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위태로운 (1)2021.09.05.
목소리가 떨려서 그게 싫었다. 리에네는 제 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고서 말했다.
“본인의 능숙함을 증명하고 싶거든 이런 식으로 말고 다른 식으로 보여주세요. 제가 기쁘게 로드 티와칸과의 잠자리를 기대할 수 있는 방식으로요.”
“……이건 틀렸습니까?”
“네. 저를 놀리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까요. 이런 식으로는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몸을 건드려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그게 꼭 준비가 됐다는 뜻은 아니에요. 몸보다는 마음의 준비가 먼저입니다.”
“왜 준비가 안 됐습니까?”
“그걸 지금…….”
“……아, 아닙니다. 안 됐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안 됐으면 아니라는 뜻일 텐데.”
“…….”
블랙이 남은 열기를 털어내듯, 고개를 한 번 거칠게 저었다.
“공주님이 마음을 조금 열었다고 해서 다짜고짜 동침을 요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같이 잤으면 했던 겁니다. 어제처럼. 옆에 있기만 해도 좋아서.”
“…….”
그건 리에네도 마찬가지였다. 좋아서 자꾸만 경계가 허물어졌다. 그가 어린 날의 정혼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는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제 남자로 맺어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거부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블랙이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 어떤 접촉도 의도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주무십시오. 부디 편한 밤을.”
“……네. 로드 티와칸께서도.”
탁. 리에네가 재빨리 문을 열고 뛰듯이 제 침실로 들어갔다.
“……싫다.”
이런 거짓말이 싫었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가 두 번 다시 자신을 만지지 않을 것처럼 뒤로 물러서는 것도 싫었다.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그 종제에 관해서 알아볼 거고, 그럼 노인에 대해서도 뭔가 알아볼 만한 게 나올 거야. 아니면 노인을 만나겠다고 하자. 페르모스 경이 데려갔다고 했잖아. 그럼 분명 성 어딘가에 가둬 놨을 거야. 그래서 다시 얘기해 보면 돼. 그 남자가 그걸 방해할 권리는 없어. 그래서 만일 진실을 알게 된다면……. 거기서부터 생각이 막혔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를 두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죽을 것 같아.”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리에네는 비틀대며 걸어가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일단은 잠을 자는 게 우선이었다. * * *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여야 했다. 리에네가 잠든 시간은 새벽마저 환해지는 그런 늦은 때였다.
“아…… 아침인가.”
리에네는 어쩐지 평소보다 몸이 무겁다고 느끼며 이불 속에서 몸을 돌렸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몸도 으슬으슬 추운 것 같고.”
진땀이 좀 나는 듯했다. 열이라도 오른 건가 하며 리에네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
그러다 다리 사이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달거리가……!”
원래 날짜보다 며칠이나 먼저 시작되었다.
“어째서 이러지.”
리에네가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하지만 이미 시트에는 붉은 핏자국이 동그랗게 번져 있었다.
“빨리 치워야…….”
허둥지둥, 막 시트를 걷어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툭, 툭.
“일어났습니까?”
블랙이었다. 리에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무슨 일이야, 이 아침부터. 일단 중요한 건 이 핏자국을 감추는 일이었다. 리에네는 시트를 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올려 핏자국을 감추었다.
“무슨…… 일이세요.”
“늦잠을 자는 것 같아서 깨우는 중입니다.”
그랬나. 내가 늦잠을 잤나. 아니, 그렇다 해도 왜 당신이 나를 깨우는 건데.
“몸이 좀…… 안 좋아서. 금방 일어날게요.”
“몸이 안 좋다고요…….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세……!”
늦었다. 블랙은 벌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리에네는 목까지 끌어올린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어디가 안 좋습니까?”
“그냥…… 별거 아니에요. 나가 주세요.”
“안색이 나쁩니다.”
성큼성큼, 블랙이 침대를 향해 걸어왔다. 커다란 손이 남의 속도 모르고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는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얼굴이 돼서는.”
그가 그럴수록 리에네의 안색은 더 파리해졌다. 리에네가 아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썼다.
“그만 나가세요. 제 몸은 제가 돌보겠습니다.”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압니다. 잠깐 이불 좀 치워 봐요.”
리에네가 필사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이불자락에 블랙의 손이 닿았다.
“만지지 말아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반응이 새어나갔다. 블랙이 움찔 손을 멈췄다.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새벽 호수 위로 얕게 서리가 내릴 때 같았다.
“화가 난 겁니까? 어제 일로.”
“아니…… 아니에요. 그냥 나가세요. 어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공주님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화나지 않았어요. 그냥 좀, 어서…….”
블랙은 온 힘을 다해 이불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는 리에네의 손목을 쥐며 물었다.
“이래도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겁니까?”
이불 아래 사정을 알 리 없는 블랙에게 그것은 절대 맨살이 닿고 싶지 않다는 거부로 여겨지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제 비밀을 덮고 있는 이불이 치워질 것 같아 리에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이러지 말고 나가라고요!”
“왜 하루 만에 사람이 달라지는 건데.”
블랙이 얼굴을 가린 이불을 끌어 내리려고 했다.
“안 돼!”
다급해진 리에네가 블랙을 마구잡이로 떠밀었다. 퍽! 힘이야 보잘것없었지만 블랙을 밀어내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 바람에 이불이 미끄러진 게 문제였다.
“……이게 뭡니까?”
“……!”
시트와 잠옷 자락에 묻은 붉은 핏자국이 실제보다 더 커다랗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텅 비어 버려 변명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보지 말……!”
리에네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블랙을 밀어내려고 했다.
턱! 그러다 덥석 손이 잡혔다.
“움직이지 말아요. 함부로.”
“…….”
블랙은 몸을 들썩대는 리에네를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던 리에네가 블랙을 쳐다보았다. 이마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의사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
“이대로 있어. 움직이지 말고.”
말을 마친 블랙이 휙 몸을 떼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당황이 한차례 가라앉고 나서야 리에네는 그가 뭔가 착각을 했다는 걸 알아챘다. * * *
“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임신 초반에는 간혹 출혈이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물론 배가 나올 정도로 아기가 자랐을 때는 몹시 위험한 일이지만 공주님께서는…… 으음, 얼마나 되셨다고요?”
나우크에 의사는 딱 둘이었다. 하나는 주로 넉넉한 치료비를 줄 수 있는 귀족들을 상대했고, 다른 하나는 그러지 못한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다. 그럼에도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워낙 환자가 많은 탓에 몹시 바쁘다는 점이었다. 그런 이들이 둘 모두 이 아침부터 제 침실에 있었다. 정말로 아프지도 않은 저를 치료하기 위해. ……미치겠네, 정말. 리에네가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꾹 씹어 삼켰다. 의사들 뒤에는 블랙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의사들이 허튼소리를 하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얼굴이었고, 그 옆의 페르모스는 그러기 전에 잘 말려 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게…….”
임신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는 리에네가 난처하게 눈동자를 흔들었다.
“한 달.”
대답을 한 자는 블랙이었다.
“하, 한 달이라고요?”
“정확히는 28일.”
“…….”
대체 28일이라는 숫자가 어디서 나온 거야. 리에네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왜 28일이지…… 아, 그렇구나. 28일 전은 티와칸 용병대가 나우크에 도착한 날이었다. 그날 청혼서를 받았고, 그다음 날 거절의 의미로 양측 간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 남자는…… 정말 자기 애로 만들 생각이야. 아직 있지도 않은 애를.
“28일 전이라면 한창 성이 포위돼 있을……. ……엇?”
손가락을 꼽으며 날짜를 계산해 보던 의사 하나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 랬는데 아이가 생겼……?”
그러다 블랙과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입을 꽉 다물었다. 푸른 눈은 형형하다 못해 흉흉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건 네가 알 것 없다. 너는 내 아이를 무사히 지키기만 하면 돼.”
“어읏…… 네, 네……. 아, 알겠……습니다.”
의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무 말 않고 있던 다른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호, 혹시 복통이 있거나 하십니까? 배가 막 안으로 당긴다든지, 아니면 찢어질 것처럼 느껴진다든지…….”
“아니…… 조금 아프긴 한데 그렇진 않아요.”
아랫배에 둔탁한 통증이 있긴 했지만 그건 달거리 때 종종 겪는 일이었다.
“막 깨어났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어요.”
리에네가 한마디 덧붙이자 의사들이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럼 큰일은 아닌 듯 보입니다. 하지만 출혈이 있다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니 당분간 몸을 아끼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합니다. 출혈이 빈번하면 아기님을 잃을 수도 있으니 되도록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옵소서. 특히나 말을 타고 멀리 가는 건 지극히 위험한 일이옵니다.”
“……네?”
뜻밖의 얘기에 리에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움직이지 말라니. 그럼 종일 앉아만 있으라는 건가요?”
“누워 있는 게 더 좋습니다.”
“뭐라는…….”
블랙이 의사들과 리에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기억하겠다. 이럴 때 필요한 약은 없나?”
“아기님의 안정을 도울 만한 약이 있습니다. 곧 지어 올리겠습니다.”
의사들이 주섬주섬 인사를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 블랙은 의사들을 등 뒤로 가리키며 페르모스에게 말했다.
“따라가 봐. 약을 제대로 만드는지 확인해라. 말을 어떻게 퍼트리는지도 알아보고.”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페르모스는 군말 없이 의사들을 따라나섰다. 말을 퍼트린다는 얘기는 혹시라도 클라인펠터 같은 자와 내통을 할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리에네가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페르모스는 아이를 잃어도 상관없다는 식이었으나, 그런 태도를 드러내지 않을 만큼 현명했다. 좀 전에는 의사들이 살짝 불쌍할 뻔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를 가진 리에네가 그저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다른 사고라도 생기면 많은 사람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저, 저는 그럼…… 시트를 가져가겠습니다. 얼룩이 지기 전에 세탁을 해야지요.”
이제 조금 안색을 되돌린 플램바드 부인이 말했다. 리에네가 살짝 블랙을 돌아보고는 플램바드 부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같이 해요. 혼자는 힘들잖아요.”
“아이고, 아닙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어림없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옳았다. 어쩐지 블랙은 리에네가 그런 말을 하는 꼴을 두고 볼 것 같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였다.
“누워 있으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요.”
……자기 거짓말에 자기 발이 묶인다는 게 이런 뜻이었네. 난처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오늘은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물론 시트를 가는 것도 거들고 싶었지만, 신전에도 다녀와야 했다.
“필요하면 그렇게 할게요.”
“지금이 그럴 때입니다. 약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가만히 있도록 해요.”
“저는 할 일이 많은 몸입니다, 로드 티와칸.”
“그리고 홀몸이 아니기도 합니다.”
“…….”
그렇게 나오니 더더욱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조심스레 눈치를 보던 플램바드 부인이 은근슬쩍 제 소매에서 리에네의 손을 떼어냈다.
“저 혼자 하겠습니다, 공주님. 이 계절에 어찌 빨래를 거든다고 하셔요. 쉬고 계십시오.”
“부인, 그러지 마세요.”
“공주님이야말로 그러지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지금은 쉬실 때입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눈짓으로 어깨 너머의 블랙을 가리켰다. 더 이상 고집을 피웠다간 의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리에네도 그쯤에서 포기해야 했다.
“네……. 그럼 다녀와요.”
“금방 오겠습니다, 공주님.”
부인이 허둥지둥 시트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