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정해진 상대2021.08.29.
키스가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지 부끄러워. 내가 먼저 한 적도 한 번 있었는데. 그때는 차라리 아무것도 몰라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이 남자와 하는 키스가 어떤 건 줄 아니까…… 그래서 더 못 하겠어.
“나는 이런 데 서툽니다.”
블랙은 제 목 아래를 스칠 듯 말 듯 조심스럽게 건드리는 리에네의 손끝을 보다 입을 열었다.
“어떤……게요?”
“이런 것.”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잡아 제 뺨에 붙였다. 그는 어느샌가 무릎을 굽혀 높이를 맞춰 주고 있었다.
“여자를 잘 모릅니다. 그런 쪽으로 경험이 별로 없어서. 뭔가 신호를 보내도 잘 읽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틀릴지도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반대쪽 손이었다. 잠깐 말을 자른 블랙이 반대편 손도 마찬가지로 제 뺨에 붙였다. 이제 리에네는 블랙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든 자세가 되었다.
“공주님이 지금 짓는 표정은, 키스가 하고 싶다는 뜻입니까?”
“…….”
……모르긴 뭘 몰라. 다 알면서. 뭐가 서툴다는 거야.
“틀린 거라면 말해요. 아니면 나 좋을 대로 알아들을 테니.”
거짓말쟁이. 이 남자는 어쩌면 거짓말을 아주 잘할지도 모르겠어.
“틀리지 않았어요…….”
모기처럼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리에네를 보며 블랙이 싱긋 웃었다.
“내가 키스하길 바랍니까?”
알면서 왜 묻는 건데요…….
“그럼 할 테니까 뭔가 해줘요.”
……잠깐만. 이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이 남자가 키스를 한다면서 조건을 걸고 있어.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뭐가 좋을 거란 얘기였습니까? 아까, 혼잣말로.”
블랙은 리에네가 거절을 하기 전에 서둘러 말을 꺼냈다.
“신전에서 만나면 좋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그건…… 음……. 가서 만나면…… 올 때도 같이 올 테고…….”
“그리고?”
“혼자 가는 것보다 나아서…….”
“혼자보다 제가 같이 있는 게 더 좋습니까?”
리에네의 눈이 갈 곳을 잃고 한 바퀴 굴렀다.
“대답해 주세요. 내가 좋습니까?”
“……아시, 잖아요.”
“그래도 듣고 싶어서.”
블랙이 리에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눈 감아요. 키스할 테니.”
“…….”
어쩐지 그가 좀 얄미워서 조금은 눈을 뜨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아서 스르륵 감겼다.
“입술을, ……줘요.”
입술이 겹치기 직전 블랙이 속삭였다. 이 남자가 오늘따라 해달라는 게 많네. 리에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어쩌지.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걸, 이미 마음이 알고 있었다. 블랙이 해달라는 것들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지금처럼 입을 열어 자신이 그를 반가워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 * * 오늘은 말을 해야지. 문 하나를 넘어 욕실에서는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블랙이 자기 전 몸을 씻는 소리였다. 그보다 먼저 욕실을 쓴 뒤 잠옷을 갈아입은 리에네는 거울 앞에 앉아 빗질을 하며 내내 다짐을 했다. 아이를 가진 게 아니라고. 그땐 청혼을 거절할 생각에 거짓말을 했던 것뿐이라고. 속여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내가 낳게 될 아이는 누구도 아닌 당신의 아이일 거라고. 그렇게 말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빗질을 하는 손끝이 가늘게 떨려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것 아닌 얘기일 텐데 긴장이 돼서 입 안이 말라왔다. ……그럼 아직 경험이 없다는 얘기도 하게 될까. 그것도 나름 고민이었다.
라피트와 동침을 한 적이 없음을 알리게 되면 자연히 거기까지 얘기가 갈 텐데, 리에네는 그 얘기가 끝도 없이 난처했다. ……저 남자는 경험이 있을 거잖아. 낮에 한 얘기가 떠올랐다.
-여자를 잘 모릅니다. 그런 쪽으로 경험이 별로 없어서.
경험이 없는 것과 별로 없는 건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막…… 이것저것 다 능숙하잖아. 경험이 없을 리가. 그 생각을 하자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감정이 요철처럼 울퉁불퉁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여자하고 그런……. ……했을까. 나한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뜨겁게 쳐다보고 키스가 끝나도 아쉽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훑고 그랬을까. 불시에 끌어안고 격한 키스를 퍼붓다 이유를 물으면 너무 예뻐서라고 대답하기도 했을까. ……. 갑자기 기분이 발밑으로 훌쩍 가라앉았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리에네는 왠지 조금 화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전부 그 남자가 처음인데. 그 남자는 아니라는 거잖아. 그런데 이걸 억울해할 수도 없었다. 그 남자는 내가 처음인 걸 모르니까…… 어쩌면 그 남자가 더 억울해할 수도 있겠네. 역시 말을 해야 할까 봐. 나는 당신이 처음이라고 얘기하면서 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스쳐 갔는지도 물어야겠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얘기라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오늘. 말하는 거야. 똑똑. 그때 침실 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욕실에서는 아직도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블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욕실을 한 번 힐긋 쳐다본 리에네가 침실 문 앞으로 다가섰다.
“누군가요?”
“접니다.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었다. 리에네가 반색을 하며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부인. 늦도록 고생 많았어요.”
부인의 얼굴이 고되어 보였다. 하루 종일 성 밖에 나가 돌아다녔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주무시려는 중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들어오세요.”
“네, 공주님.”
부인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춰 섰다.
“그자가 여기 있습니까?”
목소리가 수상할 정도로 작았다.
“네. 이제 옆방을 쓰기로 했단 걸 아시잖아요.”
“그럼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네?”
부인이 다급히 리에네의 손을 끌어당겼다.
“들으면 안 되는 얘깁니다.”
“무슨…… 들으면 안 된다니요. 로드 티와칸께서요?”
“네.”
부인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고되기만 한 게 아니라 겁에 질려 보이기도 했다.
“…….”
리에네가 욕실을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 블랙이 들어서는 안 될 얘기란 무엇일까. 혹시 안 좋은 얘기일까. 그럼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들어야 해. 내가 저 남자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을 수는 없어. 리에네가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요.”
리에네와 플램바드 부인은 욕실에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걸어 침실을 빠져나갔다. * * *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 남쪽 탑의 끄트머리에 있는 알현실이었다. 확실히 이 시간에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한 곳이긴 했다. 플램바드 부인의 침실도 위험했다. 블랙이 앞서 썼던 부인의 맞은편 방은 페르모스가 자주 드나들며 또 다른 집무실처럼 쓰고 있었다.
“이제 말하세요.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공주님이 시키신 대로 그 노인을 찾아보았습니다. 네, 그랬지요.”
부인의 얘기는 짧지 않았다. 일단 노인을 만나는 일부터가 어려웠다. 신전 앞은 지금 계단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래서 늘 분주했다. 거지 노인이 이전처럼 마음 편히 앉아 있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 탓에 행방을 물어물어 여기저기 골목길을 누벼야 했다. 그러던 중에 부인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구걸을 하던 노인에게 신전의 물빵을 나눠 주고, 지팡이로 얻어맞는 종제였다.
“또 그런 일이…….”
리에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주님도 보셨습니까? 하여간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말리려 했지요. 그런데 외려 그 종제가 저를 말렸습니다. 더 맞아야 한다고요.”
노인은 그를 몇 차례나 더 후려치고 나서야 매질을 멈췄다.
“노인이 하도 괴팍해 보이기에 말을 붙이는 것도 조심스러웠지요. 그러나 공주님이 하신 부탁을 어찌 들어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노인에게 공주님의 명이라 하며 그자에 대해 입을 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노인은 리에네가 들은 것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 나우크의 죄가 돌아왔다. 아르사크의 딸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지 뭡니까. 무슨 거지 노인이 사제들처럼 어려운 말을 쓰는지요. 그래서 잘 알아듣게 얘기해 달라고, 일단 그자가 누군지부터 말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노인이 무어라 했는데, 공주님도 아시겠지만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퍽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예 글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노인이 성치 않은 손으로 바닥에 힘겹게 글을 쓰는데…….”
두어 글자를 가까스로 써 내려갔을 때였다. 페르모스를 앞세운 티와칸의 용병들이 들이닥쳤다. 신전에서부터 종제 클리마를 찾아왔다고 했다. 종제 클리마는 도망쳤고, 티와칸은 종제의 행방을 묻는다는 이유로 노인을 데려갔다.
“그런데 저는 영…… 그 이유가 억지 같아 말입니다. 눈앞에서 도망친 사람인데 노인이 행방을 알 리 없지 않습니까.”
부인은 리에네가 노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비밀로 두었음을 잊지 않았다. 거기서 계속 항의라도 했다간 공연히 의심을 살 것 같아 그만 그러시라 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티와칸이 노인을 데리고 자리를 뜨고 난 다음, 부인은 신발로 바닥을 뭉갠 흔적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노인이 블랙의 이름을 써 내려가던 그곳이었다.
“아…….”
리에네가 작게 탄식을 흘렸다.
“저는 그자가 바닥을 뭉개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찌나 말을 빠르게 술술 내뱉던지 그걸 듣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그런데 하필, 딱 이름이 써진 자리를 뭉개 놨다는 게 영 이상하지 뭡니까.”
“…….”
이상하고도 남았다. 리에네는 페르모스가 얼마나 영리한 자인지 알았다. 그가 의미도 없는 짓을 우연처럼 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왜. 시차도 몹시 공교로웠다. 리에네는 블랙에게 노인에 대해 말을 했고, 블랙은 그가 자신을 알아볼 리 없다고 단언했다. 페르모스는 종제 클리마를 찾으러 신전으로 향했고, 그를 대신해 노인을 붙들었다. 이건 마치…… 그 남자가 나 몰래 페르모스 경을 시켜 노인을 빼돌리라고 한 것 같잖아.
“나우크의 죄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노인이 뭔가를 알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니 이름을 써 주려고 했겠지요.”
“죄…….”
노인은 블랙이 복수를 할 것이라 말했다. 복수에는 원한이 필요했다. 혈육이 죽었다는 건 충분히 원한이 될 만한 이유였지만 블랙은 오래전 일이라 다 잊었다고 했다. 아르사크의 딸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 했다. 블랙은 아르사크의 딸을 되찾기 위해 왔을 뿐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의 정혼자를 빼앗기기 싫어서. 둘 중 어느 쪽이 맞는 걸까.
“그래서 이름은 전혀 알아볼 수가 없던가요?”
“네, 공주님. 노인이 쓸 때도 손이 떨려서 제대로 된 글자 같지 않았습니다. 오라는 글자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ㅍ’ 자가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게 전부예요?”
“송구합니다, 공주님. 티와칸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났습니다.”
의혹이 더해졌다. 그러나 아직은 블랙이 한 말을 믿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다.
“부인. 혹시…… 제가 어렸을 적, 정혼 얘기가 오갔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네? 그게 언제 일입니까?”
“지금부터 한…… 이십 년쯤 전이요.”
“그때라면 공주님은 너덧 살밖에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 나이에 정혼이라니요.”
“그렇긴 한데…… 상대도 어렸다면요.”
“그렇다면 가문 간의 정략혼이었겠지요.”
“네. 그랬을 거예요. 기억나는 게 없으세요?”
“제가 궁에 들어와 공주님을 모신 지 십육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처음 공주님을 뵌 게 공주님의 아홉 살 생일 때였지요. 그때 벌써 어찌나 의젓하셨던지요. 왕비님이 편찮으셔서 누워만 계셔도 어리광 한 번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맞아요. 부인은 아홉 살 때 뵈었어요. 그럼 정혼은 그 전이라는 얘기겠군요.”
“네. 공주님이 정혼하셨다는 얘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진작 없던 얘기가 됐거나, 아니면 정식으로 오간 게 아니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