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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오늘도 어제처럼 (44/145)

44. 오늘도 어제처럼2021.09.01.

블랙도 그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자기는 정혼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선친이 공연히 하던 말일 수도 있다고.

16550948268627.jpg“그런 거라면 왕실 기록에도 안 남아 있겠죠?”

16550948268631.jpg“저야 그런 일은 모르지요.”

16550948268627.jpg“혹시 모르니 찾아봐야겠어요.”

리에네가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왕실 기록서라면 집무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제발. 뭐든 남아 있길.

16550948268631.jpg“공주님. 어딜 가시려고요? 그나저나 정혼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는 겁니까? 그자의 얘기를 하다 말고요.”

16550948268627.jpg“저와 정혼한 사이였대요.”

16550948268631.jpg“네?”

부인이 통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벅댔다.

16550948268631.jpg“누가 말입니까? 클라인펠터 경과도 정혼은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16550948268627.jpg“로드 티와칸이요.”

16550948268631.jpg“네에?”

놀라 되묻던 플램바드 부인은 제 목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입을 틀어막았다.

16550948268631.jpg“어, 언제…… 그…… 이십 년 전에 말입니까?”

16550948268627.jpg“확실한 건 아니에요. 워낙 오래전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기억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게 청혼한 거라고요.”

16550948268631.jpg“그,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자가 나우크의 사람이란 말입니까?”

16550948268627.jpg“네. 예전에 혈육이 죽임을 당한 뒤 나우크를 떠났다고 했어요.”

16550948268631.jpg“그런 기구한 일이…….”

리에네가 일그러진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16550948268627.jpg“예전 일이라 다 잊었다고 했어요. 내게 청혼한 이유는 그것뿐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나는 자꾸…….”

말을 끊은 리에네가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16550948268627.jpg“나쁜…… 쪽으로 생각이 가요. 혹시나 그 사람의 혈육을 죽인 게…… 선왕이었던 걸까요? 그래서 노인은 내가 로드 티와칸으로 인해 피 흘리게 될 거라고 했을까요?”

16550948268631.jpg“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공주님.”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일이라며 부인이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16550948268631.jpg“선왕께서는 아주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현명하고 사려 깊고 마음이 넓은 성군이셨지요. 그런 분께서 남을 죽이다니…… 그럴 리가요. 터무니없는 생각이십니다.”

16550948268627.jpg“그럼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 노인은.”

16550948268631.jpg“그건…….”

혼란에 빠진 리에네가 고통스럽게 어깨를 웅크렸다. 플램바드 부인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애써 리에네를 달랬다.

16550948268631.jpg“공주님. 일단 이리 생각하십시다. 그 노인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막말로 정신이 온전한지 아닌지도 모르는 일이겠고요.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종제를 그리 때리는 걸 보면 확실히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가 어찌 공주님도 모르고 저도 모르는 일을 안단 말입니까. 안 그럴까요?”

16550948268627.jpg“그럴까요……. 하지만 노인은 나이가 많아요. 부인이나 내가 모르는 일을 겪고 기억할 수도 있어요.”

16550948268631.jpg“그러니까 그 노인이 대체 누구기에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16550948268627.jpg“…….”

부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우선순위가 틀렸다. 노인이 하는 말보다 노인이 과연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했다.

16550948268627.jpg“그 종제가 노인의 정체를 알고 있을 거예요.”

16550948268631.jpg“지팡이로 두들겨 맞던 종제 말입니까? 더 맞아야 한다고 하는 걸 보면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지요. 그런데 그 종제는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나저나 무슨 일로 티와칸이 종제 하나를 못살게 굴고 있답니까?”

16550948268627.jpg“못살게 구는 게 아니에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그 종제가 대사제를 죽인 범인일지도 몰라서 쫓고 있는 거예요.”

16550948268631.jpg“네에?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경악한 부인이 잠시 손을 모으고 신을 찾았다.

16550948268631.jpg“어찌 그런…… 그렇게나 순하고 선하게 생긴 이가. 혹시 티와칸이 생사람을 잡는 게 아닙니까?”

16550948268627.jpg“그건 아니에요. 그럴 만한 단서가 있었어요. 그런데 부인은 종제의 얼굴을 보셨어요?”

16550948268631.jpg“우연히 그리되었습니다. 공주님도 보셨다니 아시겠지만 그 종제는 얼굴을 다 가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인이 하도 험하게 때리느라 그 와중에 후드가 벗겨졌지요.”

한없이 착하게만 생긴 종제는 대신 슬퍼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손등까지 상처가 있었다고 했다.

16550948268627.jpg“또 기도를 했을까요…….”

16550948268631.jpg“무슨 기도가 그런답니까?”

16550948268627.jpg“속죄의 기도라는 게 있대요. 자기 몸에 채찍질을 해 가면서 하는 기도라고 들었어요.”

16550948268631.jpg“세상에나……. 그런 기도는 들으시는 신도 달가워하지 않으실 겁니다.”

16550948268627.jpg“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 종제는, 대체 뭘 속죄하려고 했을까요.”

16550948268631.jpg“그만한 죄를 지었을지도요. ……그러니 선한 사람만은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만일 종제 클리마가 대사제를 죽인 게 맞다면. 그리고 노인은 그걸 알아서 그에게 매질을 하는 거라면. 클리마는 속죄의 뜻으로 매질을 감당하는 거라면. 노인이 미쳐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뜻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노인은 입 밖으로 낸 것보다 더 많은 일을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16550948268627.jpg“티와칸이 노인을 어디로 데려갔을까요. 역시 내가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16550948268631.jpg“그건 그렇습니다만…… 일부러 데려간 거라면 섣불리 행방을 고하겠습니까? 감춰 놓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기 십상입니다.”

16550948268627.jpg“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렇다면 그 종제에 대해서라도 알아봐야겠어요.”

16550948268631.jpg“그게 맞을 듯합니다. 그럼 제가 신전에 다녀올까요?”

16550948268627.jpg“아니에요. 이미 밤이 늦었어요. 내일 함께 가든가 해요.”

16550948268631.jpg“시간이 되겠습니까?”

16550948268627.jpg“없어도 만들어야죠. 마침 새 고문관이 와서 일을 좀 덜긴 했어요.”

리에네가 부인의 손을 꼭 쥐었다.

16550948268627.jpg“고생 많았어요, 부인. 제가 온전히 믿을 사람은 부인밖에 없군요.”

16550948268631.jpg“참으로 영광스러운 말입니다, 공주님.”

부인이 애정을 듬뿍 담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살살 쓸어 주었다.

16550948268631.jpg“그럼 가서 주무십시다. 내일도 바쁜 하루가 되지 않겠습니까.”

16550948268627.jpg“그러게요.”

리에네와 부인은 알현실에서 헤어져 각기 침실로 돌아갔다. 다행히 돌아오는 길에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티와칸들은 저 밖에서 종제 클리마를 뒤쫓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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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탁.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16550948356197.jpg“어디에 있었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문이 안에서 당겨졌다. 깜짝 놀란 리에네가 손을 놓았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얼굴은 블랙이었다.

16550948268627.jpg“……잠깐 부인을 바래다주고 왔어요.”

침을 한 번 삼키자 의외로 매끄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리에네는 블랙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욕실에서부터 누가 찾아왔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을지 몰랐다.

16550948268627.jpg“제가 심부름을 보냈다고 했잖아요. 거기서 페르모스 경을 만났대요. 시킨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시무룩하기에 방까지 바래다주었어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일이라는 것도 알리고요.”

16550948356197.jpg“그랬군요.”

딱히 문제 삼을 게 없었는지 블랙이 그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16550948356197.jpg“안 들어올 겁니까?”

16550948268627.jpg“아…….”

리에네는 블랙이 내민 손을 잠시 쳐다보다 그대로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했다. 뜨겁다 싶을 정도로 아주 따듯했고, 무엇이든 감싸 안을 것처럼 큼직했다. 방으로 들어와서도 블랙은 손을 놓지 않았다. 침실 가운데 놓인 침대를 지나쳐 가며 리에네가 농담처럼 말했다.

16550948268627.jpg“설마 방에서 방까지도 바래다주시려고요?”

16550948356197.jpg“아니요.”

리에네의 방은 블랙의 방을 지나쳐 들어가야 했다. 침대 건너편에는 문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욕실 문이었고, 하나는 침실 사이에 놓인 작은 방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이 작은 방은 한때 왕의 화랑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작지만 통치자와 그의 배우자를 위한 이국적이고 값비싼 장식품들과 그림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은 텅 빈 지 오래였다. 리에네도 가끔 이 방의 용도가 뭐였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왕의 화랑으로 향하는 문을 열며 블랙이 말했다.

16550948356197.jpg“같이 갈 겁니다.”

16550948268627.jpg“……네?”

16550948356197.jpg“오늘도 같이 자고 싶습니다. 어제처럼.”

16550948268627.jpg“…….”

또 그런 느낌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가슴 밑바닥이 조여드는 느낌. 이런 감각이 느껴질 때면 리에네는 조금 괴로웠다. 목이 말라서 자꾸 침을 삼키고 있었다.

16550948356197.jpg“그새 내가 조금 더 좋아진 줄 알았는데…… 아닙니까?”

16550948268627.jpg“…….”

맞아요. 그럴 거예요. 부인이 그런 말을 해줘도 나는 당신이 조금도 싫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의심이 더 괴로웠어요. 나는 지금도 당신이 한 말을 변명하게 돼요. 선왕이 당신의 가문에 해를 끼쳤고, 그래서 당신은 어린 나이에 터전을 잃고 타지를 떠돌아야 했고, 그건 모두 아르사크의 핏줄에 이어지는 죄라는 게 맞다고 해도. 그래도 당신은 과거를 잊고 그냥 내게 그냥 청혼하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요. 당신 말대로, 벌써 이십 년이나 된 일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으니까. 선왕이 저지른 일로 당신에게 미안해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테니까. 나는 당신을 이렇게나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그럴지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16550948268627.jpg“조금, 신경이 쓰여서요.”

하지만 리에네는 속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그건 자신이 나우크의 통치자가 아니라 평범한 가문의 딸일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16550948356197.jpg“뭐가 말입니까?”

16550948268627.jpg“경험이 많지 않다고 하신 거요.”

16550948356197.jpg“……네?”

16550948268627.jpg“그건 서툴다는 뜻이잖아요.”

16550948356197.jpg“…….”

16550948268627.jpg“그런 사람은 좀 걱정이 돼서.”

16550948356197.jpg“…….”

사실은 그 반대였다. 그가 서툴 게 뻔한 자신에 비해 너무 능숙할까 봐,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과거에 있던 일을 자꾸 상상하게 될까 봐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아이를 가진 게 아니라는 말을 하면 안 됐으니까.

16550948356197.jpg“……좀, 어이가 없는데.”

처음에는 뺨이 굳는 듯하던 블랙은 곧 표정을 바꿔 가볍게 웃었다.

16550948356197.jpg“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던 겁니까?”

16550948268627.jpg“뭐를요?”

16550948356197.jpg“나와 무얼 할 생각이었습니까? 한 침대에서 잔다고 했을 때.”

16550948268627.jpg“…….”

대답이 곤란해진 리에네는 그냥 입을 다물었지만, 볼에는 대답처럼 홍조가 떠올랐다.

16550948356197.jpg“내가 서툴면 곤란해질 일이 뭐기에.”

16550948268627.jpg“……하여간 그걸로 대답이 됐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리에네가 도망치듯 침실 문을 열었다. 탁! 하지만 도로 닫혔다. 블랙이 등 뒤에서 다시 문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그 덕에 리에네는 닫힌 문과 블랙 사이에 갇힌 모양새가 되었다.

16550948356197.jpg“얼마나 능숙해야 만족할 것 같습니까?”

블랙이 제 팔 안에 갇힌 리에네의 뒷목으로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16550948356197.jpg“뭘 어떻게 해야 능숙하다고 여길 겁니까.”

16550948268627.jpg“그냥…… 그건…… 지금 당장이 아니라…….”

16550948356197.jpg“이상한데. 분명 지금 그래야 한다는 뜻 아니었습니까?”

스르륵, 블랙의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입술이 뒷목을 덮은 머리칼을 헤쳤다. 드러나는 연한 살갗 위로 입술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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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를 안지 않은 손이 머리칼을 쓰다듬다 귓불을 간질이며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16550948268627.jpg“아니…… 아니었…….”

16550948356197.jpg“아니, 오늘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목을 쓸어내리던 손가락이 잠옷의 가장자리에서 멎었다. 손끝이 얇은 천을 들추며 안으로 들어올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하마터면 소리를 흘릴 것 같아 리에네가 입술을 꾹 물었다.

16550948356197.jpg“다행히도 공주님이 싫어할 만큼 내가 서투른 것 같진 않습니다. 반응을 보면.”

잠옷에서 떨어진 손가락이 입술 새로 들어왔다. 블랙은 꽉 다물린 입술을 제 손가락으로 천천히 벌렸다.

16550948356197.jpg“이러면 상처가 생깁니다. 오늘 낮에 얘기했을 텐데요. 내가 만드는 상처 말고는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16550948268627.jpg“그…….”

몸이 계속 잘게 떨려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16550948356197.jpg“이젠 이런 건 하지 않는 겁니다. 약속해요.”

입술을 벌려 놓은 블랙이 리에네의 턱을 쥐어 끌어당겼다. 그는 잇자국이 남은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더럽게도 야했고 녹을 만큼 뜨거웠다. 이대로 가다간 생각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가 왜 이렇게 야한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대체 무슨 계획을 속에 감추고 있는 건지…… 나우크에 화가 미치기 전에 답을 알아내야 한다는, 그런 생각 전부가.

16550948268627.jpg“그, 그만!”

이게 뭐야. 나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았어. 탓! 리에네가 있는 힘을 다해 블랙을 밀어냈다.

16550948268627.jpg“그만 하세요.”

16550948356197.jpg“…….”

진심이라고 느꼈던지 블랙이 입을 다물고 리에네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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