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단서2021.08.18.
페르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말씀드린 대로…….”
“아니, 그 전에 물어야겠네요. 얼굴은 어쩌다 그렇게 되셨어요?”
페르모스가 답을 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리에네는 깜짝 놀랐다.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린든 클라인펠터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집무실을 나설 때만 해도 멀쩡했던 얼굴이었다.
“설마 맞으셨어요? 누구한테요?”
“아, 이건…….”
페르모스가 힐긋 블랙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이 정도에서 끝난 데 감사하고 있습니다.”
범인은 블랙이라는 걸 몰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에네가 놀라서 블랙의 팔을 잡았다.
“때리셨어요? 왜요?”
블랙이 페르모스를 노려보았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가 답을 머뭇대는 사이 페르모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는 그래도 쌉니다. 그자를 제때 말리지 않았으니까요. 그 덕에 공주님 손목에 멍이 들었으니 다 제 탓입니다.”
“…….”
리에네가 이마를 찡그리며 블랙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때리실 건 없잖아요. 그건 음……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페르모스가 늑장을 부렸던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고, 리에네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허락도 없이 집무실에 드나든 걸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리에네가 린든 클라인펠터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들어볼 생각이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일 클라인펠터 가에 협박을 당하는 게 아니라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도 때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블랙이 평소처럼 감정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어쩐지 조금 겸연쩍어하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럼요?”
“…….”
블랙의 침묵에는 얘기를 듣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한 대 후려치고 난 뒤였다는 해명이 들어 있었다. 곤란해하는 블랙을 신기한 듯 입을 벌리고 쳐다보던 페르모스가 수습에 나섰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잘못입니다. 이 정도만 해주신 것에 무척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말리는 녀석들이 고생한 탓도 있지만…… 아, 불평하는 건 아니고요.”
“후우…….”
한숨을 내쉰 리에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티와칸의 군율을 제가 재단할 수는 없으니까 이쯤 하겠습니다. 하지만 페르모스 경이 왕실 집무실을 허락도 없이 출입한 일은 이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추후 합당한 벌을 내리겠어요.”
“아, 그렇지요. 겸허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집무실에서는 무얼 하고 있었나요?”
“그게 음…… 왕실 기록서 중에서 뭔가 찾아볼 게 있었습니다. 주군께서 맡기신 일을 처리하려다 보면 나우크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어서요. 일일이 공주님께 여쭙기도 그렇고 해서.”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집무실에서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는 왕실 인장밖에 없었다. 그건 린든 클라인펠터라면 몰라도 페르모스가 탐을 낼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 것으로 알지요. 다음부터는 미리 허락을 청하길 바랍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어떻게 되었나요?”
내내 양심이 따끔대던 표정을 짓던 페르모스는 화제가 바뀐 데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생아와 한 방에 집어넣었습니다. 무슨 귀족 나리가 그렇게 팔팔한지 감옥이 꽤 오래 시끄러웠습니다.”
“짐작이 어렵진 않군요. 얌전히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니까. ……다른 클라인펠터는요?”
“아직까진 얌전합니다. 혹시 나이든 쪽이 떠들어댄 그 증거라는 걸 알까 싶어 떠봤는데 모르는 눈치였고요.”
“그렇군요.”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증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공주님을 현혹할 가짜 미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건 제 생각도 같아요. 증거가 정말 있었다면 이제껏 얌전히 움켜쥐고 있진 않았을 테죠.”
“맞습니다. 그런 게 있다면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었을 테지요. 정혼이 무효라고 주장해도 됐을 테고.”
“맞는 얘기예요.”
잠깐 얘기를 나눈 것으로 리에네는 꽤나 놀랐다. 페르모스가 영리하리라는 짐작은 했었지만, 그 이상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나우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린든 클라인펠터의 성향을 꿰뚫은 듯했다.
“허나 믿는 구석은 확실히 있어 보였습니다. 자꾸 리세베리 조약을 얘기하던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네. 유감스럽게도.”
“유감이라니. 안 좋게 들리는데요.”
“선왕 시절 나우크의 대의회 원로 및 고문들과 맺은 화평 조약입니다. 지금 클라인펠터가 누리는 권리의 대부분이 그 조약에 기인한 것이고요.”
“화평 조약이라……. 내란이라도 있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가뭄이 너무 오래 갔고, 책임질 사람은 왕 하나니까요.”
페르모스가 혀를 찼다.
“그저 안 좋은 정도가 아니군요.”
리에네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맺어진 화평 조약은 말이 화평이지 사실은 왕실의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계속되는 가뭄에 선왕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물리려 했다. 그에 반발한 귀족들이 클라인펠터 가문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면서 반역 직전까지 갔고, 버틸 수가 없었던 선왕은 왕실의 재갈이나 다름없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그 조약에 의거해 대의장을 처벌하려면 대의회 재판에서 만장일치의 판결이 나야 한다고 지껄이던데 그것도 사실입니까?”
“유감스럽지만, 네. 그것도 사실입니다.”
“대의회 소속의 귀족들을 싹 다 밟아 죽이든지, 아니면 조약 자체를 없애는 수밖에 없겠군요.”
“조약을 없애는 데 동의할 귀족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 그럼 죽이는 게 나을까요?”
말이 안 되는 얘기라 농담으로 여긴 리에네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우크는 반 토막이 날 거예요.”
“그 정도 숫자는 아닐…… 아, 이런. 나우크는 가문 간의 유대가 끈끈한 곳이었지. 귀족 집에서 부리는 일꾼들의 충성심까지 고려를 해야 되겠군요. 그 일꾼들에게는 가족과 친지들이 있을 테고.”
“맞습니다.”
페르모스는 조금도 농담이 아니었다는 듯, 끄응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가 이렇게 복잡한 일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전쟁이 낫지.”
페르모스가 중얼중얼 푸념을 잇는데, 블랙이 한마디 내뱉었다.
“적당히.”
“……엇, 네.”
그러자 페르모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대의회 재판은 해봤자겠습니다. 조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그건 리에네도 오래 생각을 했던 일이었다. 다만 리에네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신전입니다.”
“신전이라고요?”
“네. 신전에는 모든 재판의 판결을 뒤엎을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신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곳이니까요.”
“아하.”
“그런데 문제는 리세베리 조약에서 대의장에게 차기 대사제를 지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점이에요. 그 이후로 대사제는 클라인펠터의 사람이 되었어요.”
“아.”
페르모스의 외알 안경이 반짝였다.
“대사제는 지금 공석 아닙니까? 차기 대사제가 정해졌습니까?”
“아직이요.”
차분한 눈가에 설핏 그늘이 생겨났다.
“일부러 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혼인식을 미루게 할 작정이었으니.”
“으음……. 그럼 설마 대사제도 그래서 죽였을까요?”
“아마도.”
“하! 정작 왕은 따로 있는데 대의장 나리께서 부지런히도 폭군 노릇을 해왔군요.”
“…….”
리에네가 쓴 것을 삼켰을 때처럼 입술을 비틀었다. 선왕이 서명한 조약은 왕실을 좀먹는 거대한 좀벌레였다. 빠르고 무절제하게 이 작은 왕국과 왕실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걸 매일 뻔히 보면서도 리에네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나약함이었다. 그걸 블랙 앞에서 낱낱이 들춰내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고 괴로웠다.
“그럼 재판을 미루고 그것부터 해결해.”
다시 블랙이 끼어들었다.
“범인을 찾아서 대의장이 시킨 짓이라는 것을 밝혀내. 사제들이 멍청한 게 아니라면 어느 쪽이 살길인지 스스로 알아채겠지.”
페르모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끙…… 그게 생각보다 어려워서 말입니다. 수사에 별반 진척이 없습니다. 사제들이나 부제들이나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데다 일과도 제멋대로여서…… 하여간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얼마나?”
블랙이 슬쩍 말꼬리를 올리자 페르모스가 주춤 어깨를 젖히며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게…… 아직은 잘…….”
“잘?”
“모르…… 아니, 아닙니다, 주군. 어떻게든 찾아내겠습니다. 사실 단서가 딱 하나 있었는데 확인할 방법이 좀 난처해서 미루고 있었습니다. 공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써먹어 보겠습니다.”
“그게 뭔가요?”
페르모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에네가 물었다. 본인은 모를 테지만 목소리에는 흥분이 잔뜩 묻어 있었다.
“공주님.”
블랙이 리에네를 불렀다.
“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그는 리에네의 손목을 쥐어 들어올렸다.
“이러면 또 상처가 납니다.”
“……?”
리에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고 있던 중이었다. 블랙은 리에네가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제 손바닥에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나는 공주님의 몸에 내가 만들지 않은 상처는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
페르모스가 말없이 입을 딱 벌렸다. 약간 놀란 것은 리에네도 마찬가지였다.
“제게 상처를 입히실 건가요?”
연인이 연인에게 내는 상처는 종류가 다양했고, 블랙이 말하는 건 문자 그대로 상처가 아니라 농밀한 애무를 비유하는 말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리에네의 표정을 보면, 그런 쪽으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뻔했다. 인간 사이의 애정에는 일말의 흥미도 없다는 페르모스조차 알아들은 말을 리에네는 몰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겁니까?”
“그런 것 같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농담일 텐데 로드 티와칸의 표정은 조금도 농담을 하는 사람 같지 않거든요.”
“……제가 또 방심했습니다.”
블랙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픈 상처를 만들겠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리라는 건 알고 있어요. 저를 많이 아끼신다는 것도요. 오해하지 않아요.”
“…….”
페르모스는 차마 블랙이 그 말을 들으며 지을 표정을 지켜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럼 이제 제가 뭘 허락해야 하는지 말해 주세요.”
페르모스가 블랙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발견한 단서는 핏자국입니다. 피가 떨어진 양을 봐서는 상처가 아주 작지는 않을 테고요.”
“피요?”
“네. 그런데 대사제의 시체를 살폈을 때는 피가 나올 만한 상흔이 없었습니다.”
“그럼…….”
“범인이 흘린 피 같습니다. 범인에게 상처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정황상 범인은 신전에 소속된 인물일 테고요.”
“그렇겠군요.”
“그래서 허락해 주신다면, 사제복을 벗겨 보겠습니다. 몸에 덜 아문 상처가 난 자라면 그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단서가 그것밖에 없습니다.”
“사제복을 벗겨서 한 사람씩 확인해 봐야 되는 거로군요. 쉽지 않겠네요.”
“그렇죠. 고리타분한 작자들이 고분고분하게 옷을 벗을지는 잘 모르는 일이라.”
블랙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럼 벗게 만들어.”
“그…… 물론입니다. 힘으로든 협박으로든 벗기면 되긴 하는데…… 그런데 신전이잖습니까. 제가 독단적으로 하면 자칫 모양새가 험악해질 수도 있는 일이라 미리 공주님께 여쭙고 싶었습니다. 허락하시는 겁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대사제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일인데 껄끄럽다 해도 해야죠. 그럼……. 아, 혹시?”
문득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두꺼운 사제복 아래 배어나오던 피. 맞아도 가만히 있던,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는 신의 자식. 종제 클리마였다.
“어제 피를 흘리던 종제가 하나 있었어요.”
“네?”
페르모스가 반색을 했다. 아무래도 사제들의 옷을 벗겨 본다는 게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게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