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함정 (1)2021.08.04.
씻고, 옷을 입었다. 리에네는 평소에는 입지 않고 놓아두었던 라일락 빛깔의 드레스를 입었다. 얇고 하느작대는 천에 작은 자수들이 놓여 있어서 입으면 어딘가가 찢어질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실용성이 없는 옷들은 거의 다 팔았지만 이 옷은 남아 있었다. 플램바드 부인이 이 옷만은 놔두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고, 저도 라일락 빛깔이 제 얼굴에 썩 잘 받는다는 걸 알기에 조금은 아깝기도 했다.
“놔두길 백번 잘하셨습니다.”
부인은 드레스에 맞춰 머리를 틀어 올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암만요. 잘하셨지요. 어찌 일국의 공주 옷이 전부 다 질기고 튼튼한 것만 있답니까.”
“사실 필요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없긴 왜 없습니까. 오늘만 해도 이리 잘 입으시게 됐는데요.”
“그렇긴 하네요.”
평소와는 달리 손재주를 부려 머리칼을 말끔히 땋아 올린 플램바드 부인은 짙은 보라색 꽃을 뒷머리에 꽂아 주었다.
“아주 예쁘십니다. 제가 했지만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리에네가 쑥스러운 듯 작게 웃었다.
“감사해요.”
치장을 마친 리에네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부인이 고개를 털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럼 저는 보는 눈이 없는 사이에 신전 앞을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시중을 들어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공주님.”
“아니에요. 그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일을 해주는 거예요. 부디 무사히 다녀오도록 하세요.”
“예, 공주님.”
부인은 힘이 바짝 들어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용히 리에네의 방을 빠져 나갔다.
“나는 아직 시간이 조금 있네.”
준비를 서둘렀더니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로웠다.
“바느질이라도 하고 있을까. 부인이 아직 못 끝낸 게 있을 텐데.”
하지만 말만 그랬지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자꾸만 거울을 힐긋 힐긋 보게 되었다.
“진짜 잘 어울리나…….”
정면에서는 부인이 꽃을 어떻게 꽂아 놓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도 봤으면 좋겠는데.”
부인이 예쁘다고 했으니 예쁠 테지만 제 눈으로도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 남자도 예쁘다고 생각할까…….
-갑자기 너무 예뻐서.
키스를 여기저기 퍼부으며 하던 그 말이 불시에 떠오를 때면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아찔하기도 했고 발끝이 간지럽기도 했다. 옛 연인은 항상 말끝마다 아름답다는 칭찬을 했지만 그 말이 진심으로 와 닿은 적은 없었다. 연인의 외모에도 마찬가지였다. 라피트도 수려한 편이었지만 블랙을 볼 때처럼 시간을 잊고 쳐다보게 된 적은 없었다.
“……떨려.”
감고 있던 눈에 속눈썹이 떨려왔다. 리에네는 가슴께의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누군가를 만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바닥부터 떨린 적도 없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왜 그 남자한테만…….”
생각이 어딘가에 갇힌 것처럼 자꾸 블랙에 관한 것만 떠오르는 바람에 리에네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거울 앞에서 일어섰다.
“이러지 말자. 이러다 나 혼자 좋아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는 아직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사실 이미 벌써 좋아하게 된 시점일지도 몰랐지만 리에네는 애써 그 사실을 모른 척했다.
“뭔가 다른 일이라도 해야겠어. 식당에 먼저 가서 있는 건 좀 그러니까.”
부인이 두고 간 바느질감을 찾아올 생각에 리에네가 방을 나섰다. 플램바드 부인이 쓰는 방은 리에네가 지금 쓰는 침실과 약간 거리가 있었다. 리에네가 아이였을 때 쓰던 방과 맞붙어 있는 방이었다. 나가면서 보니 블랙의 방은 비어 있었다. 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아 그러지 않을까 싶긴 했다.
“지금 벌써 식당에 가 있는 건 아닐 테고.”
약속 시간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안 되게 남아 있었다.
“……뭐, 어디서 뭔가를 하고 있겠지.”
리에네는 부인의 방이 있는 동쪽 탑을 향해 걸었다.
“공주님!”
그 와중에 마실로우를 만난 것은 의외였다.
“마실로우 경……? 어쩐 일로 궁에 있는 건가요?”
마실로우가 집무실에서 멋대로 기사 서임장을 쓴 이래로, 리에네는 마실로우의 출입을 금지했다. 이제 마실로우는 리네에의 허락이 있거나 아니면 먼저 입궁을 요구했을 때만 통치자의 집무실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일이 많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클라인펠터 가의 기사 서임장도 그렇거니와 신전 계단 공사 대금도 말씀을 드려야 하고…….”
“그 대금은 티와칸의 이름으로 지불될 거예요. 기사 서임장은 지금으로서는 할 말이 없고요. 클라인펠터 가에서 먼저 대가를 제시하지 않는 이상 내가 해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 압니다. 하지만 채석장에 지불할 선금이라도 일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사가 지연되는 바람에 신전에서는 기도 대신 통곡 소리가 들려오는 판입니다. 참다 참다 못해 신전에서 제게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겠습니까.”
“저런. 그런 일이라면 내게 오지 않고 왜 경을 찾았을까요?”
“그렇잖아도 사제 한 분이 와 계십니다. 그밖에도 나눌 얘기가 아주 많습니다. 제가 오죽하면 이리도 이른 시간에 입궁을 했겠습니까.”
“그렇군요.”
시간이 애매했다. 그렇다고 식사를 이유로 정무를 미뤄 둘 성격은 못 되었다.
“그럼 짧게 하죠. 앞장서세요.”
리에네가 집무실 쪽을 손짓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마실로우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 * * 쾅!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문이 닫혔다. 리에네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문을 닫은 건 사제복을 입은 자였다.
“이게 무슨 짓이죠?”
리에네가 사제와 마실로우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마실로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중얼거렸다.
“어쩔 수……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주님.”
사제복을 입은 자는 사제가 아니었다.
“입 다물고 내 얘기나 들으세요, 공주님.”
그가 얼굴을 다 가리도록 푹 뒤집어썼던 후드를 벗었다. 이를 가는 목소리에서 리에네는 이미 그자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린든 클라인펠터였다. 그가 할 법한 짓이라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 클라인펠터 경. 하다 하다 이제는 신의 자식 흉내를 내다니요. 성문을 지키는 티와칸이 그렇게나 무서웠나요?”
“닥치라니까 귀가 막혔습니까?”
리에네의 빈정거림에 린든 클라인펠터가 윽박으로 맞섰다.
“아, 아니…… 경, 어떻게 그런…….”
린든 클라인펠터가 이렇게까지 굴 줄 몰랐던 마실로우가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저어댔다. 하지만 리에네나 린든 클라인펠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둘은 이미 바닥까지 치달은 상태였다. 예의를 따지느니 그 시간에 차라리 싸우고 말 사이가 되어 버렸다.
“내 귀는 멀쩡해요. 헛된 기대는 말고 나가기나 하세요. 아니면 내가 소리라도 지르길 바라나요?”
“이게 어디서……!”
린든 클라인펠터는 리에네를 한 대 치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협박에 불과했다. 차마 그 선까지 넘을 각오는 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물론 리에네도 가만히 있을 마음은 없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손을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잉크병으로 머리를 깨 줄 생각이었다.
“오늘 당장……! 라피트를 내보내는 겁니다. 알아들었습니까?”
“꿈 깨세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왜 안 되는데!”
“라피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거 아니에요. 대로 한복판에서 대낮에 나의 정혼자를 죽이려 했어요! 그걸 무시하라는 건가요? 대관절 무슨 수로?”
“무슨 짓을 했는지가 왜 중요합니까!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가 나우크에서 하지 못할 짓이 뭐가 있다고!”
리에네가 질렸다는 눈으로 린든 클라인펠터를 쳐다보았다. 저런 생각이었으니 이제껏 그 온갖 짓들을 저지르고도 태연했을 것이다.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요. 현재 나우크의 치안을 맡고 있는 자는 로드 티와칸입니다.”
“그자는 공주님이 치맛자락만 들추면 혀를 내미는 개가 됐다던데 어디서 되지도 않는 발뺌을 하고 있습니까.”
“입 다물어요!”
“크, 클라인펠터 경!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좀……!”
도를 넘어선 모욕이었다. 오죽했으면 마실로우가 놀라 클라인펠터에게 삿대질을 할 정도였다. 리에네는 새하얗게 질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시는 내게 그런 식의 말을 하지 마세요. 두 번은 용납하지 않겠어요.”
“용납하지 않으면?”
“클라인펠터의 장자가 반역을 저지르고도 목이 붙어 있는 이유를 그 무례하고 멍청한 머리통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그런 일이 이제 두 번은 없을 겁니다. 아르사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망할!”
린든 클라인펠터가 제 화를 이기지 못해 버럭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리에네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그도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티와칸의 수장이었다. 몸으로 사고를 겪은 그가 미친 짐승이 되어 라피트를 뒤쫓아 간 것을 본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라피트는 그 자리에서 사지가 찢겨 죽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여태껏 조카의 목이 붙어 있는 이유는, 인정하긴 싫었지만 리에네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쩌다 왕좌에 앉게 된 저 애송이가 그래도 뭔가를 하긴 했을 것이다. 조카가 저 반반한 얼굴에 홀려 정신을 못 차리더니, 티와칸의 짐승도 그 꼴이 난 듯했다.
“협상을 합시다.”
유감스럽게도 장자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선 리에네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돈으로 하지요. 공주님이 빌려 간 돈의 삼 할을 감해 줄 테니 책임지고 라피트를 풀어 주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알긴 뭘 알아. 목숨을 구걸하러 와서도 린든 클라인펠터는 고자세였다. 무례하기 이를 데 없이 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뺨이라도 갈기고 싶었다.
“장자의 목숨이 그렇게 값쌌나요? 삼 할밖에 안 되다니요.”
리에네는 충동을 참느라 떨리는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더 쓰세요.”
“뭐라는 건지. 공주님이 아무리 돈에 환장했다지만, 말을 그따위로 합니까?”
“경이야말로 구걸을 하러 왔으면 말이라도 공손하게 해야지 않나요?”
“건방진…….”
린든 클라인펠터가 이를 드러내고 그르렁 숨소리를 냈다. 리에네도 그에 맞서 눈빛을 갈았다.
“나를 백번 모욕해 봤자 소용없어요. 경은 명예나 예의범절 쪽으로는 아예 글러 먹은 것 같으니까 내가 포기하죠. 대신 계산은 제대로 하세요. 삼 할이 아니라 오 할이에요. 그리고 앞으로 삼 년간은 이자도 지불하지 않겠어요.”
“내게 강도질을 하겠다고?”
“강도질은 그간 클라인펠터 가에서 했죠. 그간 받아간 이자만 해도 그렇게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을 텐데 뭘 그리 아까워하시죠?”
까드득, 린든 클라인펠터가 이를 가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대신 지금 당장 풀어 주는 걸로.”
“아니요. 어림없어요. 채무 관련 증서부터 써서 가져와요.”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입니까?”
“천만에요. 구걸하러 온 주제에 제 처지를 파악 못 하는 걸로 보이긴 하지만.”
“…….”
린든 클라인펠터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마실로우가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리에네에게 반말지거리를 내뱉었다.
“가진 거라고는 맞지도 않는 왕관 하나뿐인 어린 게 감히 누구 앞에서 혀를 그렇게 놀리는 게냐.”
“혀를 잘못 놀리는 게 누구…… 흡!”
별안간 손을 뻗은 린든 클라인펠터가 리에네의 손목을 홱 꺾어 쥐었다. 마실로우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소심한 고문관은 대의장에 맞설 배짱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리에네가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린든 클라인펠터를 쏘아보았다.
“이거, 놔요.”
린든 클라인펠터도 그에 맞서 손목을 더 힘껏 비틀었다.
“몇 번을 말하지만, 너는 네 주제를 몰라. 네 애비가 도둑질해 간 왕관이 어쩌다 네 손에 쥐였다고 그게 뭐 대단해 보이는 줄 아는 게냐? 천만에. 너 하나 내가 이 자리에서 목을 비틀어 죽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리에네가 다른 손으로 린든 클라인펠터를 밀어내며 울컥 목소리를 높였다.
“노망이라도 들었나요? 해도 해도 정도가 있어! 당장 놓지 못해?”
린든 클라인펠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광견병에 걸린 들개처럼 잇몸을 드러내고 음산하게 말했다.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를 돌려보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니면 아르사크의 이름을 이 땅에서 지워 줄 테니. 클라인펠터에게는 그러고도 남을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