….”

입술보다 먼저 손가락이 닿았다. 솜털을 간질이는 작은 접촉에 리에네가 어깨를 잘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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