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불꽃 (4)2021.08.01.
다시 입술이 맞붙었다. 이번에는 더 성급하고 여유가 없는 느낌이었다. 거칠지는 않았지만 거셌다. 곧장 입안을 파고든 그는 여유를 잃고 젖은 살갗을 삼켜댔다. 몰아치는 듯한 키스는 머릿속을 현란하게 헝클어 놓았다. 생각이란 것들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오로지 감각만이 남았다. 손끝을 타고 오르는 감촉, 살갗에 눌리는 느낌, 코가 기억하는 살 내음, 입에 들러붙는 맛…… 이런 것들만이 지금 인지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정신없던 키스가 갑작스레 멎었다. 리에네가 의아하게 눈을 떴을 때, 블랙이 젖어서 번들대는 입술로 작게 속삭였다.
“누가 왔습니다.”
“네?”
그 말이 사실이었다. 탕탕.
“공주님. 일어나셨는지요.”
플램바드 부인이었다.
“아……. 이를 어쩜 좋아.”
두 뺨이 훅 달아올랐다. 리에네가 허둥대며 블랙의 가슴팍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어쩌죠?”
블랙은 잠시 리에네를 바라보다 턱을 한 번 끄덕였다. 뜨겁던 표정이 그새 적당히 식어 있었다.
“내가 숨으면 되겠습니까?”
“……네?”
“침대 밑은 무릴 것 같고…… 창틀에 매달려 있으면 되겠군요.”
“…….”
그 말에 불쾌한 기시감이 코끝을 스쳐 갔다. 얼마 전 이 방에서 창틀에 매달려 숨어 있어야 했던 사람은 라피트였다. 라피트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서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숨기며 리에네는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짓을 하는 불명예스러운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다.
“잠시만 시간을 버세요. 내가 숨을 때까지.”
블랙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그날 일을 꼬집기 위해 일부러 창틀이라는 말을 꺼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을 보면 적어도 그냥 해보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리에네의 체면을 위해 기꺼이 창틀에 매달릴 생각이었다.
“아뇨, 그러지 마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블랙과 지금 한 침대에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블랙은 공식적인 정혼자였고, 그가 라피트 클라인펠터와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를 숨기는 게 오히려 더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다.
“우리는 정혼한 사이잖아요. 제 정혼자가 시중드는 이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긴다는 건 경우에도 어긋날뿐더러 예법에도 맞지 않아요.”
“……오해를 살 텐데요. 내가 여기 얌전히 누워만 있었다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무슨 상관이겠어요. 며칠 뒤면 정식으로 부부가 될 건데.”
“…….”
리에네를 바라보던 블랙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건 불쾌하다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앗.”
갑자기 그가 제 몸을 꽉 안고 입술을 겹치는 바람에 말이 막혔다. 입안을 파고드는 키스는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탕…… 탕.
“공주님. 안에 안 계십니까?”
사정을 모르는 부인은 밖에서 서성대며 문을 열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고, 블랙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공주님?”
격정적으로 몰아치던 키스는 플램바드 부인이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보기 직전에서야 멈췄다.
“아……. 왜 이러…….”
“갑자기…….”
“갑자기?”
“너무 예뻐서.”
“……네?”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리에네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으려니 블랙이 벌어진 입술에 여유롭게 다시 입을 맞췄다. 쪽, 상냥한 소리를 남기는 버드 키스였다.
“문은 안 열어 줘도 됩니까?”
“아, 이제 열어야…….”
늦었다.
“공주님. 죄송한데 안에 계신지 봐야겠습니다. 소리는 들리는 것 같은데 왜 말이 없으신지…….”
덜컥! 침실 문이 열렸다.
“공주…… 공주님……? 공주님!”
방으로 들어선 부인은 문고리를 잡은 채 석상이 되었다. 안색이 하얗다 못해 회색이 되었다.
“어, 어쩌…… 어쩌다…… 어떻게?”
“좋은…… 크흠, 아침이에요. 플램바드 부인.”
그때처럼 모욕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부끄럽긴 했다. 리에네는 제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아 주는 블랙을 모른 척 밀어냈다.
“너무 놀랄 필요 없어요. 로드 티와칸께서 간밤에 이 방에서 주무셨어요. 제 정혼자는 저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 그렇…… 그런데 너무 가, 갑자기…….”
“부인.”
리에네가 엄한 목소리를 내자 플램바드 부인이 놀란 입을 다물었다. 엄하게 보이려고 했다지만 두 볼이 사과처럼 빨간 상태라 별 소용이 없긴 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어…… 아, 씻을 물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래 주면 좋겠네요.”
“네네, 공주님. 물론입니다. 물론이지요.”
부인은 여전히 정신없는 얼굴을 한 채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리에네가 살았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 크흠, 로드 티와칸도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나가 보라는 뜻의 정중한 표현이었다.
“그럴 마음이 영 안 드는데.”
“……뭐라고요?”
리에네가 너무 정색을 했던지 블랙이 짧게 웃었다.
“그렇긴 하지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잠깐이긴 했지만 블랙이 웃는 얼굴은 짙은 잔상을 남겼다. 저렇게 웃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계속 이 아침을 붙잡아 두고 싶어질 것 같……. ……아, 정말. 뭐라는 거야,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공주님.”
각자 침대에서 일어서던 중, 블랙이 리에네를 불렀다.
“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리에네를, 블랙이 재빨리 붙들어 입술을 찍었다. 이마와 콧등, 볼과 인중에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아침 식사를 같이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좋아요. 그런데 왜 자꾸 키스를……. ……이러니까 시간이 더 걸리잖아요.”
“잊지 말라고.”
블랙은 마지막으로 시선으로 입술을 훑은 뒤 리에네를 놓아주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
리에네는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침실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 마음이 호수가 된 것 같았다. 수상한 물결이 끝도 없이 술렁였다. 뭘 잊지 말라는 거야……. 그것까지 말해 줬으면 싶었다. 말을 안 해 주면 계속 그가 여기저기 부지런히도 찍어댄 입술의 감촉만 기억날 것 같아서. * * *
“공주님.”
욕실에 먼저 와 있던 플램바드 부인은 이제 놀란 기색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이리 서세요. 소매를 걷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부인. 씻는 건 저 혼자 할게요.”
플램바드 부인이 세수할 때 옷자락이 젖지 않도록 끝단을 야무지게 접어주었다. 하지만 리에네가 물그릇 앞에서 몸을 기울여도 밖으로 나갈 기세가 아니었다.
“외람되지만 공주님, 정말로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젯밤 저자와 정말로 동침을 하신 겁니까?”
“그…… 크흠, 꼭 보이는 대로는 아니…….”
“그러지 않으셨지요?”
“……그렇죠.”
사실 부인이라면 어떻게든 알 것 같았다. 눈치도 빠른 데다 제 일이라면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동침이라니,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공주님께서 충동적으로 그런 일을 하실 리는 없고요. 게다가 어제 벌어진 일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아니지요. 분명 클라인펠터 경이 저지른 일로 티와칸의 수장이 공주님을 오해해 화를 내고 있다지 않았습니까?”
“그랬어요.”
“그런 상황에서 어찌 동침이 가능하겠습니까. 화가 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자와 말이지요.”
“…….”
리에네의 표정이 묘해졌다. 블랙은 분명히 평소와는 달랐다. 대가를 치르라며 날을 세워 귀를 찌르던 음성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렇다고 무슨 짓을 하진 않았어.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부인. 그런 말은 삼가했으면 해요. 로드 티와칸은 이제…….”
플램바드 부인은 생각에 빠져 고개를 갸웃대느라 리에네의 말을 놓쳤다.
“하여간 그리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한 가지 너무 이상한 게 있지 않겠습니까? 분명 그런 크나큰 오해가 있었다는데, 어째 제 눈에는 공주님과 티와칸의 수장이 갓 맺어진 사랑앵무 한 쌍처럼 다정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
“공주님?”
리에네가 멈칫대자 플램바드 부인이 답을 재촉했다.
“그게…….”
그러게. 어쩌다 그렇게 됐지. 그 남자가 갑자기 약을 발라 주겠다고 했어. 나도 했던 일이니 거절할 생각은 말라면서. 그다음에는 키스를 하겠다고 했지. 눈을 감자 그가 뒷목에 입술을 대던 저릿한 감촉이 떠올랐다.
“공주님?”
“……아, 어떻게 된 건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내 방에서 자겠다고 했고…… 나는 이불을 가져다줬고, 그리고……. ……아침에는 귓불 아래 점을 찾아냈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키스를 했고…… 너무 예쁘다고 했어.
“그럼 제가 본 게 맞습니까? 그자에게 마음을 여신 겝니까?”
“그걸 모르겠어요…….”
그 모든 일이 그저 비처럼 내려와 강물처럼 흘러갔다. 블랙이 오해를 풀지 않은 건 확실했다. 믿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저는 오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블랙을 믿지 못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였고, 그에게 많은 거짓말을 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도 싫지 않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점을 찾아주는 눈길은 다정했고 손짓은 몸을 떨리게 했다. 왜 이런 상황에서 그런 기분은 도무지 사그라들 생각을 하지 않는 건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모르시겠다고요?”
“네…… 모르겠어요.”
잠시 리에네를 쳐다보던 플램바드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런 거라 들었습니다만…… 정말 그렇군요.”
“뭐가요?”
“남녀의 일 말입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벌어지고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지 않습니까.”
“그게…… 좀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플램바드 부인은 다르긴 뭐가 다르겠냐는 뜻으로 턱을 내저었다.
“공주님.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지만 이 말은 꼭 들어주세요. 아이를 가진 일 말입니다…… 어지간하면 아니라는 걸 알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가 정치에는 무지렁이여도 남녀의 일이라면 조금은 더 아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
부인의 말이 저를 위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다만 그럴 수 없을 뿐이었다. 아직은.
“못 해요.”
“공주님…… 혼인을 하시고 나면 그런 거짓말은 좋을 게 없습니다.”
“알아요, 그건. 나도 말하고 싶어요. 아이 같은 건 없다고.”
잊지 못하고 있는 다른 남자 같은 것도 없다고. 정말 오해라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는 것, 그 반의 반만큼도 그 사람을 생각한 적 없다고.
“……그런데 그 전에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내가 그걸 모르는 척할 수는 없어요.”
“대체 어떤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어쩌면 부인에게 말을 할 때인지도 몰랐다.
“로드 티와칸이 제게 청혼한 이유가 달리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혼인이 목적이 아니라 달리…… 끔찍한 이유가 있다고.”
“네에? 아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그걸 어찌 알고요?”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몰라요. 그런데 모른 척할 수가 없어요. 만에 하나라도 정말 그런 거라면 돌이킬 수가 없잖아요.”
“그게…… 네, 그렇지요.”
“웨로즈 경께서 그걸 알아보러 자리를 비웠어요. 그런데 혼인식 전까지 돌아올지 그걸 알 수가 없어요.”
“그럼 어째야 합니까. 혼인식을 미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어쩌면요.”
리에네가 플램바드 부인의 손을 쥐었다. 위험한 일을 부탁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웨로즈 경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누굽니까?”
“부인께서 그 사람을 만나 줄 수 있나요?”
저는 당분간 몸을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라피트가 갇혀 있는 지금 클라인펠터가 무슨 짓을 하려고 들지 몰랐고, 블랙은 저를 믿지 않는다고 했으니 누굴 만나려 했다간 괜한 의심을 더 얹게 될 것이다. 라피트에 대한 오해보다 이쪽이 더 위험한 비밀이었다.
“그러겠습니다, 공주님.”
리에네의 유모가 된 뒤로는 성 밖으로 몇 번 나가 본 적도 없는 부인이 입술을 꾹 물고 몇 차례나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누굴 만나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