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알게 될수록2021.08.11.
린든 클라인펠터가 아니었다면 꽤 좋은 시간이 됐을지도 몰랐다. 음식은 맛있었을 테고, 아끼던 드레스를 차려입은 저는 보기 좋았을 것이다. 블랙은 이번에도 너무 예쁘다는 말을 했을지 몰랐다. ……그래, 정말 좋았을 거야. 구이를 작게 잘라 입에 한 점 넣은 리에네가 음식을 씹었다. 분명 훌륭한 요리일 텐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좋을 수가 없나 봐. 그 남자하고 나는. 이렇게나 얽혀 있는 게 많아서. 맛이 느껴지지 않는 걸 지나 차츰 써지는 듯했다.
“…….”
더는 못 먹겠다. 억지로 입에 넣고 씹던 요리를 삼킨 리에네가 달칵, 포크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쿵!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며 성급한 발걸음이 들어섰다. 블랙이었다.
“……? 어떻게 오셨……어요?”
그가 올 줄 몰랐던 리에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블랙이 이쪽으로 다가와 리에네가 앉아 있는 의자를 홱 돌려세웠다. 동작이 거칠었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네?”
그래서 그가 오늘 일을 전해 듣고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 블랙은 리에네가 또다시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일에 관여했으며, 그의 석방을 놓고 클라인펠터 가와 흥정을 벌였고, 무려 그의 죽음을 사주받았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고 해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관계는, 좋을 수가 없겠다고. 두 번 다시 믿을 수가 없겠노라고.
“왜 여기 있냐고 물었습니다. 왜 하필 여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게…….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어요.”
아마도 이런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식사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습니까?”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무섭기만 합니까?”
벌써 몇 번은 들어본 말이었다. 블랙은 전혀 같지 않은 상황에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제는 그 질문에 다른 뜻이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왜 여기 와 있습니까. 약속을 안 지키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지키고 싶었으니까 지킨 거예요. 그렇다고 로드 티와칸께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길 기대하진 않았어요. 그냥 저 혼자라도 있고 싶었던 거예요.”
“왜 여깁니까?”
그 말이 더 이상했다.
“그럼 제가 여기 말고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요?”
“그러니까 이런 데가 아니라…….”
블랙이 말을 끊고는 불쑥, 리에네의 팔을 잡았다.
“누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네? 왜요?”
“다쳤으니까.”
손목에 손가락 모양의 멍이 또렷이 올라오긴 했다. 붓기도 했다.
“별거 아니에요.”
“안 아픕니까?”
“아프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
블랙이 멍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바람에 입술이 멎었다. 블랙이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픕니다.”
“…….”
이 정도면 아픈 게 맞다는 뜻일 텐데, 주어를 빼자 누가 아픈지 모르는 말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누워 있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잖아요.”
“손목만 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음……. 다른 데도 다쳤냐고 묻는 거라면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공주님이 혼자서 겪기엔 험한 일이었습니다.”
“괜찮…….”
“멀쩡한 얼굴로 약속이니 뭐니 할 게 아닙니다.”
“…….”
그래서 할 말을 잃었다. 목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기분이라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지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한 가지만 알았다. 블랙이 지금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 그 하나만을.
“……지, 않으세요?”
리에네가 입을 열었다. 덩어리가 섞인 목소리는 매끄럽지 못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이상하지, 않냐고요.”
“뭐가 말입니까?”
“로드 티와칸이 저를 걱정하는 게. 저는 그 걱정이 반갑다는 게.”
“……그게 왜 이상합니까?”
리에네는 뭉쳐서 단단해진 감정의 덩어리를 애써 삼킨 뒤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으셨잖아요. 방금 전 왕실 집무실에 누가 숨어 있었는지. 저는 로드 티와칸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거면 됐다는 식의 말은 정답이 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잖아요. 로드 티와칸께서는 나우크를 갖게 되면 저를 죽일 계획이라면서요.”
“그 얘기는 나도 듣고 어이가 없었는데.”
“아니라는 뜻인가요?”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나우크를 가지려 들었다면 청혼보다 빠른 방법이 많았을 겁니다.”
“그럼 복수는요?”
“복수라고 했습니까?”
“로드 티와칸은 복수를 하려는 중이라고 들었어요. 나우크의 누군가가 로드 티와칸의 혈육을 죽였다고.”
“…….”
그 말에 블랙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걸 보는데 제 마음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구나. 그게 사실이었나 봐.
“그러니까, 이상해요. 이런 건.”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도 않는 말을 내뱉은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밀어냈다.
“놓으세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블랙은 밀려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나한테는.”
“……어째서요.”
그는 여전히 리에네의 손목을 조심스레 쥔 채로, 다른 손을 뻗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 손짓 또한 나비처럼 조심스러웠다.
“공주님이 한 말은 전부 다른 인간 입에서 나왔고, 나는 다른 인간한테는 관심이 없으니까.”
“…….”
“빚이 많습니까?”
“……? …….”
“빚 때문에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기도 했습니까?”
“…….”
리에네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표정에서 답이 전부 드러났다.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래됐습니까?”
“……그만 하세요. 이런 질문은.”
일국의 통치자가 빚을 핑계 삼는 건 너무 구차하게 들릴 것이다. 게다가 리에네는 그가 자신의 가난을 아는 게 싫었다. 눈치야 진작 챘겠지만, 그래도 눈앞에 드러내는 것과는 달랐다. 고개를 돌리려는 리에네의 뺨을, 블랙이 붙들었다. 그는 어젯밤과 또 달랐다. 다정하지만 강압적이었던 느낌이 달라졌다. 뺨을 쥐는 손은 단단했지만 강제하는 게 아니라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답해요.”
“……싫어요.”
“왜 싫습니까?”
……부끄러워서. 내가 그렇게나 한심하고 나약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으니까.
“대답하지 않겠어요. 로드 티와칸이야말로 복수를 하려는 게 맞냐는 제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블랙은 어째서인지 엄지로 뺨을 쓸며 피식, 싱겁게 웃었다.
“그런 얘길 어디서 들었습니까?”
“웃지 마세요……. 대륙에는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우크를 빼고 모두가 알고 있다고.”
“희한한 일인데. 나도 모르는 걸 누가 안다는 겁니까?”
“……모른다고요?”
“혈육이 죽은 건 맞습니다.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런데…….”
피붙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하는 표정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복수를 하려고 칼을 갈아 온 사람이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때 어린애였고, 혈육의 죽음에 분노를 품긴 했지만 자라면서 잊어버렸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공주님께 청혼한 이유는 그때 말했던 대로 다른 자에게 빼앗기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담백한 답이 오히려 리에네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럼 복수는…… 그저 소문인가요?”
“그런 소문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아니, 그리고 말이 안 되잖아요. 로드 티와칸은 이제껏 저와 아무런 인연도 없었는데 왜 빼앗긴다는 말을 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게…… 아니라고요?”
“혈육을 잃기 전까지 나는 여기서 살았습니다. 공주님은 나를 모를 수 있어도 나는 아닙니다.”
“어, 어떻게…… 그럴 수 있…….”
뭔가 다 너무 이상해.
“오래 전이라면…… 그게 언제였나요?”
“한 이십 년 정도.”
“이십 년?”
기억이 없을 만도 했다. 그때 리에네는 겨우 대여섯 살이나 됐을 것이다.
“제가 그때 로드 티와칸을 알고 있었던가요?”
“아마 아닐 겁니다. 그러기엔 너무 어렸을 것 같은데요.”
“그럼 로드 티와칸은 저를 어떻게 아셨고요?”
“이름 정도만 알았습니다.”
“네?”
“선친이 정혼을 원했습니다. 아르사크 가문과.”
“아…….”
리에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조금도 몰랐던 일이었다. 나우크의 선왕이었던 부친은 어린 시절의 정혼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정식으로 정혼을 했던……가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면 뭐든 증표가 남아 있을 테니까.”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왜 처음부터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왜 중요하지 않은데요. 그래서 제게 청혼한 거잖아요.”
“어릴 때 말만 오갔던 정혼입니다. 선친 혼자만의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고. 기억하는 사람도 나 하나입니다.”
그러니 말한들 믿지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연인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청혼한다는 남자가 있으면 리에네가 먼저 웃어넘기거나, 아니면 불쾌한 농지거리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도 하셨어야 해요.”
하지만 그건 블랙이 아니었을 때 얘기였다. 리에네가 손을 뻗어 블랙의 옷자락을 꾹 붙들었다.
“그랬다면 내가…….”
이제껏 의심하고 흔들리고 가슴 졸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에게는 자신에게 청혼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제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공주님이.”
진작 말을 해줬으면. 매번 힘든 거짓말을 지어내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듣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솔직했을 텐데.
“내가…… 좀 더 빨리…….”
거기까지가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리에네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블랙은 억지로 채근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뺨을 문지르는 손길은 내내 다정하다 못해 제 몸이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공주님은 나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군요. 나우크를 빼앗으려고 청혼했고, 언젠가는 공주님을 죽일 생각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복수까지 하려 했다고.”
“……꼭 그렇다고 믿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혼인을 미룰 마음은 없었고, 그 전에 먼저 나를 죽일 생각도 없었고요.”
“믿은 건 아니라고 했는데…….”
“다쳤다고 옷을 벗겨서 닦아 주고, 옆에서 잔다니까 내쫓는 게 아니라 이불을 꺼내 덮어 주고요.”
“그건 정혼을…… 했으니까…….”
다정하던 손짓이 멎었다. 블랙은 몸을 숙여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눈을 감지 않는 이상 시선을 돌릴 수도 없는, 그런 거리였다.
“내가 좋습니까? 조금이라도.”
불쑥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리에네가 눈을 크게 뜨고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조금이라도 상관없으니 좋은 구석이 있는 것 같으면 그렇다고 해요.”
“…….”
“고개만 끄덕여도 됩니다.”
“…….”
리에네는 너무 맑고 시린 물 같은 블랙의 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블랙은 리에네가 고개를 위아래로 한 번 작게 끄덕이는 동안 한 차례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모두 지켜보았다.
“그렇다는 걸로 알겠습니다.”
담백하게 흘러나오는 말과는 달리, 블랙은 입술을 양 끝으로 늘여 웃고 있었다.
“나중에 다른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겁니다.”
“…….”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리에네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말을 대신하듯, 블랙의 옷자락을 쥔 손에만 계속 힘이 들어갔다. 그랬다면 내가 좀 더 빨리 좋아했을 거예요. 리에네가 하지 못한 말은 그것이었다. * * *
“괜찮다니까요.”
리에네는 떠밀리듯 침대에 누웠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침대에 눕는 일은 처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손목에 멍이 든 거라고요. 고작 그거예요.”
리에네는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블랙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리에네를 지켜보았다. 리에네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그도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말 별일 아니었다니까요. 클라인펠터야 원래 그런…….”
“이전에도 종종 그랬다는 말입니까?”
블랙이 리에네의 말을 가로챘다.
“인성이 그렇…….”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익숙해서 괜찮다고.”
“그게…….”
굳이 말을 하자면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