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시작 (39/145)

39. 시작2021.08.15.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게 맞았다. 페르모스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이른 것도 있었지만, 블랙은 집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험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리에네가 왕관을 물려받은 건 열아홉, 갓 성인이 됐을 때였다. 클라인펠터를 비롯한 귀족 원로라는 것들에게 열아홉 살짜리 공주님은 만만한 먹잇감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 잇속만 챙기려 드는 들개 같은 것들에게 매번 등쌀을 치이며 이 망해 가는 왕국을 기워 왔을 것이다. 연약해 보이는 어깨가 사실은 단단했던 건 그래서였다. 늘 젖어 있는 것 같은 눈이 사실은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이 없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걸 이해하는 순간 제 마음속의 어딘가가 툭, 터져 버렸다. 그 틈으로 리에네 아르사크라는 여자가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들어 왔다. 라피트 클라인펠터는 끝난 일이었다. 리에네는 영리했다. 아마도 클라인펠터 가문과 혼인으로 맺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계산을 마쳤을 것이다. 마음을 줬든, 아이를 가졌든 간에 리에네는 절대 그자와 맺어질 의지가 없었다. 그러니 그것으로 된 일이었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리에네 아르사크의 정혼자는 자신이었다. 블랙은 리에네의 이마를 슬쩍 눌러 베개에 완전히 눕도록 만들었다.

16550946743924.jpg“공주님은 괜찮다 해도 아이는 아닐 겁니다.”

1655094674393.jpg“아이요? 아이가 갑자기 왜……. ……아.”

리에네가 당황한 듯 표정을 굳혔다.

16550946743924.jpg“조심해서 나쁠 것 없으니 지금은 잠시 쉬어요. 안색이 별롭니다.”

그 말에 눈동자가 바쁘게 흔들렸다. 저도 그랬지만 리에네도 아이를 가졌다는 자각이 너무 없었다. 아직은 몸이 크게 불편할 시기가 아니라 그럴까 싶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시간 내내 리에네는 저와 함께할 것이다. 아이의 친부가 다른 남자라는 사실 따위는 앞으로도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16550946743924.jpg“궁 안에 의사가 없다고 했습니까?”

1655094674393.jpg“없어요. 자주 필요한 사람은 아니라서.”

주치의가 없는 왕족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블랙은 할 말을 참기 위해 괜히 리에네의 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약하게 깨물었다.

1655094674393.jpg“엇……. ……왜 그러세요?”

16550946743924.jpg“아팠습니까?”

1655094674393.jpg“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이유가 궁금해서요.”

사실 이유란 없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리에네를 보면 자꾸 닿아 있고 싶어졌다. 입술이든 손이든 상관없었다. 그 모든 순간마다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건 너무 복잡한 일이었다.

16550946743924.jpg“예뻐서.”

1655094674393.jpg“……네?”

그래서 그렇게 표현하기로 했다. 리에네는 매 순간마다 예뻤으니 아마 정답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16550946743924.jpg“그럼 페르모스를 부르겠습니다.”

1655094674393.jpg“아니요. 누가 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의사였나요?”

16550946743924.jpg“의학 지식이 많아 어지간한 의사보다 낫습니다.”

1655094674393.jpg“그랬, 어요?”

16550946743924.jpg“잠깐 이대로 있어요. 빨리 오겠습니다.”

1655094674393.jpg“아뇨, 그러지 마세요.”

막 몸을 일으키려는 블랙을 리에네가 서둘러 붙들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도 블랙은 감정이 복잡해졌다. 안도감과 충족감, 그보다 과격한 어떤 욕구가 동시에 치솟아 어지럽게 섞여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선명한 것을 고르자면 힘껏 붙들어 안고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었다.

1655094674393.jpg“그, 페르모스 경은…… 의사와 비슷하다고 해도 남자고…… 불편해서요.”

당황하는 얼굴을 보면 다른 이유가 더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캐물어서 난처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난처한 일이 늘수록 리에네가 저에게 마음을 여는 속도도 늦춰질 것이다.

16550946743924.jpg“아이를 가진 걸 확인해 준 의사는 남자가 아니었습니까?”

1655094674393.jpg“의사…… 크흠, 의사는 남자지만 평소에는 부인이 돌봐주는 편이라서요.”

16550946743924.jpg“그럼 부인을 불러오겠습니다.”

1655094674393.jpg“부인은 지금 성에 없어요.”

16550946743924.jpg“언제 돌아옵니까?”

1655094674393.jpg“그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요. 오늘 중으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고요.”

16550946743924.jpg“불러오면 안 되는 일입니까?”

1655094674393.jpg“그게…….”

이마를 찡그리고 잠깐 고민하던 리에네가 곧 무슨 결심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네가 제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들겨 다시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얘기가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신호였다.

1655094674393.jpg“제가 일을 하나 부탁했어요.”

16550946743924.jpg“멀리 간 겁니까?”

1655094674393.jpg“아뇨. 그런 건 아니고……, 꼭 알아야 할 일이 있어서 나 대신 누구를 만나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필요가 없어진 일인 것 같아요.”

16550946743924.jpg“왜 필요가 없어졌는지 말하고 싶은 겁니까?”

1655094674393.jpg“네. 이젠 숨기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까.”

블랙은 리에네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조금 더 느슨해지고 개운해 보였다.

1655094674393.jpg“일전에 거리에서 로드 티와칸을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 * * 신전 앞에서 거지 노인을 만난 얘기를 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보낸 뒤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워졌다.

1655094674393.jpg“……얘기를 들으려던 참에 로드 티와칸이 마중을 오셨던 거예요. 그때는 그 사람의 정체가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을 하지 않았어요.”

제 표정이 지금 좀 웃길 것 같긴 했다. 이제껏 속여 왔다는 얘기를 하면서 입가는 내내 웃는 것처럼 실룩대고 있을 테니까.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건 입꼬리도 가벼워진다는 말 같았다.

1655094674393.jpg“그 노인도 어디선가 소문을 들었던 걸까요? ……어쩌면 로드 티와칸을 기억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에 나우크에서 살았을 때 본 적이 있었다든지.”

16550946743924.jpg“그건 아닐 겁니다.”

블랙도 입가가 움직이는 걸 알았는지 괜히 손을 뻗어 입술 끝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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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사소한 일들이 그와 저를 진짜 약혼이라는 틀에 묶고 있는 것 같았다.

16550946743924.jpg“내 얼굴이 이십 년 전하고 똑같지는 않을 거라.”

1655094674393.jpg“그럴까요?”

16550946743924.jpg“그때는 어렸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1655094674393.jpg“음…… 아닐지도 몰라요. 저라면 기억을 했을 거예요.”

리에네는 머릿속으로 블랙의 어린 모습을 그려 보았다. 생김새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다 해도, 하나는 반드시 알아볼 것 같았다.

1655094674393.jpg“눈 색깔은 변하지 않으니까.”

16550946743924.jpg“특이한 눈이라고 해도 저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닙니다.”

1655094674393.jpg“그럴까요…….”

이제껏 리에네는 블랙처럼 옅은 눈동자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직 나우크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1655094674393.jpg“하여간 부인은 그만 돌아오라고 해야겠어요. 괜한 일로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16550946743924.jpg“그쪽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1655094674393.jpg“감사해요.”

리에네가 눈을 살짝 접어 웃으며 말하자 블랙이 불쑥 고개를 기울였다.

16550946743924.jpg“그래도 부인이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페르모스가 와 있는 게 좋겠습니다.”

문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리에네는 수상할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블랙을 마주하며 당황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1655094674393.jpg“아니, 정말…… 진짜 괜찮아요. 의사는 필요 없어요.”

16550946743924.jpg“정말입니까?”

진짜 의사가 오면 그때부터 큰일이 생길 터였다. 그것도 말을 해야 할 텐데. 임신이 아니라는 거. 그런데 그건…… 조금만 있다가. 이랬다가는 끝도 없이 내가 한 거짓말을 자백하는 자리가 될 것 같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나중에.

1655094674393.jpg“네. 로드 티와칸께서 괜히…… 크흠, 괜한 걱정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평소와 똑같아요.”

16550946743924.jpg“그렇지 않습니다. 똑같다고 하지 말아요.”

블랙은 보란 듯 멍 자국이 나 있는 리에네의 손목을 제 손 위에 올렸다.

1655094674393.jpg“……그것만 빼고요.”

16550946743924.jpg“그럼 문제가 없다고 믿겠습니다. 그러니 키스해도 됩니까?”

1655094674393.jpg“네? 갑자기요?”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는 리에네를 보며 블랙이 중얼거렸다.

16550946743924.jpg“갑작스럽습니까? 내게는 아닌데.”

1655094674393.jpg“……방금 전까지 환자 취급을 하셨잖아요.”

16550946743924.jpg“환자니까 묻는 겁니다.”

1655094674393.jpg“…….”

16550946743924.jpg“아픈 사람을 내 욕심만으로 더 힘들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건 그가 리에네를 몹시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었다.

1655094674393.jpg“저는…… 그래도 묻지 않으셨으면 해요.”

리에네가 잠깐 침을 삼켰다. 이제 이런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블랙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았으니까.

16550946743924.jpg“싫습니까?”

아니요.

1655094674393.jpg“네.”

리에네는 답을 듣는 순간 그대로 굳어 버리는 블랙의 입가를 손끝으로 살짝 더듬었다.

1655094674393.jpg“할 때마다 일일이 물어보는 건, 이제 싫어요.”

16550946743924.jpg“…….”

블랙이 눈만 움직여 제 입술에 닿은 리에네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입 안이 말랐다.

16550946743924.jpg“……지금 그 말은 실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 블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의 움직임이 손끝에 전해졌다.

1655094674393.jpg“아닐 것…… 같은데요.”

16550946743924.jpg“나중에 다른 말을 해도 안 들을 겁니다.”

1655094674393.jpg“그래도 실수라고 하지는 않겠어요.”

16550946743924.jpg“그렇다면.”

갑자기 다가온 입술이 리에네의 아랫입술을 벌렸다. 블랙의 윗입술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껏 겪은 적이 없던 새로운 감각에 몸이 들썩였다. ……실수가 맞을지도. 이 남자는, 키스를 너무 잘해. 아침처럼 격렬하진 않았지만 지금의 키스는 집요했다. 구석구석 파고들어 질리도록 맛을 보게 했다. 두 팔이 저도 모르게 블랙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블랙이 허리를 당겨 몸을 바싹 맞붙게 했을 땐 금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1655094674393.jpg“…….”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블랙은 리에네의 등을 한 손으로 받치고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리에네가 침대에 눕고, 블랙이 그 위에서 리에네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16550946743924.jpg“좋군요. 지금 이 얼굴.”

블랙의 엄지가 젖은 입술을 문질렀다. 그 감촉도 색다른 키스 같았다. 리에네가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감았다.

1655094674393.jpg“이 자세에서는…… 보통은 못나 보이지 않나요.”

16550946743924.jpg“공주님은 거울이 없는 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 같습니다.”

혹시 궁에 거울이 많이 없는 걸 지적하나 싶어 괜히 민망했다. 크고 화려해서 값이 되는 거울은 부지런히 팔아 버렸으니까.

1655094674393.jpg“그게…… 무슨 뜻인가요?”

16550946743924.jpg“자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1655094674393.jpg“그럼 그건…….”

예쁘다는 말일까. 이 남자 눈에 내가 아주 좋게 보인다는 뜻일까. 내 눈에 이 남자가 그러는 것처럼.

16550946743924.jpg“시간이 흐르지 않는 방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공주님을 가둬 두고 단둘이 있게.”

블랙이 천천히 엄지를 떼어냈다. 가두겠다는 섬뜩한 말이 그가 불같아진 눈으로 느리게 내뱉으면 조금 다르게 들렸다. 피부 위로 뜨거운 바람이 스쳐 가는 것 같았다.

1655094674393.jpg“그런 곳은 없겠지만…… 찾으면 알려드릴게요.”

블랙이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나직하게 웃었다.

16550946743924.jpg“방심을 못 하겠습니다.”

1655094674393.jpg“뭐를요…….”

16550946743924.jpg“공주님이라는 사람.”

그가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곧장 닿는 위치였다. 리에네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실수가 맞았어. 그들은 이미 시간이 흐르지 않는 방에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여기인지 저기인지 하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아냐, 실수가 아니야. 그리고 리에네는 자신이 그런 방을 아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수로 들어왔지만, 실수를 해서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실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16550946743924.jpg“나는 여기서 멈출 자신이 없는데…….”

블랙이 입술로 입술을 문지르다 멈추고 낮게 속삭였다.

16550946743924.jpg“이것도,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숨이 쿡 조여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똑똑, 더없이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16550946855492.jpg“접니다, 주군. ……그리고 공주님.”

페르모스였다.

16550946855492.jpg“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 *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멈출 자신이 없다는 블랙의 말이 너무 강렬했다. 리에네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때마침 문을 두드린 페르모스를 변명거리로 삼았다. 좀 전에 그를 부를 필요가 없다고 한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1655094674393.jpg“그렇지 않아도 물어볼 게 많던 참이었어요. 클라인펠터 경은 어떻게 되었나요?”

블랙을 말리기 위해 방으로 들였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은 나우크에 있어서 정말로 큰 사건이었다. 감옥에 가뒀다고 다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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