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음모2021.09.15.
“아, 잘못 들은 모양이에요. 들어올 필요 없어요.”
“원하신다면 곁에 있겠습니다. 방이 좁은 게 검술 연습을 하기에 딱일 것 같은데.”
티와칸식 화법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저를 웃게 만들어 곤란했다. 리에네는 작게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저었다.
“검술 연습이 보고 싶어지면 부를게요.”
“예, 그러십시오. 바로 요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티와칸이 알현실을 나가는 순간까지 절그럭대는 칼 소리가 계속 울렸다.
“이 무슨 횡포를……!”
엘라로이덴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다른 귀족이 말렸다.
“아직 밖에 있소이다. 말을 하려거든 목소리라도 낮추시오.”
“쯧……! 클라인펠터 경은 어디 있습니까? 설마 벌써 목을 쳤습니까?”
엘라로이덴이 리에네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두 귀족의 자세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리에네를 향한 태도마저 근본적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두 가문은 각기 사병을 넉넉히 데리고 왔다. 알현실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그들은 예법이 허락하는 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이 또한 리세베리 조약에 근거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내내 내 앞에서 자기들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지를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러나 오늘은 리에네가 달랐다. 오늘은 리에네도 눈치 볼 것 없이 무례를 지적할 수 있었다. 문밖에 든든히 버티고 선 티와칸 덕분이었다. 여전히 블랙을 의심하면서도 그의 존재에서 위안뿐 아니라 현실적인 이득을 챙기는 것도 자신이었다. 자꾸만 자신이 모순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원로께는 오늘만큼은 체면을 차려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는 게 늦었군요. 티와칸이 아르사크 가문의 수호기사단이 되면서 왕실 예법이 좀 더 엄격해졌습니다. 이전과는 다를 테니 그리 아세요. 그리고 클라인펠터의 목은 아직 잘 붙어 있습니다.”
“크음……. 그래야지요.”
그때서야 원로들이 뒤를 힐긋 살폈다.
“이제 나를 보자 한 용건을 말하세요. 다시 말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오래 앉아 있을 마음이 없습니다. 대의회 소집이라면 아직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왜 여기까지 왔나요?”
“대의회를 위해서입니다. 대의회 소집은 마땅히 대의장과 우선 얘기를 나눠야 합니다.”
리에네가 작게 웃었다.
“기도 안 차는 소리를 하는군요, 두 분 원로께서. 그새 나이를 더 드시긴 했나 봅니다. 대의회 소집 안건이 뭔지는 알고 있잖습니까.”
“그 안건부터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우크의 대의장께 죄를 물을 수 있는 권리가 아르사크의 딸에게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고자 온 겁니다.”
……좋은 말 할 때 곱게 풀어 주라는 소리겠군. 리에네는 그럴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모순적이고 이기적이었지만 즐거운 고민이었다.
“리세베리 조약 때문에요?”
“그렇습니다.”
“저런. 그래서 대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거잖아요? 대의장에게 알맞은 처분을 내리라고요. 나머지는 걱정 마세요. 증거라면 차고 넘치게 있으니까.”
엘라로이덴이 회색 눈썹을 불쾌하게 구부렸다. 리에네가 기억하기로 그는 반쪽의 린든 클라인펠터 같은 인간이었다. 탐욕스럽고 고집이 센 데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뼛속까지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하는 짓도 딱 절반 정도 무례하고 무도했다.
“그렇다면 원로들은 대의회 소집을 거부하겠습니다.”
그런 말이 나오리라는 것은 알란드를 부르기 전에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대의회는 없는 걸로 하지요.”
리에네가 선뜻 이렇게 나오자 오히려 원로들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럼 클라인펠터 경은 지금 당장……,”
“지금 당장 클라인펠터의 유죄를 밝혀낼 도리가 없으니 계속 감옥에 넣어두는 수밖에요. 어쩌겠어요. 시시비비를 밝혀 풀어주고 싶어도 원로들께서 싫다시면 저로서는 도리가 없는 것을요. 유감입니다, 두 분. 두 분의 뜻은 지하에 있는 클라인펠터에게 빠짐없이 잘 전하겠습니다.”
“공주님!”
엘라로이덴이 울컥 화를 토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대의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그대들에게 있듯, 아르사크의 핏줄에는 대의회를 소집할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리세베리 조약을 존중하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내가 그대들의 삿대질을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죠?”
“지금 하는 짓 어디에 존중이 있단 말입니까!”
“클라인펠터의 목이 여전히 붙어 있는 게 존중입니다. 그는 티와칸의 수장에게 들키는 즉시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했어요.”
“…….”
“……!”
그 말은 원로 둘의 입을 잠시라도 다물게 만들었다.
“그럼 대의회는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제 볼일이 끝났을 테니 다들 돌아가세요.”
리에네가 더는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마지못해 입을 뗐다.
“그…… 그런 말은 꼭…… 하진 않았습니다. 괜히 뜻을 왜곡하지 마시지요, 공주님.”
“왜곡이라니요. 대의회 소집을 거부하겠노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대의장의 뜻이 포함된 게 아니니 무효입니다.”
다른 귀족의 말에 엘라로이덴이 옳다구나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맞습니다. 대의회의 소집을 결정하는 데는 모든 원로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리에네가 일부러 짜증을 드러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요?”
“결정에 앞서 대의장을 만나야겠습니다.”
“…….”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짜증 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여섯 귀족이 머리를 맞대면 단 한 번도 좋은 일이 벌어진 적이 없었다는 기억이 불쾌한 감정을 불러왔다.
* * * 그래도 법이 그렇다니 끝내 거절할 수는 없었다. 리에네의 말을 따라 티와칸은 두 귀족을 지하 감옥으로 안내했다. 둘 다 험한 장소에 발을 들이는 만큼 호위 병력이 필요하다고 우겨대는 통에 실랑이가 꽤 길게 벌어졌다. 그런 이유로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인원이 꽤 많아졌다. 말씨름이 지겨웠던지 어디 네 마음대로 호위를 붙이라고 말한 티와칸이 그 숫자를 가뿐히 넘어서는 경비대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제 호위병들을 겹으로 에워싼 경비대와 티와칸을 본 귀족들은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리에네는 그 꼴을 보며 소리 내어 웃지 않기 위해 배에 힘을 꾹 주고 있어야 했다.
“아니, 이런……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취급을…….”
두 귀족은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며 내내 불평을 중얼댔다.
“거, 떠들 시간이 있으면 좀 더 빨리 걷든가. 뒤에서 길이 밀리잖습니까.”
티와칸이 그럴 때마다 칼자루를 절그럭대며 핀잔을 주었다. 평소 그 어디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던 귀족들은 기가 막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도 칼 소리는 무서웠다. 그 칼을 만지작대는 게 티와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이런 길은 걸어 본 적이 없어서…….”
“맞아. 넘어질 것 같고 그래서…… 조, 조심하느라…….”
그래서 빨리 못 걷겠다는 변명이었다.
“그럼 구르든가. 잘 구르면 넘어지는 것보다 덜 다칩니다.”
두 귀족은 필사적으로 화를 참았다. 여기서 화를 냈다간 저 짐승 같은 놈들이 얼씨구나 하고 계단 아래까지 굴려 버릴 것 같았다. 사실 별로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티와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귀족들을 굴려 버린 뒤 그러게 빨리 가지 그랬냐고 태연하게 핀잔을 줄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속도가 조금은 빨라졌다.
“아, 뭐야. 뭐 이리 많이 왔어.”
감옥 입구에 도착해서는 역시나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제정신이냐? 이 인간들이 여기서 어떻게 다 움직이겠다는 거야?”
감옥 자체는 넓었지만 통로가 몹시 좁았다. 탈옥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됐다. 난들 좋아서 데리고 왔겠냐.”
“다는 못 들어와.”
“그럼 적당히 추려서 밖에 세워 둘까?”
“정신 사나워서 안 돼. 빈방에 처넣어서 기다리게 해.”
“알았다.”
소심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인원이 나뉘었다. 사병은 셋, 티와칸은 다섯이었다. 거기에 두 귀족이 더해진 총 열 명의 인원이 클라인펠터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여깁니다.”
두 명의 경비가 지키고 있는 감옥 문이 열렸다. 감옥이 좁아 당연히 열 명이나 되는 인원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의장과 원로 둘이 모였으니 이제 여기는 대의회나 다름없다. 자격이 안 되는 자들은 감히 들어올 생각을 마라.”
감옥 문이 열리자 엘라로이덴이 잠깐 까먹고 있던 권위를 내세웠다. 티와칸은 딱히 시비를 걸려고 들지 않았다.
“좋을 대로. 대신 창은 열어 두겠습니다.”
창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감옥 문에 작게 만들어 놓은, 음식을 넣어 줄 때 쓰는 창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창을 열어 두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그럼 문을 열어 둘까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서!”
“감옥의 규칙이 그럽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가시든가.”
“말도 안 돼! 그런 규칙이 어디에 있는데!”
“아, 새로 생겼습니다. 이제 나우크 성의 경비를 담당하는 건 티와칸이라. 그 정도 규칙이 있어야 사고가 안 생기겠더라고.”
용병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즉석에서 지어낸 얘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계속 우겨 봤자 통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다. 고작 세 명 남은 사병을 힐긋 돌아보며 엘라로이덴이 탄식을 내뱉었다.
“……할 수 없지. 문을 열어라.”
“어차피 그럴 걸 괜히. 쯧.”
티와칸의 눈짓에 경비대가 칭칭 쇠사슬이 감긴 감옥 문을 열었다. * * *
“클라인펠터 경!”
“어찌 된 일입니까! 대의장께서 감옥이라니!”
린든 클라인펠터는 경악에 찬 얼굴들을 마주하며 얼굴 근육을 꿈틀 움직였다.
“……이제야 오다니.”
뭐 이리 굼뜨냐는 힐난에 두 귀족이 당황해 눈동자를 흔들었다. 린든 클라인펠터의 몰골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 오만하고 거침없던 나우크의 대귀족이 지금 양손이 부러진 채 감옥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양손에 댄 부목은 어찌나 성의가 없고 허술한지 제대로 된 의사가 보살폈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의 클라인펠터는 처음이었다.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대의장을 뵙기 위해 이 위험한 곳까지 내려온 몸에게.”
“어차피 와야 했잖소! 내가 여기 갇혀 있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른단 말인가? 티와칸이 이 왕국을 바닥부터 뒤엎어서 제 입으로 꿀꺽 삼키겠다는 얘기지. 그리되면 경들은 무사할 것 같소?”
엘라로이덴이 펄쩍 뛰며 등 뒤로 문을 가리켰다.
“경. 말을 가리시오. 창이 열려 있소.”
“어때서. 딱히 모르는 얘기도 아닌데. 이런 것도 생각을 안 했다면 경들은 머리가 아니라 머리 모양을 한 석상을 달고 다녔다는 얘기요.”
“경! 어찌 말을 그리하시는 게요! 지금 경의 편에 설 자들이 우리밖에 더 있소?”
“그런 것치곤 너무 성의가 없어 보이지 않나. 설마 감옥에 빈손으로 온 게요?”
“허…… 어째서 그런…….”
하지만 린든 클라인펠터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방문자가 온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린든 클라인펠터가 열심히 입을 놀리며 엘라로이덴과 함께 온 귀족에게 손짓을 했다.
“내가 여기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 흐린 눈에는 보이지 않소? 잘 구운 한 조각의 빵이 그리울 지경이오!”
다른 귀족이 눈치를 보며 린든 클라인펠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재빨리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로 가서, ……를 하시오. 서둘러서.’
얘기를 듣고 난 귀족이 놀라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
“알아들었으면 나가서 뭐라도 입에 넣을 만한 것을 가져오시오! 그리 멍청하고 안일하게 굴지 말고! 내가 무사해야 대의회도 살아남을 게 아니오!”
린든 클라인펠터는 귓속말을 지우려는 듯 제법 화가 난 것처럼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엘라로이덴이 아직 영문을 모르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댈 정도였다.
“……아, 알겠소. 많이 고된 모양이오. 그리하겠소이다.”
그 고분고분한 말에 엘라로이덴이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 아니……? 이대로 가라고? 대의회는! 대의회는 그럼 어쩌고?”
다른 귀족이 눈치가 약간 부족한 엘라로이덴을 잡아끌었다.
“지금 그게 문제겠소. 대의장께서 몸이 곤해 제대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 같으니 일단 배부터 채워 드립시다. ……어이! 문을 열어라! 이만 나가겠다!”
느릿느릿 감옥 문이 열렸다.
“왜 벌써 가려고? 기왕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창을 열어 놓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렸을 텐데 공연히 약을 올리려는 의도였다.
“이, 일이 그렇게 되었다. 어서 나가게나 해라.”
“그것 참. 여기까지 면회를 오기에 사이가 좋은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네.”
어쨌거나 문이 열렸고, 두 귀족은 무릎을 덜덜 떨어 가며 가파른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그날 저녁, 엘라로이덴 가에서 지하 감옥으로 음식을 담은 바구니가 배달되었다. 따라서 지하 감옥의 죄수에게 음식을 전달하는 일은 금지한다는 새로운 규칙이 즉석에서 생겨났다. 엘라로이덴 가의 심부름꾼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