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위태로운 (2)2021.09.08.
숨을 들이쉴 때마다 오히려 숨을 막히게 하는, 이상한 기류가 감도는 침실에 리에네는 블랙과 단둘이 있게 되었다.
“……걱정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으니 나가서 볼일을 보세요.”
“공주님이라면 그러시겠습니까?”
“…….”
가만히 입을 다무는 리에네의 표정을 블랙은 답으로 알아들었다.
“누워 있어요. 나는 옆에서 감시할 테니.”
말을 마친 블랙은 벽난로 앞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
리에네는 침대에 앉아 공연히 이불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의심을 사거나 말거나 더 우겨 볼 수도 있었다. 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고, 당장 뱃속의 아기보다 걱정되는 일이 더 많노라고. 당신이 내게 이럴 권리는 없노라고. 걱정을 핑계대고 사람을 감시한다는 게 정상이냐고. 당신이 나와 약혼을 했을진 몰라도 나는 이곳의 통치자라고.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은 나라고. 하지만 리에네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걱정이 진짜 같아서였다. 저 남자…… 의심하지 않았어. 한 번도. 피 묻은 시트를 본다면 보통은 달거리를 의심하고 추궁하지 않을까. 블랙은 아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그 점이 리에네를 몹시 혼란스럽게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매일 매 순간 의심이 드는데. 사소한 일 하나에도 내 마음을 붙잡아 두고 있을 수가 없는데. 저 남자는 어떻게 저러는 거지.
“……아이에 관한 얘기를 내게 하는 게 어렵습니까?”
이불을 쥔 채 계속 어두워져 가는 리에네를 지켜보던 블랙이 불쑥 물었다.
“……네?”
“내가 매번 아이의 친부를 의식할까 봐 신경이 쓰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프다는 말도 못 했습니까?”
“그건……. ……어쩌면요.”
“필요 없는 일입니다. 내 아이입니다.”
“…….”
이런 게 의심스러웠다. 어째서. 반대로 당신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나는 매사 날을 세웠을 텐데.
“아니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잖아요. 그럴 수는 없어요.”
대답에 날이 섰다.
“진심으로…… 그럴 수는 없잖아요. 사람이니까.”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고, 애쓰는 중입니다.”
“애쓰는 걸로 되는 일이던가요?”
그렇지 않아. 혈육이 죽었다면서요. 그게 시간이 오래됐다고 잊히는 그런 일인가요. 당신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나와 정혼한 사실도 잊지 않았잖아. 그런데 죽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관대한 사람은 없어요. ……믿을 수가 없어.”
“딱히 관대함에서 나온 행동은 아닙니다.”
“그럼 뭔가요.”
“그래야 날 받아 줄 것 같으니까. 원망이나 미움 없이.”
“…….”
“내가 뭘 하면 믿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못 믿는 거예요. 그렇게, 마치 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바른 말을 하니까. 그런 건 이 세상에 없잖아요. 이제껏 내가 사는 세상에는 없었어.
“그건 뭐든지 하겠다는 뜻인가요?”
“……그래야 공주님을 믿게 할 수 있다면.”
블랙이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맹목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어디서나 포식자였다. 맹목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왜 내게는 맹목적으로 구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 안 되잖아.
“대신 공주님도 내게 뭔가를 내놓아야 합니다.”
“뭐를……요.”
“약속. 각오. 뭐든지. 뱃속의 그 아이를 반드시 내 아이로 만들겠다는 그런 것.”
“…….”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보여 줘요.”
리에네가 마침내 이불자락을 놓고 블랙을 마주 보았다.
“뭐든 하겠다는 걸.”
“뭘 바랍니까?”
“페르모스 경이 신전 앞에서 구걸하는 노인을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그 노인을 만나고 싶어요.”
대답에 앞서 블랙이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아니요. 상관 있어요.”
상관이야 아주 많았다.
“나는 내 아이의 친부가 되겠다는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것도 들어 둬야겠으니까.”
“…….”
블랙은 비로소 리에네가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공주님의 마음은 내가 정혼 사실을 알리기 이전으로 돌아간 모양이군요. 내 정체나 의도가 의심스러운 그때로.”
리에네는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좋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대신,”
블랙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벌어졌다. 흰 이가 드러나는 모양새가 꼭 제 마음을 내리긋는 칼금 같았다.
“공주님은 두 번 다시 약속을 무를 수 없습니다.”
블랙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집요하게 리에네의 시선을 따라왔다. * * * 내내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다. 리에네는 블랙이 말한 대로 약이 도착할 때까진 억지로 침실에 붙어 있다, 플램바드 부인이 건네주는 약을 한 번에 꿀꺽 삼키고는 집무실로 향했다. 약은 몹시 썼고, 이런 걸 먹으면 오히려 애가 더 놀라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페르모스는 약에 들어가는 재료를 꼼꼼히 따졌다며 안전하다고 했다.
“어딘가 남아 있을 거야.”
리에네가 찾는 것은 20년 전의 왕실 기록이었다.
“아바마마께서 대관식을 치른 게 21년 전이야. 그렇다면 그 남자가 해를 당한 건 아바마마가 왕일 때 있었던 일이야.”
정혼 얘기가 오갔을 정도면 제법 이름이 있는 가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리에네는 대관식에 참여한 가문들부터 쭉 훑었다.
“‘ㅍ’자가 들어간다고 했나…….”
대관식에 초대받은 열세 개의 가문 중에서 그런 자음을 가진 곳은 없었다.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묵직한 왕실 기록서를 뒤지고 있으려니 팔이 저려 왔다.
“정혼 자체가 거짓말일까.”
리에네는 아무리 살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글자를 노려보다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니, 부인이 잘못 본 걸 수도 있어. 이 중에서 있을지도 몰라.”
리에네는 열세 개의 가문을 꼼꼼히 따져 보았다. 그중 여섯 개는 리세베리 조약을 만들어낸 나우크의 대귀족들이었다. 나머지 셋은 세월이 지나며 대가 끊어지거나 당시의 영화를 잃은 곳이었고, 나머지 네 가문은 20년에 걸쳐 하나씩 나우크를 떠났다.
“시간대가 맞는 게 없어.”
나우크를 떠난 가문들은 모두 블랙이 말한 것과 맞지 않았다. 한참 먼지를 먹어 가며 해묵은 글자들을 살피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어쩌면 시간대가 틀린 걸까.”
블랙이 전부 거짓으로 꾸며낸 게 아니라면 시간대를 정확히 말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보통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말할 땐 정확하게 몇 년이라고 따지지는 않았으니까.
“20년보다 조금 전일 수도 있을 거야.”
리에네는 대관식 이전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그리고 아주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대관식 이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에서 21년 전까지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어이가 없게도 그 부분만 칼로 도려낸 흔적이 빤히 남아 있었다. 왕실 기록서에 누군가 손을 댔다는 일도 기가 막힌데, 하필 딱 알아야 하는 부분이 없다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때마침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페르모스 경이…….”
출입을 허가한 적이 없었던 그가 집무실에 숨어 있었다. 그 이전까지 얼마나 자주 들락거렸는지,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남자가 시켜서?”
사라진 5년간의 기록 중에 블랙에 관한 게 있는 걸까. 그래서 언젠간 이렇게 찾아볼 거라 생각해 미리 없앤 걸까.
“뭐야, 그럼……. 의심해야 하는 게 맞잖아.”
사라진 페이지에 올려놓은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 남자가 이상한 거잖아.”
탁! 리에네가 기록서를 놓고 일어섰다. 사라진 기록을 찾고 있어 봤자 나올 리가 없었다.
“방이라도 뒤져 봐야겠어.”
페르모스가 범인이라면 둘 중의 하나였다. 없앴거나, 숨겨 놨거나. 결과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제 운이 좋다면 아직 없애지 않고 숨겨 두었을 것이다. 리에네가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향했다. 부인의 침실 맞은편, 자신이 어린 시절 쓰던 방이었다. 지금은 페르모스가 그 방을 자신의 집무실처럼 쓰고 있다고 했다. * * * 탁!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만일 잠겨 있었다면 리에네는 기꺼이 문을 부술 생각이었다. 몰래 찾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왕실 기록서는 왕실의 소유물이었고, 당연히 허가받지 않은 인간이 몸에 지니거나 훼손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기어코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신분의 고하를 따질 마음은 없었지만 페르모스가 한 짓은 불충이자 왕실에 대한 모욕이었다.
“어라……? 공주님? 어쩐 일이십니까?”
하지만 페르모스가 이 시간에 이 방에 있을 줄은 몰랐다. 당황할 뻔한 리에네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물을 게 있어 왔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찌 아시고요?”
“……그게 중요하진 않을 텐데요.”
“어, 음……. 그야 그렇지요. 좀 놀라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공주님께서는 누워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리 다니시는 걸 보면 주군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실 텐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리에네는 쓸데없는 대화를 잘라냈다.
“그대가 훔쳐 간 왕실 기록을 어떻게 했죠?”
“……네?”
페르모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알 안경을 치켜들었다.
“제가 뭘 했다고요?”
“길게 말하고 싶지 않군요. 가지고 있다면 내놓아요. 그런다고 죄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조금 가벼워는 질 겁니다.”
“그러니까 뭘 말입니까? 왕실 기록이라고요? 어떤 기록을, 제가 왜, 언제 가져왔을까요?”
“……. 그렇게 발뺌하려는 건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니, 왕실 기록서를 제가 왜 가져오겠습니까? 그냥 보고 외우면 될 것을.”
펄쩍 뛰는 페르모스는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 선명했다.
……아냐, 그래도 모르는 일이야. 이 사람은 워낙 능청스럽잖아. 거짓말에 능숙할지 누가 알겠어.
“내가 볼까 봐서였겠죠.”
“음? 공주님께서 아직 보지 않은 기록서가 있단 말입니까?”
“…….”
그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다.
“저를 의심하시는 건 지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신께 맹세코, 저는 절대 왕실 기록서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리에네가 믿지 못한다는 얼굴을 하자 페르모스가 무해한 표정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티와칸에서 말하는 전쟁의 신이 누군지 아십니까?”
“……아뇨.”
“로드 티와칸입니다.”
“그랬군요. 그게 왜…….”
“전쟁의 신께 맹세한다는 건 주군의 이름을 걸겠다는 겁니다. 티와칸에서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써먹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
그 말을 하는 페르모스의 얼굴이 너무도 확신과 자부심에 차 있어서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전쟁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용병에게도, 아니 그런 용병이니 오히려 신념이 절실했다. 죽음과 돈밖에 없는 삶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신념뿐이었다. 티와칸에게는 그게 블랙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더는 내 의심을 강요하지 않겠어요. 부디 그 말이 진실이길 바랍니다. 그대 수장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제가 살면서 절대 하지 않을 짓이 주군의 이름을 더럽히는 짓입니다. 그런 인간은 티와칸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는 건 알겠어. 리에네가 한숨을 가만히 삼켰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범인을 찾으실 생각입니까?”
고민이 얼굴에 그대로 보였던지 페르모스가 물었다.
“네.”
“그렇다면 제가 거들겠습니다. 마침 공주님께서 대사제를 죽인 범인에 대한 단서를 주셔서 간만에 여유가 있던 참입니다.”
“그래 주겠어요?”
“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주군이나 그 수하나. 다들 하나를 주면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했다. 한통속이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데요.”
“침실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가만히 누워 계십시오. 주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종제의 행방을 아는 노인을 보기를 원하셨다고요? 지금 성으로 데려오라 일렀으니 도착하면 제가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푹 쉬시는 겁니다.”
뭔가를 얻어내려고 했다. 받으려는 그들보다, 내줘야 하는 리에네에게 더 좋은 것을.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아요.”
“공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군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제가 도움이 되길 바라신다면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만일 공주님께서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으으, 생각도 하기 싫군요. 아무튼 결과가 아주 안 좋으리라는 건 좀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
페르모스가 한 말은 제 어딘가를 한 대 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를 위해서, 라고. 그건 그 남자가 나를 그렇게나 걱정한다는 말로 들려. 그 남자는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애써 보겠다는 말이면 될까요?”
“아니요. 안 됩니다. 가만히 누워 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약속해요. 반드시 범인을 꼭 찾겠다고. 진짜 범인을요. 전쟁의 신께 맹세코.”
페르모스가 주군을 위해 가짜 범인을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페르모스는 선뜻 손을 들고 맹세를 했다.
“그래야만 누워 계실 거라면, 기꺼이요.”
“……고맙군요.”
그래서 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저렇게 굴 수도 있는 건지.
“어서 돌아가십시오. 공주님께서 침실로 돌아가셔야 저도 움직이겠습니다. 약은 다 드셨습니까?”
결국 리에네는 페르모스의 배웅을 받아 침실로 돌아왔다. 페르모스는 철저하게도 리에네의 방문을 감시할 용병을 하나 세워 놓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