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여섯 가문의 조약2021.08.22.
“공주님 덕에 일이 쉽게 풀리겠습니다. 시커먼 사제들 옷자락을 들출 생각을 하면…… 어우, 입맛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는데.”
일단 실마리 하나를 찾았으니 신속히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리에네는 대의회를 소집할 준비를 시작했고, 블랙은 페르모스와 함께 신전에 가기로 했다. 서둘러 신전으로 갈 인원이 꾸려졌다.
“아, 저기 말이 오는군요.”
마사 앞마당으로 용병들이 페르모스가 탈 말을 끌고 왔다.
“음? 그런데 말이 하나 같습니다?”
블랙이 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페르모스는 아랫것들이 갑자기 귀가 멀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 혼자 가. 나는 볼일이 있다.”
“저런? 설마 공주님께 돌아가서 아까 못 다한…… 하시게요?”
페르모스가 경악에 차서 물었다가 블랙의 표정을 보고는 급히 정색을 했다.
“실언했습니다, 주군.”
눈을 한 번 두륵 굴린 페르모스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공주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침에 충격을 받으셨을 텐데요.”
“본인은 괜찮다지만 지켜볼 생각이다.”
“그게 좋을 겁니다. 눈에 보이는 증세는 없어도 초반에는 별게 다 위험한 법이라……. 아, 그런데.”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페르모스가 짓궂게 웃었다.
“공주님은 음, 뭐랄까…… 너무 순진한 게 아닙니까? 그쪽으로는 말하는 게 스물다섯이 아니라 열여덟 살 같던데요. 주군은 괜찮으신 겁니까?”
“……골라.”
“네?”
“이번에는 어딜 맞을 건지.”
“……헛! 제가 또 실언했습니다, 주군.”
짓궂은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블랙은 제 여자를 두고 남들이 그 어떤 말을 해도 용납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는 공주님을 입에 올릴 땐 몇 배로 숙고하겠습…… 히익!”
잔뜩 주눅이 든 페르모스가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블랙이 뒷목을 홱 잡아당기는 바람에 비명을 터트렸다.
“수선 피울 것 없어.”
블랙이 페르모스의 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신전 인근에 몸이 성치 않은 노인이 있을 것이다. 네가 먼저 찾아. 아무도 모르게.”
“……. 아무도 모르게라면…….”
“공주가 유모를 보냈다.”
“그 사람보다 먼저 찾으라는 말씀이겠군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페르모스가 물었다.
“이유가 뭔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나를 알아본 건지도 몰라.”
“네? 주군을요? 그럼…….”
영리한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갔다. 그 한마디에서 페르모스는 제법 많은 사실을 유추해 냈다. 블랙의 과거를 아는 자가 남아 있었다. 리에네 공주가 그자의 존재를 알아서 사람을 보냈다. 블랙은 중간에 그 사람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블랙은 리에네 공주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채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쩌길 원하십니까? 입을 막을까요?”
“……아직은. 일단 숨겨 둬.”
“알겠습니다.”
블랙이 페르모스를 놓아주었다. 페르모스가 얼얼해진 목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블랙이 눈짓 한 번 없이 휙 돌아서서 가버렸다. 페르모스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군께서 원래 저렇게 뒤끝이 있는 성격이셨나…….”
하여간 앞으로는 말조심을 해야 했다. 잠시 후 페르모스는 용병 다섯과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 * * 철벅, 철벅. 지하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달랐다. 바닥에 웅크린 습기가 발바닥에 들러붙어 괜히 더 음산하고 무거운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헛, 오셨습니까!”
지하 감옥을 지키는 자들은 모두 티와칸으로 교체되었다. 나우크의 기존 경비대는 원래 하던 일에서 점차 배제되는 중이었다. 웨로즈의 부재는 오히려 이러한 변화를 쉽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혼자 지하 감옥을 찾은 블랙을 발견한 용병이 빠르게 등을 폈다.
“오신다는 전갈을 못 받았습니다. 시찰이라도 오신 겁니까?”
“조용히.”
블랙은 자신의 등장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빠르게 눈치를 챈 용병이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들어온 자를 보여드릴까요?”
블랙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쪽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지하 감옥만큼은 쓸 만하다는 게 티와칸의 평이었다. 지금이야 가둬 놓은 인물도 얼마 없다지만, 이렇게 대규모의 감옥이 몇 겹이나 되는 보안성을 가지게끔 설계가 되어 있다는 건 한때 왕실이 누렸을 권력을 상징했다.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만, 부관께서 편히 두지 말라셔서 묶어 놨습니다.”
“잘했군.”
“감사합니다.”
뜻밖에 칭찬을 받은 용병이 히죽 웃었다. 밖에서 잠그게끔 되어 있는 문을 두 개나 지나 죄수들을 가둬 놓은 방이 드러났다.
“한 방에 넣어 뒀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감시하는 중이고요.”
“이제껏 나온 얘기는 없었고?”
“네. 부관께서 떠나신 뒤로는 달리 말이 없습니다. 아, 여깁니다.”
철컹! 용병이 문을 열었다. 블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지막한 나무 의자에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두 명의 클라인펠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문 닫고, 나가.”
등 뒤로 조용히 문이 닫혔다. 그것으로 아무도 블랙을 방해하지 않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티와칸의 용병들은 필요하다면 블랙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없는 일로 여길 것이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새파란 눈으로 블랙을 노려보았다.
“날 어쩔 셈이냐.”
“글쎄…….”
블랙의 느릿한 말투는 적들에게는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들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나를 건드릴 수는 없다. 나우크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행여 내 목이 잘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시끄럽군.”
퍽! 블랙은 린든 클라인펠터가 앉아 있는 의자 다리를 걷어찼다. 쿵!
“윽!”
린든 클라인펠터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블랙은 그가 오만상을 쓰며 버둥대는 꼴을 무감하게 지켜보다 물었다.
“넌 무얼 알고 있나.”
“무슨…… 소리를, 밑도 끝도 없이……. ……억!”
블랙이 발로 린든 클라인펠터를 뒤엎었다. 등 뒤로 묶인 손이 드러나자 그가 손목을 우둑 밟았다.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었다. 무게를 전부 실어 밟았으니 손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조용히.”
손목을 밟았던 발이 이번에는 뒤통수를 밟았다. 얼굴이 바닥에 짓이겨지자 질겁한 린든 클라인펠터가 비명을 끅끅 눌러 담았다.
“무슨 짓이야! 그만둬!”
내내 가만히 있던 라피트가 소리쳤다. 몸을 묶은 의자를 질질 끌어 이쪽으로 오려고 했다.
“움직이지 마라.”
블랙은 라피트를 말리는 대신 뒤통수를 밟은 발에 보란 듯 힘을 주었다.
“입은 두 개야.”
“…….”
라피트가 하얗게 질려 동작을 멈추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블랙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발을 약간 들어 올렸다.
“다시 묻지. 리에네 공주가 모르고 있는 게 뭔가.”
“나를, 그, ……끅…….”
“내가 나우크를 원하는 이유가 뭐라고?”
“그, 누가 봐도…… 당연할, ……끄윽!”
“생각해 보고 다시 말해. 목뼈를 부러트리는 건 어렵지 않아.”
“헉……!”
린든 클라인펠터가 숨을 훅 들이켰다. 블랙이 지금 하는 게 그저 협박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가늠해 보느라 머리가 미친 듯이 굴러갔다. 배짱을 부리기에는 입이 두 개라는 말이 걸렸다. 제 목을 밟아 부러트려도 또 입을 열 사람이 있으니 괜찮다는 말로 들렸다.
“장…… 저 애는 아무것도…… 큭, 모른다.”
그러니 저를 죽여서는 얻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건 역으로 린든 클라인펠터는 뭔가를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셈이었다. 그게 블랙이 원하던 바였다.
“그럼 네가 말하면 되겠군.”
“그, 그게…….”
이제야 실수를 깨달은 린든 클라인펠터가 눈알을 두르륵 굴렸다. 하지만 어차피 늦은 일이었다.
“말은 할 수 있게끔 목을 부러트리는 방법도 있다.”
“……리에네는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어.”
체념처럼, 린든 클라인펠터가 중얼거렸다.
“계속해.”
“제 아비가 어떻게 왕이 됐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소리다. 리세베리 조약이 어떻게 맺어졌는지.”
“그래서.”
“아르사크 가문이 왕족 노릇을 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클라인펠터였어! 이제 와 그 은혜를 모른 체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커억!”
또다시 뒤통수가 밟힌 클라인펠터가 강제로 입을 다물었다.
“은혜라고.”
블랙의 입술이 비꼬듯 비틀어졌다.
“그런 것치곤 공주의 인생이 딱히 영화로운 것도 아니던데.”
“시답잖은 가문의 맏딸로 태어나 적당히 몸값을 맞춰 팔려 가기나 했을 인생이 공주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게 영화가 아니면 뭐란 말…… 윽!”
블랙이 기다렸다는 듯 뒤통수를 걷어찼다.
“말버릇을 고쳐. 예의를 갖춰라. 네 군주에게.”
“반…… 반드시…….”
린든 클라인펠터가 화를 이기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단가? 공주가 모르고 있는 건?”
“……그렇다.”
“거짓말을 하는군.”
블랙은 장난처럼 린든 클라인펠터의 뒤통수를 툭툭 찼다.
“그것만으로는 내가 공주의 목을 따야 하는 이유가 안 되잖나. 내가 그런 짓을 해서 나우크를 얻어야 하는 이유가 뭔데?”
“…….”
“대답해.”
린든 클라인펠터가 잇새로 욕설을 토해냈다.
“빌어먹을……! 그건 네놈이 알겠지! 지금 네놈이 하고 있는 짓을 왜 내게 묻느냐!”
“나는 청혼을 했을 뿐인데, 그게 아니라고 하는 건 너니까.”
“웃기지 마라……. 청혼을 했을 뿐이라고? 그게 무슨 개도 안 믿을 소리야! 당연히 노리는 게 있으니 이러고 있겠지!”
“그러니까 내가 노리는 게 뭐냐고.”
“그야 나우크를…….”
“나우크에 뭐가 있는데?”
“……그야 만만한 곳이니. 전쟁터를 뒹굴던 야인이 왕족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으려고.”
잠깐이긴 했지만 블랙은 클라인펠터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공주를 죽이면 그게 안 되겠지.”
“그, 그러니까 혼인을 해서 통치권을 얻은 다음에…….”
“아르사크의 통치권은 아르사크로 이어진다던데. 내가 공주를 죽이면 아르사크의 피를 조금이라도 잇는 자가 왕이 되어야지. 내가 되는 게 아니라. 네가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너 같은 야만인이 왕가의 규칙을 따를 리가. 제멋대로 해버리면 그만이지.”
“감출 셈인가?”
“…….”
린든 클라인펠터는 대답 대신 침을 삼켰다. 입을 열게 만들려면 자존심을 걷어차는 게 아니라 더 정교하고 잔악한 고문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됐어.”
그쯤에서 블랙이 발을 뗐다.
“알아야 할 건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하지.”
“……?”
오히려 린든 클라인펠터가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블랙은 말한 대로 선뜻 몸을 돌렸다.
“……이런.”
그러다 잠시 멈춰 섰다.
“왼쪽이었군.”
작은 혼잣말이었지만 린든 클라인펠터는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뭐가 왼쪽이라는…….”
블랙이 몸을 숙여 린든 클라인펠터를 묶은 밧줄을 풀었다. 그걸 친절이라고 해석할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방금 전 왼손이 부러진 린든 클라인펠터라면.
“왜 이러는 거야! 내 몸에 손대지 말…… 으아악!”
예상했던 대로 블랙은 린든 클라인펠터의 오른 손목을 홱 비틀었다. 린든 클라인펠터의 손자국이 남은 리에네의 손목도 오른쪽이었다.
“으아악! 아악!”
고통으로 체면도 잊고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지르는 린든 클라인펠터에게 경고가 내려앉았다.
“리에네 공주는 앞으로 티와칸이 싸우는 유일한 이유가 될 것이다. 알아둬라.”
“웃기지…… 웃기지 마라!”
린든 클라인펠터가 눈물 콧물을 쥐어짜는 중에도 외쳤다.
“공주는 임신을…… 다른 남자의 애를 가졌다잖아! 그런 여자를 얻기 위해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그걸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게야!”
블랙의 시선이 입을 꾹 다무는 라피트를 한 번 훑었다.
“그건 너희들이 알 것 없고.”
“……!”
“그리고 내 아이다. 혹시라도 다른 얘기가 들려오면 너희 혀가 문제일 테니 두 개 다 뽑아 주지.”
“…….”
쾅! 섬뜩한 경고를 남긴 블랙이 문을 닫고 감옥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