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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먹이와 독 (42/145)

42. 먹이와 독2021.08.25.

16550947839507.jpg“크윽…….”

고통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양 손목이 부러진 린든 클라인펠터는 엎드린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저 끙끙거렸다.

16550947839513.jpg“많이 괴로우십니까?”

라피트가 어떻게든 다가가려 애를 쓰며 말을 붙였다.

16550947839513.jpg“어서 치료를 받아야 할 텐데…….”

16550947839507.jpg“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저 짐승들이 그런 짓을 해줄 리가 없잖느냐!”

린든 클라인펠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엉뚱한 화풀이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짓을 당하고 있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조카한테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16550947839507.jpg“너는…… 하, 됐다.”

장자는 유약했다. 선대 가주이자 친부였던, 린든 클라인펠터에게는 큰형이 죽으며 홀로 남은 어린 아들을 다들 오냐오냐 키운 탓일 것이다. 이전에는 그래도 얼굴은 곱상해 됐다고 여겼다. 뭐가 됐든 아르사크의 딸을 녹여 통치권을 얻어 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 통치권이 엉뚱한 짐승의 손에 떨어질 지경이 된 지금에서는, 새삼 땅을 칠 만큼 후회가 일었다.

16550947839513.jpg“뭐가 됐습니까?”

라피트가 지지 않고 맞섰다.

16550947839507.jpg“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다.”

16550947839513.jpg“뭘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까. 숙부님의 손을요?”

16550947839507.jpg“……! 이 멍청한 놈! 목소리를 낮춰!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16550947839513.jpg“놈은 내가 누군지 이미 다 알고 있을 겁니다.”

16550947839507.jpg“그래도 안 돼! 놈이 나서서 밝히지 않는 이상 비밀은 지켜야지!”

16550947839513.jpg“무엇을 위해서요?”

16550947839507.jpg“뭐라고?”

16550947839513.jpg“무엇을 위해 그래야 합니까? 이제 와, 무엇 때문에요?”

16550947839507.jpg“그게 무슨…….”

16550947839513.jpg“클라인펠터는 이제 끝이 아닙니까? 아직도 지킬 게 남아 있습니까?”

16550947839507.jpg“이, 이 한심한 놈!”

린든 클라인펠터가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부러진 손목으로 바닥을 짚다가 도로 쓰러졌다. 좌절감에 휩싸인 라피트는 숙부가 그러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16550947839507.jpg“그럴 리…… 그럴 리 없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함부로 포기하지도 마. 클라인펠터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해!”

16550947839513.jpg“이제 그 이름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16550947839507.jpg“누가 그러는데!”

울컥 소리를 내지르던 린든 클라인펠터는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밖에는 티와칸이 이쪽을 향해 귀를 들이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친절하게도 조카와 한 방에 넣어 둘 리 없었으니까.

16550947839507.jpg“다른 가문들이 두고 볼 리 없다. 곧 대의회가 열릴 것이다. 거기서 아르사크의 편을 들 인간은 아무도 없다.”

16550947839513.jpg“티와칸이 그렇게 만들 겁니다. 클라인펠터 가가 두려워 협력하던 것들이니 티와칸이라면 넙죽 엎드리겠지요.”

16550947839507.jpg“그럴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지.”

16550947839513.jpg“여기서 뭘 하시겠다는 겁니까?”

16550947839507.jpg“뭐든!”

린든 클라인펠터가 이를 갈았다.

16550947839507.jpg“그래…… 문제는 티와칸이야. 그년이 무슨 재주로 저렇게 짐승을 길들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린든 클라인펠터가 눈을 크게 떴다.

16550947839507.jpg“갈라놔야겠어.”

16550947839513.jpg“네, 숙부님?”

속삭이듯 작은 소리라 라피트는 그가 한 말을 듣지 못했다.

16550947839507.jpg“둘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순한 개가 된 놈을 다시 짐승으로 돌려놔야 해.”

16550947839513.jpg“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 갇혀 있는 몸으로.”

16550947839507.jpg“할 수 있다. 해야 해.”

일단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린든 클라인펠터는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리세베리 조약은 절대적이었다. 리세베리 조약을 만든 여섯 개의 가문은 나우크의 기둥이자 지붕이었다. 리에네가 나우크의 통치자로 남고 싶으면 결코 그 여섯 가문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르사크 가문의 비밀을 숨겨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피로 얼룩진 과거를.

16550947839507.jpg“대의회가 소집되기만 하면 여기를 나갈 것이다. 그때까지 마음을 굳게 먹고 있어야 해. 알겠느냐?”

16550947839513.jpg“…….”

라피트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지 답하지 않았다.

16550947839507.jpg“쯧.”

린든 클라인펠터가 혀를 찼다. 애초에 리에네는 클라인펠터라는 이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단지 지금은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지 모를 짐승 하나가 끼어들어 판을 망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짐승을 쫓아내야 했다. 힘으로 쫓아내기란 불가능했으니, 짐승이 알아서 떠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자면…….

16550947839507.jpg“……먹이에 독을 뿌려야지.”

짐승의 눈에 리에네 아르사크가 아주 달콤한 먹잇감으로 보인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리에네를 망치면 될 일이었다. 린든 클라인펠터의 눈알이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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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47905961.jpg“잘 오셨어요, 알란드 경.”

대의회 소집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실로우의 부재가 큰 몫을 했다. 자잘한 서류 업무는 오랫동안 마실로우의 몫이었는데, 그는 지금 지하 감옥 신세였다. 당장 일손이 아쉬워도 리에네 역시 고문관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실로우가 그렇게까지 클라인펠터 가의 편인 줄 모르고 있었던 게 한심할 뿐이었다. 이제라도 왕실에서 클라인펠터의 그림자를 하나씩 지워 나갈 생각이었다.

16550947839507.jpg“불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알란드는 대의회에 소속되지 않은 가문이었다. 그만큼 세력도 약하고 인원도 많지 않았다. 그런 자가 왕실 고문관을 맡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리에네는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더는 클라인펠터라는 이름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16550947905961.jpg“지금 왕실 고문관 자리에 일시적으로 공백이 생겼습니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아직 일러 줄 수 없고, 경이 당분간 그 공백을 메워 주었으면 합니다.”

16550947839507.jpg“영광입니다, 공주님.”

리에네가 싱긋 웃었다. 저를 아르사크의 딸이라 부르지 않는 귀족은 간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제 처지가 슬프기도 했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16550947905961.jpg“선뜻 군주의 뜻을 받든 그대에게 신의 축복을. 그럼 할 일을 알려주겠어요. 나우크의 통치자로서 대의회를 소집할 생각입니다. 경이 그 일을 맡아 하세요.”

16550947839507.jpg“대의회……라고요?”

알란드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가난한 왕국의 소귀족은 차림새뿐 아니라 태도조차 소박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이제껏 리에네가 상대하던 귀족들과는 딴판이었다.

16550947839507.jpg“그건…… 14년 전에 마지막으로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 뒤로는 한 번도 소집된 적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14년 전의 대의회에서 리세베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다시 말해 대의회가 새로이 소집된다는 건 그때만큼이나 커다란 격동을 의미했다.

16550947905961.jpg“네. 안건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사제의 선출이고, 다른 하나는 재판이에요. 재판을 받는 이는 대의장 린든 클라인펠터고요.”

16550947839507.jpg“네?”

대의회라는 말보다 린든 클라인펠터의 재판이라는 말이 알란드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16550947839507.jpg“대, 대의장의 재판을……?”

16550947905961.jpg“죄목은 왕족 상해입니다. 여섯 가문에 보낼 공문에 들어갈 내용은 그것으로 족합니다. 날짜는 최대한 서두르는 것으로 하고요.”

16550947839507.jpg“왕족 상해…… 아, 알겠습니다.”

리에네의 입에서 한마디씩 말이 나올 때마다 알란드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얘기가 다 끝나고 나자 소매를 끌어내려 식은땀을 닦아냈다.

16550947905961.jpg“먼저 필요한 경비부터 계산해 주면 좋겠군요. 왕실 집무실을 쓰도록 하세요. 출입을 허가합니다.”

16550947839507.jpg“영광입니다.”

애써 정신을 수습한 알란드가 무릎을 굽혀 절을 한 뒤 물러났다. 자잘한 일을 맡겼으니 리에네는 다른 준비를 해야 했다. 일단 새로운 대사제를 물색해야 했다.

16550947905961.jpg“대의회에 맡겨 두었다간 또다시 클라인펠터 가의 심부름꾼이나 뽑아 놓을 거야. 미리 골라 둬야 해.”

알란드를 맞이하기 위해 간만에 회당에 나왔다. 제 몸에는 터무니없이 커다란 왕좌에 앉아 있던 리에네가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턱을 괴었다.

16550947905961.jpg“안타깝게도 사제들에 대해서는 별반 아는 게 없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네.”

생각에 골몰하는 미간에 살짝 주름이 생겨났다.

16550947905961.jpg“지금이라도 신전에 갈까. 아직 그 남자도 있을 텐데. 가서 만나도 좋을…….”

16550947951629.jpg“왜 좋을 것 같습니까?”

갑자기 질문이 들려오는 바람에 리에네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16550947905961.jpg“……엇!”

그러다 턱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어느샌가 왕좌 뒤로 블랙이 다가와 있었다.

16550947905961.jpg“왜……!”

리에네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외마디 소리만 냈다.

16550947951629.jpg“신전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블랙은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리에네의 뺨을 쓰다듬었다.

16550947905961.jpg“왜…… 왜요?”

16550947951629.jpg“볼일이 생각나서.”

16550947905961.jpg“볼일? 저한테요?”

16550947951629.jpg“아니요. 지하에.”

16550947905961.jpg“지하…… 아, 클라인펠터한테요.”

리에네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드리워졌다.

16550947905961.jpg“무슨…… 볼일이셨어요?”

16550947951629.jpg“이걸 갚아 주러 갔습니다.”

16550947905961.jpg“네?”

리에네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블랙이 제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16550947951629.jpg“그 정도는 해야 될 것 같아서. 정혼자로서.”

16550947905961.jpg“그래서…… 멍이 들게 했다고요?”

16550947951629.jpg“그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뼈대가 약하더군요. 부러졌습니다.”

16550947905961.jpg“저런…….”

당황해 입술을 달싹이던 리에네가 곧 실없이 피식 웃어 버렸다.

16550947905961.jpg“그 인간이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일이었겠어요. 어떻게 반응했을지 상상이 가네요.”

16550947951629.jpg“나무라지 않는 겁니까?”

16550947905961.jpg“자기 뼈가 약한 걸 어쩌겠어요.”

블랙이 오른손의 멍 자국에 입술을 댔다. 짜릿한 감각이 손목에서 번져 왔다. 큰일이다 싶었다. 이젠 멍을 보면 아프단 생각이 아니라 다른 걸 떠올리게 생겼다.

16550947951629.jpg“그럼 하나 더. 사실 실수를 좀 했습니다.”

16550947905961.jpg“로드 티와칸께서 실수를요? 안 믿기는데요.”

16550947951629.jpg“정말 실수였습니다. 부러트리고 나서야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인 걸 알아서…….”

16550947905961.jpg“……그래서요?”

16550947951629.jpg“오른손도 마저 부러트렸습니다.”

16550947905961.jpg“아, 하…….”

리에네가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16550947905961.jpg“그럼 두 손이 다…….”

16550947951629.jpg“공교롭게도.”

16550947905961.jpg“실수를 하시는 바람에요.”

16550947951629.jpg“네, 실수로.”

16550947905961.jpg“평소에는 실수를 잘 안 하시죠?”

16550947951629.jpg“해야 할 때는 합니다.”

16550947905961.jpg“그게 무슨…….”

리에네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실수를 해야 할 때가 어디 있어. 그냥 일부러 그랬다는 거잖아.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곧 대의회인데. 린든 클라인펠터가 손이 부러졌다고 하면 난리가 날 텐데. 그런데 왜…….

16550947951629.jpg“진작 할걸.”

블랙이 입술을 손목 안쪽으로 미끄러트리며 중얼거렸다.

16550947905961.jpg“아니, 왜 그런 말을…….”

16550947951629.jpg“공주님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했을 겁니다.”

16550947905961.jpg“그런…… 흡.”

리에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블랙은 리에네의 손바닥에 키스를 하며 리에네가 웃음을 그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16550947905961.jpg“그러시면…… 안 되거든요.”

배가 아파서 눈물이 조금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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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이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16550947951629.jpg“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언제든지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실수를 저질러야 하는 순간이 오면.

16550947905961.jpg“곧 재판이 있잖아요. 원로들 앞에서 왕실이 불한당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는 꼴일 텐데.”

16550947951629.jpg“그럼 곤란합니까?”

16550947905961.jpg“아마도요.”

16550947951629.jpg“……그럼 괜한 짓이었나 보군요.”

블랙이 낮은 한숨을 섞어 작게 내뱉었다.

16550947905961.jpg“꼭 그런 건 아니고요. 하지만 치료는 해줘야 해요. 그건 귀족 간의 예의에 관한 문제라서.”

블랙의 반응에 마음이 약해진 건 리에네였다. 리에네가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재빨리 블랙의 옷깃을 쥐었다.

16550947905961.jpg“하지만 감사해요.”

16550947951629.jpg“곤란해도 말입니까?”

16550947905961.jpg“누가 저를 위해 그런 일을 해준 건 처음이에요.”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말을 마칠 때에는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리에네가 숨을 훅 몰아쉬었다. 이런 감각을 느껴 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분노하고 감싸 주는, 그런 일이. 왕관을 물려받은 뒤부터 리에네는 숨을 곳이 없었다. 기댈 곳도, 마음을 놓을 곳도, 엄살을 부릴 곳도 없었다. 오로지 짊어져야 하는 것들만 있었다. 블랙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진 채 기대도, 블랙은 끄떡없이 전부 받아 줄 것만 같았다. ……아니, 받아 줄 것만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러고 있어. 리에네가 옷깃을 쥔 손을 가만히 움직여 손끝에 닿는 살갗을 쓸었다. 어쩌지. 지금, 키스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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