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복수와 청혼2021.09.19.
“…….”
“…….”
묘한 침묵이 흘렀다. 리에네는 사실에서 노인을 맞이했다. 알현실이나 회당은 왕족이 아닌 다른 자가 앉을 의자가 없기에 다리가 불편한 노인에게는 불편할 장소였다. 약속대로 노인을 데려다준 블랙은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리에네는 노인이 단둘이 있는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까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나 있는 눈을 응시했다. ……상처가 있거나 하진 않네. 블랙이 노인에게 뭔가를 강제하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리에네가 혼자서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그 남자를 어지간히도 못 믿나 봐. 사실은 그 반대였다. 믿고 싶으니까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일말의 의혹이라도 없애고 싶어서.
“내게 해줄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편하게 듣고 싶어서 마련한 자리니 편하게 입을 열면 됩니다.”
“어떤…….”
노인은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소리를 흘렸다.
“아크사크의 딸은 나우크의 죄인. 곧 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는 복수를 할 것이다. 내게 그러지 않았나요?”
“…….”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하세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죄인이라 했나요?”
“…….”
노인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답을 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나는 그대가 죽어 뼈만 남더라도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겁니다.”
치사하긴 하지만 무덤도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협박을 써야 했다.
“아르사크…… 이 땅에 가뭄을…… 불러온…… 나우크의…… 죄인…….”
결국 노인이 띄엄띄엄 입술을 뗐다.
“계속 해요.”
“그래……서 죽은…… 많은 목……숨……. 그 죄…… 아르사크 가문의…… 피가 씻…….”
“그래서요?”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긴 했다. 선왕 때부터 너무 오래도록 가뭄이 이어지자 신의 저주라느니 왕의 죄라느니 하던 이들이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더 이상 같은 말이 나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 번 내뱉은 말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 언젠……가는…… 신께서 복수를…….”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감히.”
리에네가 노인을 노려보았다.
“그대가 처음 입을 열었을 때는 그런 뜻이 아니었잖아요. 복수로 인해 아르사크의 딸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 했어요. 신의 복수는 인간을 피 흘리게 하는 방식으로는 이뤄지지 않아요. 그런 복수는 인간의 것입니다.”
“거짓…… 아, 아니…… 아르사크의 복수는…… 신, 께서…….”
“그대는 로드 티와칸을 알아봤어요.”
“…….”
노인의 눈이 순간 작게 일그러졌다. 리에네는 그것이 당황이라고 해석했다.
“로드 티와칸을 어떻게 알고 있나요? 어린 시절에 인연이 닿았나요?”
“…….”
“로드 티와칸의 이름이 뭔가요?”
“…….”
노인은 입을 다문 채 리에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은 진실을 알면 감당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듯했다.
“대답해요.”
리에네는 뱃속에서 지그시 솟구치는 불안감을 씹었다. 말해, 진실을. 그게 뭐든 들어주겠어. 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야겠어.
“헨튼.”
노인의 입에서 너무 또렷한 말이 들려왔다. 잠시 다른 사람이 아닐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헨튼?”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헨튼의…… 둘째 아……들.”
“그게 로드 티와칸이었다는 건가요?”
“…….”
노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을 기어코 내뱉었다는 표정이었다. 리에네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노인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감춰 둔 사실을 밝히고 나자 더는 입을 다물 생각이 사라진 사람의 태도였다.
“클리마 종제는 왜 때렸나요?”
“보았……으니.”
“무엇을요?”
“시체…… 관에 넣는…… 것을.”
“아…….”
역시 그랬다. 종제 클리마가 범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클라인펠터 가에서 부리는 심부름꾼이며, 거기엔 암살 같은 끔찍한 일도 포함이 된다는 뜻이었다. 리에네는 잡는 순간 피가 질척하게 흘러내리던 클리마의 몸 상태를 떠올렸다. 속죄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게…… 그래서였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죄책감을 못 이겨 제 몸에 채찍질을 하는 사제가 어째서 클라인펠터 가의 암살자 노릇을 하고 있을까.
“답을 해주어 고마워요. 이젠 원하는 곳으로 가도 좋습니다. 머물 곳이 필요하다면 성에 거처를 마련해 주겠어요. 아니면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무덤.”
“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곧 죽을 목숨……. 편히 있을…… 필요 없…….”
말을 마친 노인은 지팡이로 바닥을 짚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백 마디 말보다 단호한 동작이었다. 아무리 푹신한 침대를 마련해 준다고 해도 노인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부디 그대가 가는 곳에 바라던 안식이 있길.”
리에네가 의자에서 일어나 먼저 알현실을 떠났다. 일부러 문을 열어 놓고 간 것은 노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 * * 답을 들었는데도 마음이 썩 편치만은 않았다. 리에네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지 않고 후원으로 향했다. 여전히 삭막하고 볼품없는 곳이었다. 뾰족한 가시덤불밖에 남지 않은 정원을 느리게 걸으며 리에네가 생각을 가다듬었다.
“헨튼. 헨튼. 헨튼…….”
아무리 곱씹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낯이 익었다. 기록서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 정도의 가문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기억하는 이 하나 없을, 그런.
“아니지……. 노인이 있잖아.”
몸이 망가진 노인을 떠올리면 제 잘못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무거워졌다. 상처투성이의 종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냥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뭐라도 챙겨 보내야겠어. 옷가지나 음식이라도. 리에네가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블랙이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다른 생각들은 까맣게 사라졌다. 그가 제 머릿속에서 차지하는 분량을 누가 그림으로 그려 준다면 리에네는 도무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블랙에 비하면 다른 건 아주 작은 점 수준이었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리에네는 그가 가까워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봤습니다.”
“어디서요?”
“동쪽 탑에서.”
그럼 알현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여긴 위험한 곳이라 오지 않도록 말리고 싶었지만 생각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기다리셨어요?”
“네.”
이 남자는 어째서…… 매번 나를 위해주는 것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괜히 블랙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난처해진 리에네가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여긴 위험하지 않아요. 후원인데요.”
“화살이 날아온 적이 있으니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 나우크 성에 그런…… 몰랐어요.”
리에네가 놀란 얼굴로 있자 블랙이 앞을 가리켰다.
“하나는 찾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까?”
“네. 노인을 그냥 보낸 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런 거라면 돌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페르모스가 알아서 할 겁니다.”
“먹을 거라도 들려 보내고 싶은데.”
“네.”
짧은 대꾸에는 그런 것도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훌쩍 마음이 놓인 리에네가 개운한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해요. 그런 일까지 해주시다니.”
“공주님을 흉내 냈을 뿐입니다. ……그럼 산책을 마저 하겠습니까?”
리에네는 눈앞으로 다가오는 팔을 보았다. 의도는 선명했다. 거기에 제 팔을 끼우고, 다정한 연인들처럼 어깨를 붙인 채 조곤조곤 얘기를 나누며 후원을 한 바퀴 돌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건가. 나는 이제 이 남자에 대한 모든 의심을 털어 버리게 된 걸까.
-뭐든 해줘요.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대신 그 대가로 공주님은 두 번 다시 약속을 무를 수 없습니다.
그게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리에네가 노인이라는 패를 꺼내들었을 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겁든 말든, 리에네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로드 티와칸의 이름을 들었어요.”
리에네가 머뭇대다 블랙이 내민 팔에 손을 얹었다. 블랙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나란히 산책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노인이 알고 있더군요.”
“뭐라던가요?”
“로드 티와칸이 말씀해 주세요.”
당신의 이름을. 당신이 진짜 누구인지.
“……헨튼.”
같은 이름이 나왔다. 그럼 그 이름이 진짜인 걸까. 블랙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걸까.
“내가 이 땅을 떠나기 직전 그게 내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꿨나요.”
“딱히 바꾼 건 아닙니다. 그 뒤로는 이름이 뭐든 별로 상관없게 돼버려서.”
“…….”
용병단의 삶이 어떤지 리에네는 정확히 몰랐다. 그래도 어린아이가 용병단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블랙은 제 입으로 말하지 않은, 무수한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더 얘기해 주세요. 죽임을 당했다는 혈육은 부친이었나요?”
“네.”
담백한 대꾸에는 딱히 거짓된 느낌이 없었다. 블랙은 남의 일처럼, 혹은 오래전에 이미 잊힌 과거처럼 말을 했다.
“누가 죽였는지도…… 알고 있나요?”
“그때는 어릴 때라 정확한 정황은 다 모릅니다. 다만 선친을 죽인 자들의 건틀렛에 새겨진 문양은 기억합니다.”
“어떤 것이었나요?”
“나뭇잎.”
“……!”
리에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나뭇잎이라면…….”
월계수 잎은 클라인펠터 가의 상징이었다. 투구와 깃발에 늘 월계수 잎 문양이 들어갔다. 라피트가 화살 뒤에 나뭇잎을 다는 것도 가문의 전통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럼…….”
리에네가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블랙의 원수가 클라인펠터였다. 클라인펠터의 장자는 제 연인이었고, 저는 블랙의 청혼을 거절하기 위해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클라인펠터 가에서 블랙의 피붙이를 죽였다. 블랙은 리에네가 뱃속에 클라인펠터 가의 핏줄을 품고 있다고 믿는 중이었다. 헤어진 연인이 말했다. 블랙은 복수를 하기 위해 왔다고. 블랙은 청혼을 먼저 했다. 복수. 청혼. 전혀 같을 수가 없었던 두 개의 단어가 클라인펠터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저는 클라인펠터의 신부가 될지도 몰랐으니까. 클라인펠터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반응을 보일까 봐.”
블랙은 비틀대는 리에네를 받쳐 들었다.
“나는…… 그럼 왜 아이를…….”
“누구 아이든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또 말해야 합니까?”
블랙은 자신은 이미 여러 번 얘기했다는 그런 뜻을 담아 리에네의 이마 위에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나는 복수를 하는 것보다 공주님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공주님은 내가 클라인펠터를 죽이는 걸 원치 않으니 내버려둘 생각이고. 이 말이 아직도 믿기 어렵습니까?”
“그런…… 그런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럴 수가 있어요. 어떻게…….”
“나우크를 떠난 뒤로 나는 한곳에 머물러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이름이 티와칸이 된 이후에는 더더욱.”
머리칼을 전부 쓸어 넘긴 블랙은 말끔히 드러나는 동그란 이마를 한 번 쓰다듬었다.
“전쟁이 끝나고 내게도 돌아갈 집이 필요했습니다. 그저 지붕이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집이라고 여길 수 있는 곳이.”
이상한 일이었다. 원수의 핏줄을 품고 있는 여자의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이 여느 때처럼 더없이 다정했다.
“내게는 집과 가장 비슷한 게 공주님입니다. 공주님은 아니었어도 나는 공주님을 내 정혼자로 기억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나는 변명에는 재주가 없습니다. 내가 이름을 밝히면 서툰 변명이 더 어려워질까 봐 들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계속 감추고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계속 그 순간에 머물렀을 테니까.”
“…….”
리에네는 그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 눈으로 블랙을 응시했다.
“눈을 뜨면 공주님이 내 옆에 있고, 나는 허락도 눈치 볼 것도 없이 입 맞출 수 있는 그 순간.”
“…….”
“그건 내가 생각하던 집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