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귀가2021.09.22.
리에네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은 자신에게도 가장 충족적인 시간이었다. 이 넓은 나우크 성은 어릴 때부터 살았어도 제 집이 아니었다. 아니, 집이라고는 해도 너무 텅 빈 채였다. 블랙이 와서 비로소 빈 곳이 채워졌다. 진짜 집처럼. 떨리는 손이 블랙의 옷자락을 감아쥐었다.
“그래도…… 되는 건가요.”
“됩니다. 공주님이 원한다면.”
“내가 원해도…… 나는 자격이 없잖아요. 나는…… 여전히 허락 못 해요. 클라인펠터를 죽이는 건. 그건 이 땅에서 절대…….”
“죽이지 않습니다. 복수를 이유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거죠? 눈앞에서, 부친이 죽었는데. 그리고 당신은 오래도록 이름을 잃고 지내야 했는데.”
“나는 집이 더 갖고 싶으니까. 그래서 복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건 내게 간단한 일입니다.”
“…….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럴 수 없잖아요.”
“왜 안 됩니까?”
블랙이 피식 웃었다.
“공주님이 여덟 살이라고 생각해 봐요. 가진 건 아무것도 없고, 몸은 다쳤고, 뒤에서는 누가 쫓아올 것 같아서 도무지 발을 멈출 수 없는 여덟 살이라고.”
“…….”
“배는 고프고 몸은 춥다면. 열이 나서 몸은 떨리고 자꾸만 헛것이 보인다면. 그 순간에는 뭐가 가장 절실할지.”
대답할 수 없었다. 리에네는 그런 순간에 있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때부터 집이 갖고 싶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내가…….”
리에네는 이마를 블랙의 가슴팍에 파묻었다.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동시에 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여덟 살 아이처럼 보일까 봐.
“그래도 못 믿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글쎄요……. 그래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블랙이 손을 들어 리에네의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쓰다듬다 고개를 숙여 입술을 찍기도 했다. 그가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채 나직하게 말했다.
“공주님은 나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했잖습니까.”
“애써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요. 무를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나는 오늘부터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겁니다. 공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한 침대에서 자고 눈을 뜨면 내가 하는 키스를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내가 끝내 못 믿는다면요.”
“기다리면 되겠지. 공주님이 나와 살면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땐 믿을 테니까.”
“…….”
그 말에는 더 이상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리에네는 양팔로 블랙을 감았다. 블랙이 대답처럼 리에네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입술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할머니는…… 너무 앞서 나갔어요.”
“인간은 다 늙을 텐데요.”
“그래도…… 벌써 그런 모습을 상상하시는 건 싫어요.”
“그거 압니까.”
블랙이 정수리에 닿은 입술을 부드럽게 머리칼에 문질렀다.
“공주님이 뭔가를 싫어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기쁜지.”
키스를 하기 전에 일일이 물어보는 게 싫다고 했었다. 할머니가 된 모습을 미리 상상하지 말라고 했다. 아주 뜨겁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부리는 투정처럼.
“……나도 그래요.”
“나는 뭔가를 싫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기뻐요.”
당신이 내 무엇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나는 당신의 원수를 살려두라 했고, 원수의 아이를 낳겠다 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매번 의심하고 마음을 뒤집었는데. 그래도 단 한 번도 싫어하지 않았다는 게. 염치가 없지만, 나는 그래서 너무 기뻐요. 블랙은 리에네가 속으로 삼킨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얼굴을 떼어내고 다짜고짜 리에네의 입술을 삼키지는 않았을 테니까. 입술이 아릿하게 시작된 키스는 무섭도록 달았다.
* * *
“부인 말을 듣길 잘했어요.”
리에네는 블랙이 입을 혼례식 예복의 밑단에서 손을 뗐다. 밑단을 고치는 바람에 그 아래 촘촘히 수를 놓아야 했는데, 플램바드 부인이 은사로 해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바람에 제법 큰 지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수를 다 놓고 보니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어울렸다.
“자수는 그래도 제가 공주님보다 낫지 않습니까. 암만요. 잘하셨습니다.”
“근사하네요.”
블랙이 예복을 입은 상상을 하느라 잠시 뺨에 홍조가 피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공주님?”
“어, 네?”
생각이 흩어지고, 리에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부인을 돌아보았다.
“좋은 일이요? 갑자기 왜요?”
“안색이 확 달라지셔서요. 아침하고는 아주 딴판입니다.”
“아…….”
멋쩍어졌다. ……그렇게 표시가 나나.
“그게…… 오해가 풀려서요.”
“아니, 공주님. 오해가 있으셨습니까?”
대번에 부인의 안색이 변하는 걸 보면 대상을 착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요. 부인한테 있었다는 게 아니라…… 로드 티와칸께요.”
“아……? 아아, 그러셨습니까? 아니, 잠깐. 잠깐만요. 그럼 풀렸다는 오해가…….”
“네.”
리에네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시선을 돌렸다.
“로드 티와칸은 복수할 생각이 없대요. 저는 그걸 믿지 못했는데 제가 납득할 만큼 충분히 얘기를 해줬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그런데 그런 엄청난 일을…… 말만으로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그래서 감추고 있었대요.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으니까.”
“아이고, 그랬던 게로군요. 그럼 성으로 불러들인 노인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드린 겝니까?”
“그건…….”
노인을 생각하면 아직도 미묘하게 아귀가 어긋난 부분이 남아 있었다. 복수로 인해 피 흘리게 되리라고 지목했던 게 클라인펠터가 아닌 아르사크 가문이라는 점이 그랬다. 노인은 그게 가뭄 탓이라고 했지만 그건 어쩐지 얼버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냉철히 따지고 보면, 몸이 성치 않아 구걸을 하며 사는 이가 클라인펠터 가가 저지른 일을 자세히 알 수도 없지 않을까 싶었다. 단지 노인은 우연하게 헨튼 가가 살해되었으며, 그의 어린 아들이 도망쳤다는 것만 알고 있던 게 아닐까. 헨튼 가의 친척이라거나 지인일 수도 있었다.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잊지 못해 남을 탓하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네. 로드 티와칸의 옛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세상에나. 그럼 정말로 그자가 나우크 출신이었던 겁니까?”
“네.”
“그럼 공주님과 정혼 얘기가 있던 것도…….”
“그건 역시 정식으로 오간 얘기가 아닌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명망 있는 가문이 아니었을 테고요. 정혼을 바라긴 한 것 같은데…… 흠. 그래서 클라인펠터의 원한을 산 걸까.”
“네? 클라인펠터라 하셨습니까?”
“헨튼 가문을 없앤 게 클라인펠터가 한 짓 같아요.”
“헨튼……?”
“네. 로드 티와칸의 가문이에요. 혹시 알고 계시나요?”
“아니요. ……묘하게 낯이 익은 듯하지만 기억나는 건 없습니다. 헨튼이라……. 제 아들놈이라면 알까 싶네요.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외우고 다니는 게 많았으니까요.”
“아, 지금은 샤르카 왕국에 있다고 했죠?”
“네. 거기서 공부를 하고 있지요. 학자가 되어 왕실 지원금으로 무슨 연구를 할 거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나우크로 돌아오는 건 꿈도 안 꾸고 있지요. 아들은 아마 샤르카 왕국의 사람으로 죽을 생각인가 봅니다.”
“……보고 싶겠어요. 무척.”
“아들자식이란 다 그런 게지요. 사내들은 태어난 곳을 집이라 여기는 게 아니라, 제 발로 나가 찾은 곳을 집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그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가 바라던 집과 가장 닮은 게 자신이라는 말은, 그래서 아프고도 따스했다. 다치고 지친 몸으로 오래도록 헤매다 마침내 찾은 목적지라는 말 같아서. 그렇게나 의미가 크다는 말이라서. ……그게 나여도 되는 걸까. 그 남자에게 나는 내내 내 것을 지키려 아등바등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인데.
“그런데 공주님, 저는 통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아들 얘기로 잠깐 길을 돌아갔던 대화가 제자리를 찾아왔다.
“클라인펠터가 그자의 원수라면 의도가 너무 빤한 게 아닙니까? 공주님께 청혼한 이유 말입니다. 그리고 아기를…… 클라인펠터의 핏줄이라 알고 있을 텐데요.”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알아요. 나도 꼭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자는 아니랍니까?”
“복수를 해서 나를 잃고 싶진 않대요.”
“그건…….”
“저는 클라인펠터의 죽음을 허용할 수 없다고 했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 순간부터 나우크는 반으로 갈라져서 전쟁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럼 어서 말을 하세요.”
얘기를 듣던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말을요?”
“클라인펠터의 아이를 가진 적 없다고 말입니다.”
“그야…….”
“당장 말씀을 하세요, 공주님. 그래야 그자의 진짜 속내가 뭔지 확실해질 게 아닙니까. 공주님을 위해서 원한도 잊겠다면, 아이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저 기뻐하겠지요.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대로 아이에게까지 해코지를 할 속셈이었다면 본색이 드러날 겁니다.”
“……그 말이 맞아요.”
하지만 마음을 작게 짓누르는 게 있었다. 그건 내가 이제껏 그 남자를 속여 왔다는 얘긴데…… 실망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진 않을까.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그게 맞지요. 공주님이 그자의 입장이라면 말입니다, 몹시 큰 원한을 그냥 참고만 있는 게 아닙니까. 공주님을 아끼는 마음이 진짜라면 그자가 참아야 하는 다른 감정들은 더욱 괴로울 겁니다. 원수의 아이를 제 아이처럼 대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지요.”
“그 말도 맞아요. 내가 그 남자한테 정말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말하세요.”
“……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요.”
부인이 마음을 놓았다는 얼굴로 리에네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들겼다.
“네, 부디 그러세요. 이번에도 제 말대로 해서 잘됐다고 하실 겝니다. 틀림없지요.”
“그러게요.”
조금 걱정이 되지만…… 말하는 게 맞아. 꼭 말을 해야 해. 그 남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거잖아. 괜찮다고는 해도 힘들지 않을 리가 없어. 리에네가 다짐을 하듯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플램바드 부인과 리에네는 늦도록 고쳐서 완성한 예복을 깨끗한 천으로 잘 감싸 옷장 속에 잘 넣어둔 다음 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 * *
“공주님. 왜 이불을 하나 더 꺼내십니까?”
침대 정리를 거들던 부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몹시 난처한 질문이었다.
“그게…… 큼, 오늘부터 한 침대를 쓰기로 했거든요.”
“네?”
“말을 다 하려면 복잡한데…… 단지 그런 의미는 아니고…… 사정이 좀 있어요.”
여기에 얽힌 약속을 전부 이해시키기란 무리였다. 부끄럽다기보다는, 블랙과 한 칸씩 쌓은 감정의 탑이라서 그랬다. 바닥 칸부터 차근히 보아 오지 않은 자에게 갑자기 꼭대기를 가리키며 이해하라고 하는 건 무리였다.
“로드 티와칸이 내 몸을 아끼지 않을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런 쪽으로는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부인.”
“아니, 그런 말씀을 드린 게 아닙니다.”
부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미 혼인 날짜도 다 된 분들께 제가 어찌 침대를 쓰는 문제로 잔소리를 하겠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공주님은 지금 달거리 중이라 잠자리는 피하시는 게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아…….”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에 리에네가 콧등을 찡그렸다.
“잊고 있었어요. 그 약 때문에 배가 안 아프다 보니.”
“아이고, 저런.”
“어떻게 하죠?”
잠깐 생각해 보던 부인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이참에 그냥 오늘 다 말하시는 겁니다. 아이를 가진 게 아니라 달거리 날짜가 됐다고.”
“아…… 그래야겠네요.”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그래도 더는 미루지 않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