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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함정 (2) (37/145)

37. 함정 (2)2021.08.08.

린든 클라인펠터의 협박이 이어졌다.

16550946302383.jpg“장자를 돌려보내라. 지금 네 목이 부러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 하나야. 야만인을 구워삶아야 할 몸뚱이는 멀쩡해야 하니까.”

16550946302388.jpg“착각하지 말아요. 클라인펠터 가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시기는 끝났어. 그만 정신 차리고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를 맞이할 준비나 하세요.”

16550946302383.jpg“그 짐승들을 믿고 이리 까부는 모양인데, 너야말로 그 조막만 한 머리통으로 생각을 좀 해야 할 게다. 그가 하릴없이 네 편을 들어주러 나우크에 왔다고 생각하느냐?”

16550946302388.jpg“……?”

라피트에 이어 린든 클라인펠터까지 블랙에게 의도가 있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대체 저 인간들은 뭘 알고 있는데. 리에네가 일부러 더 냉정한 얼굴을 했다.

16550946302388.jpg“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16550946302383.jpg“그는 네 목을 따러 온 것이다. 혼인을 빌미 삼아 이 땅에 발을 들이는 게 목적이지. 너 같은 거야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치워 버릴 테지. 그 뻔한 것도 생각을 못 한 게냐?”

16550946302388.jpg“천만에. 말을 하면서도 말이 안 된다는 걸 모르나요? 티와칸의 수장이 나우크를 얻으려고 이 모든 짓을 하고 있다니, 개가 웃을 노릇이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도 빼앗을 수 있는 이 작은 곳을 탐내서 뭘 하겠다고.”

린든 클라인펠터가 아주 야릇한, 이상한 비웃음을 지었다.

16550946302383.jpg“아무것도 모르니 그렇게 제멋대로 생각할 수도 있나 보군. 그래서 네게 그 왕관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16550946302388.jpg“내가 뭘 모르고 있다는 거죠?”

리에네가 파고들자 린든 클라인펠터는 못 할 말을 했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16550946302383.jpg“뭐, 목을 따기 전에 재미라도 볼 모양이지. 네 몸뚱이가 짐승의 눈에는 봐줄 만할지도 모르지 않느냐. 게다가 이제껏 들인 돈도 있고.”

16550946302388.jpg“더러운 입 닥쳐요! 내가 뭘 모르는지나 말하…… 악!”

클라인펠터가 리에네의 손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꽉 쥐어짜는 통에 비명이 흘렀다. 말이 잠깐 끊긴 틈을 타 클라인펠터가 빠르게 저 할 말을 뱉어냈다.

16550946302383.jpg“나우크를 놈한테 통째로 떠먹이려는 게 아니라면 방법은 하나야. 라피트를 내보내. 그리고 놈을 죽여.”

16550946302388.jpg“무슨…… 절대 안…….”

16550946302383.jpg“방법이 정 없는 것도 아니잖아. 침대로 끌어들이기라도 해라. 방심하게 만든 다음 목을 찌르면 되겠지. 그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게 나우크에서 짐승들을 몰아낼 유일한 길이다.”

16550946302388.jpg“웃, 기지…… 마. 내가 왜 그 사람을…….”

16550946302383.jpg“이렇게까지 말을 해줘도 못 알아듣는 건가? 놈이 네 목을 따려 한다는 증거라도 보여 줘야 하느냐?”

16550946302388.jpg“……!”

리에네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16550946302388.jpg“증거가…… 있다고?”

  * * * 그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꼽자면 그것일지도 몰랐다. 블랙에 관한 진실. 그는 이 작은 땅에서 무얼 하려는 걸까. 그게 정말 복수인 걸까. 그 대상은 나우크의 왕족인 자신인 걸까. 알고 싶었다. 설령 그 답을 주는 자가 클라인펠터라고 해도.

16550946302388.jpg“그게…… 뭔데?”

그렇게나 간절히 알고 싶었다.

16550946302383.jpg“알고 싶은 게냐? 그렇다면 놈을 죽여.”

16550946302388.jpg“말도 안 되는 소리. 증거부터 보여 줘요. 정말로 그런 게 있다면.”

린든 클라인펠터가 비죽, 보기 흉한 웃음을 지었다.

16550946302383.jpg“이 와중에도 협상이라니. 그럴 여유가 없을 텐데. 알고 싶어서 몸이 단 건 너다.”

16550946302388.jpg“장자를 살려 달라고 온 건 어느 쪽이죠? 더 아쉬운 건 그쪽일 테니까 흥정할 생각 말고 내놓…….”

16550946302383.jpg“아, 저도 알고 싶습니다.”

갑자기 불쑥,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바람에 방 안의 전부가 얼어붙었다.

16550946302383.jpg“주군께서 뭘 어째요?”

페르모스였다. 바닥에서 들려온 이유는 그가 책상 밑에 숨어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숨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는 제 방에서 낮잠이라도 잔 사람처럼 태연하고 나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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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46302383.jpg“어째서 쥐새끼가!”

가장 놀란 건 뭐니 뭐니 해도 린든 클라인펠터였다. 그가 체면도 잊고 펄쩍 뛸 기세로 소리쳤다. 소리를 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당황한 게 분명했다.

16550946302383.jpg“거 참. 숨어 있던 건 피차일반이면서 왜 나한테만 쥐새끼라는 겁니까. 그러는 그쪽은 대체 뭐를 하려고.”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것 같아 리에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긴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왕족의 집무실이 쥐새끼 소굴도 아니고, 아무 인간들이나 멋대로 숨어들고 있었다. 물론 훔쳐 갈 것도, 딱히 숨기는 것도 없다지만 제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더욱더 아니었다.

16550946302388.jpg“페르모스 경. 내 책상 아래서 무얼 하고 있던 건가요? 나는 경에게 이 집무실 출입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16550946302383.jpg“아,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 달게 처벌을 받겠습니다.”

페르모스는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듯 침울한 얼굴을 했다. 그렇다고 우선순위를 잊은 건 아니었다.

16550946302383.jpg“그런데 지금 그 얘기는 좀 미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주군께서 왜 공주님의 목을…… 아, 이 표현은 차마 인용하기가 그렇군요. 제 입이 더러워지는 기분이라. 아무튼 주군께서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실 생각인지 너무 궁금해서 말입니다. 거기 있는 쥐새끼 양반은 입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대체 그 증거란 게 뭡니까?”

16550946302383.jpg“……닥쳐!”

미친 듯이 눈알을 굴리던 린든 클라인펠터가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페르모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페르모스를 죽여 입을 막는 게 최선이었다.

16550946302383.jpg“쯧. 공주님 말대로 무례하고 멍청한 인간일세. 누구한테 덤비는지는 알고 덤벼야지.”

안경을 끼고 똑똑해 보이는 참모 역할이었지만 페르모스도 십 년간 전쟁터를 구른 인간이었다. 그는 가볍게 몸을 피해 린든 클라인펠터의 발목을 걸었다. 퍼억! 쿵!

16550946302383.jpg“윽!”

린든 클라인펠터가 앞으로 넘어지며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뒷목을, 페르모스가 재빨리 밟았다.

16550946302383.jpg“윽, 으윽! 감히 무슨……! 저리 비켜!”

린든 클라인펠터가 양손을 버둥대며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페르모스가 여유 있게 서서 린든 클라인펠터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16550946302383.jpg“기회를 주지. 여기서 얌전히 입을 열면 네가 한 말 중 반만 주군께 전하겠다. 내 입이 같이 썩을 것 같은 더러운 말을 좀 순화시켜서 전달하겠다는 뜻이야. 장담하는데, 그것만 해도 꽤 괜찮은 거래야. 주군은 평소에 화를 잘 안 내시지만 한 번 내게 되면 아주 끔찍하거든.”

16550946302383.jpg“무슨…… 개소릴, 윽!”

16550946302383.jpg“말해 봐. 주군께서 뭘 하려고 하신다고?”

16550946302383.jpg“그거야 뻔, 하지 않느……, 그게 아니라면 하고 많은, 곳 중에…… 왜 이리 작은 곳, 을…… 큭!”

페르모스가 목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16550946302383.jpg“그게 아니잖아. 그렇게 두루뭉술한 낌새가 아니었는데. 증거가 있다지 않았어?”

16550946302383.jpg“그걸 네놈에게 말할 것 같…… 으윽!”

우드득. 페르모스의 발끝에서 듣기에도 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16550946302383.jpg“공주님! 무얼 하고 계십니까! 저걸 말리지 않으시고요!”

마실로우가 리에네의 소매를 붙들고 늘어졌다.

16550946302383.jpg“일개 용병이 감히 나우크의 대의장을 짓밟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무례를 어찌 가만 보고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말에 리에네도, 페르모스도 기가 차다는 얼굴이 됐다.

16550946302383.jpg“그러는 그쪽은 이 작자가 공주님 팔목을 비틀어도 가만히 있던데요. 그건 무례가 아니었습니까?”

16550946302383.jpg“그, 그건…….”

마실로우가 할 말을 잃고 주춤거렸다.

16550946302383.jpg“말리는 것도 그렇지. 사지 멀쩡한 사내인 그쪽은 뭘 하고 공주님 소맷부리에 매달립니까. 나잇살은 처먹을 대로 처먹고 그쪽보다 한참은 어린 공주님께 엄살이라니, 수치스럽지도 않습니까?”

16550946302383.jpg“수치라니. 감히…….”

마실로우가 얼굴을 빨갛게 달구고 숨을 씨근덕거렸다. 저 표정을 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나우크의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리에네에게 국정을 떠넘기고 살아왔을 것이다. 대의장이라는 클라인펠터부터 그랬을 게 뻔히 보였다. 리에네가 왕관을 물려받은 게 육 년 전이라고 들었다. 갓 성년이 된 어린 나이였다. 그 나이에 왕정을 떠맡았다면 책임과 희생을 잘 구분하지 못할 만도 했다. 대의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군주의 의무로 이해하고 마땅히 제 할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16550946302383.jpg“쯧. 하여간 그래서 말을 안 하겠다고?”

16550946302383.jpg“큭…… 끅!”

목을 너무 세게 밟힌 터라 린든 클라인펠터는 이제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16550946302383.jpg“그럼 말든가. 나는 경고했어, 분명히.”

페르모스가 발을 치웠다. 그리고 린든 클라인펠터의 목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갔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는 게 분명했다. 문을 열면 끝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은폐할 방법이 없었다.

16550946302383.jpg“공주님!”

다급해진 마실로우가 별수 없이 다시 리에네를 불렀다.

16550946302383.jpg“이러시면 안 됩니다! 왕실이 클라인펠터 가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어서 저자를 말리십시오! 어서!”

16550946302383.jpg“……나 참.”

페르모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는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리에네를 향해 물었다.

16550946302383.jpg“어떻게 할까요, 공주님? 저를 말리고 싶으십니까?”

16550946302388.jpg“…….”

물론 여기서 린든 클라인펠터를 모른 척해줄 마음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페르모스는 리에네가 결국 누구 편을 들 건지 알아야 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리에네에게 블랙을 죽이라는 말까지 해둔 상태였다. 리에네가 당장 대답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확인해야 했다.

16550946302388.jpg“……아니요.”

리에네는 숨을 한차례 고른 뒤 답을 했다.

16550946302388.jpg“말려도 의미가 있을 상황은 아니지요. 그리고 말릴 마음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페르모스가 알게 된 이상 이 일을 덮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리에네는 클라인펠터 가의 사고를 블랙에게 거짓말로 감추며 수습하는 데 환멸이 났다. 클라인펠터 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피트는 살아 있는 이상 계속 똑같은 사고를 칠 것이고, 린든 클라인펠터는 당연하다는 듯 리에네에게 사고를 무마시킬 것을 강요할 터였다. 언젠가 어디서는 끝을 맺어야 했다. 대의회 소속의 귀족들이 전부 반발한다 해도, 이번만큼은 감당해야 했다.

16550946302383.jpg“잘 생각하셨습니다.”

페르모스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실로우와 린든 클라인펠터가 번갈아 경악으로 입을 벌리는 것과는 몹시 대조적이었다.

16550946302383.jpg“그럼 이 작자는 끌고 가 가둬 놓겠습니다. 재판이 기대되는군요.”

쿵! 말을 마친 페르모스가 꽁꽁 닫아 두었던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16550946302383.jpg“어이, 거기! 이리 와 봐. 이놈 좀 끌고 가라. 아, 그리고 안에 한 놈 더 있으니까 그것도.”

안에 있는 한 놈이 저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마실로우는 안타깝게도 조금 늦게 알아들었다. * * * 티와칸의 일 처리는 몹시 신속했다. 마실로우와 클라인펠터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뒤 클라인펠터가 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눈감아 주었던 경비대원을 솎아냈다. 경비대 부대장이 펄쩍 뛰었지만, 페르모스는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블랙이 제안했던 아침 식사 시간이 훌쩍 넘어 버렸다.

16550946302388.jpg“……아무도 없네.”

리에네가 도착했을 땐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채 식어 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블랙이 식당에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의자 하나가 뒤로 젖혀진 채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저를 기다리고 있던 블랙은, 보고를 받고 식당을 떠난 모양이었다. 리에네는 블랙이 앉아 있었던 자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블랙이 다시 올 거라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일이 터졌으니 할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었다. 단지 리에네는 그와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기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

16550946302388.jpg“옷을 갈아입을 걸 그랬다.”

식탁 위에 곱게 접힌 냅킨을 펼쳐 무릎 위에 올려놓던 리에네가 중얼거렸다. 일부러 곱게 차려입은 라일락빛 드레스의 소매 끝으로 검붉은 손자국이 찍힌 손목이 드러났다.

16550946302388.jpg“보기 흉하게.”

손목을 슬쩍 건드려 보던 리에네가 인상을 썼다. 흉한 게 다가 아니라 아프기도 했다. 조금씩 부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16550946302388.jpg“설마 심하게 다친 건 아니겠지.”

리에네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가장 가까이에 있던 꿩 구이를 잘랐다.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일단 움직일 수는 있었다.

16550946302388.jpg“……괜찮아. 이 정도는.”

입맛은 전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요리는 훌륭했다. 티와칸에 솜씨 좋은 요리사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요리를 마주하는 건 정말로 간만이었다. ……아깝네. 식사에 초대한 블랙이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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