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열네 개의 시체2021.09.29.
진실을 얘기했을 것이다. 쿵쿵! 마침 그 순간 다급히 그들을 부르는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주군! 계십니까? 죄송합니다만 급한 일입니다!”
“…….”
뭐라고 리에네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댄 블랙이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면 욕설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잠시만.”
블랙은 가운이 벌어진 그 차림새로 침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뭔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리에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무슨 일인데.”
블랙이 직접 침실 문을 열었다. 쾅, 하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긴 했다. 블랙을 마주한 용병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지만 빠르게 할 말을 했다.
“불이 났습니다.”
“……뭐?”
“뭐라고요?”
리에네가 더 놀랐다. 안색이 극단적으로 하얗게 돌변했다.
“불이라니…… 맙소사.”
늘 가뭄을 걱정하는 나우크에서 불이란 가장 끔찍한 재난이었다.
“어디서요? 앞장서세요.”
리에네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잊었다. 블랙을 제치고 침실을 나서려 했다.
“공주님.”
블랙이 재빨리 리에네의 어깨를 붙잡아 말렸다.
“여기 있어요. 내가 갈 테니.”
“아니, 내가 가야……. 같이 가요. 불은 안 돼. 이 계절에 불은…….”
블랙은 잠깐 사이에 달처럼 희게 질린 얼굴을 안타까운 듯 매만졌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는 안 됩니다. 기다려요.”
“한 사람이라도 더 가야 해요. 성 안에 있는 사람들 전부를 깨워서…….”
“여기에는 연기도, 냄새도 없습니다. 얼마나 심각한지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가서 보고, 곧 사람을 보내 알려줄 테니 걱정 말…….”
블랙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쿵쿵쿵!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귀를 때리며 다가왔다.
“주군! 마침 나와 계셨……! 불이 심상치 않습니다.”
한 발 나중에 도착한 용병이 숨을 몰아 내쉬며 빠르게 내뱉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무래도 누가 일부러 하는 짓 같습니다.”
“안 돼!”
리에네가 소리를 질렀다. 불도 끔찍한데 누가 일부러 하는 짓이라니. 그건 저주나 다름없었다.
“이것 좀 놔주세요.”
리에네가 정신없이 블랙의 손을 밀어냈다.
“경비대는 불이 난 걸 알고 있나요? 성 안에 물이 얼마나 남아 있죠?”
“불침번을 서는 경비대는 전부 불을 끄고 있습니다. 나머지한테도 알리는 중입니다.”
“불이 제일 크게 난 곳은요?”
“처음 시작된 곳이 부엌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짓이라는 생각을 못 하고, 누가 실수로 화덕 불을 남겨두었을 거라…….”
“그만하면 됐어. 공주님.”
줄줄이 보고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블랙이 말을 끊었다.
“들어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공주님 안전을 보장 못 합니다. 내가 연기를 막아 줄 수는 없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 건 나도 알…….”
“그 몸으로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블랙은 차가운 말투로 리에네의 말을 자르고 몸을 침실로 밀었다.
“읏, 이러지 말…….”
버티는 힘이 무의미할 정도로 손쉽게 몸이 떠밀렸다. 블랙은 더는 말없이 문을 쾅 닫았다.
“하나는 남아서 공주님을 지켜. 너는 길을 안내해라. 성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데가 어디야?”
“부관께서 북쪽 탑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쪽에 계십니다.”
블랙은 대답할 시간마저 아낀 채 몸을 돌렸다. * * * 쿵쿵!
“문 열어요!”
리에네가 있는 힘껏 주먹으로 침실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몸으로 막고 있는 문은 제 힘으로는 조금도 열 수 없었다.
“날 가둬서 뭘 어쩌려는 건데! 당장 비켜서!”
“아니, 저……. 주군 말이 맞습니다. 연기를 들이키면 해롭습니다. 그, 아기한테…….”
“그게 아니라고!”
쾅! 주먹에 감정을 실었더니 손이 얼얼했다. 리에네가 다른 손으로 빨개진 주먹을 감싸고 숨을 후욱, 내쉬었다.
“어떻게 하면 열어 줄래요?”
“꿈도 꾸지 마십시오. 주군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게 아니면 못 비킵니다.”
“…….”
그럴 사람들이긴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창문을 열고 나갈까. 턱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움직여서 발코니가 있는 데까지만 가면…….
“……그게 되겠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던 리에네가 허무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이렇게 앉아만 있어도 된다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나우크 성의 모든 일은 이제껏 전부 리에네의 책임이었다. 오래된 성에 쥐가 있는 것도, 그래서 밧줄을 갉거나 곡식 포대를 뜯어 놓는 사소한 일도 전부 리에네가 해결을 생각해야 했다. 성의 규모에 비해 일하는 사람이 너무 적었고 상주하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자기 일만으로도 너무 바쁜 사람들을 또 다른 일로 바쁘게 하느니 자신이 나서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리에네는 언제나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보호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상해. 자꾸…….”
……이러다 익숙해질 것 같아. 블랙이 나우크에 발을 들인 이후부터 리에네는 계속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블랙이 선물처럼 해결을 안겨 주었다.
“이건 좀…….”
위험하지 않나. 내가 이렇게 남한테 떠맡기는 성격이었나.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런 적 없어. 그러니까 그 남자 탓이야. 그 남자라서 그래. 그가 자신의 속에 있는 어떤 빈자리에 찾아와 철컥 맞물린 기분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리에네가 가슴에 살짝 손을 올렸다. 마치 그곳이 블랙이 맞물린 부분이라는 듯.
“왜 이별하면…….”
가슴을 도려내는 기분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만큼이 사라지는 거니까. 그건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블랙이 제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게 있기도 하구나……. 시인이라면 이 감정에 더 그럴듯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
그 자리에 앉은 채 블랙을 생각하던 리에네는 밖으로 나가는 일에 미련을 접었다. 블랙을 믿었다. 그가 있는 성에서 자신이 위험할 일은 없었다.
“침대로 돌아가 있자.”
괜찮을 테니까. 만약 상황이 위험해진다 해도 와서 알려주겠지. 걱정을 다독인 리에네가 몸을 일으켜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
리에네는 몹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자는 사람이 없어 불을 켜지 않은 블랙의 침실에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누……!”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는 너무 빨라서 믿기지 않는 동작으로 리에네의 입을 막았다.
“……!”
리에네가 있는 힘껏 몸을 비틀어 저항했다. 그러나 상대는 너무 빨랐고, 너무 능숙했다. 그는 턱 아래 동맥을 정확히 눌러 리에네가 정신을 잃기를 기다렸다.
“…….”
죽을힘을 다해 버둥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입이 막히고 동맥이 눌린 상황에서 빠르게 의식이 멀어져 갔다.
“…….”
마침내 눈이 감겼다. 소리 없이 나타난 그는 기절한 리에네를 소리 없이 제 등에 걸쳤다. 그가 입은 검은 옷에서는 매캐한 불내와 재 냄새가 동시에 났다. 이어서 그가 향하는 곳은 블랙과 리에네의 침실 중간에 있는, 지금은 정체성을 잃은 그 방이었다. 방 한 구석에는 팔지 않은 채 방치된 원통 모양의 철제 벽난로가 있었다. 천장이 높은 만큼 둥근 기둥처럼 생긴 벽난로는 아주 컸다. 소리 없이 벽난로의 문을 연 그는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끼이익. 최소한의 소음을 남기고 안에서 문이 당겨졌다. 그는 미리 묶어 두었던 끈을 이용해 걸쇠마저 내렸다. 얼핏 눈에 띄지도 않는 가느다란 끈은 사실 머리카락이었다. 그가 머리카락 끝에 부싯돌을 부딪쳐 불을 붙이자 머리카락은 빠르게 타들어 갔다. 약간의 냄새 외에는 재조차 남기지 않는 게 머리카락이었다. 게다가 냄새는 금방 사라졌다. 그러자 방 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 * *
“……으……. ……?”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 리에네는 계속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것 같은 정신을 억지로 끄집어 올렸다. 내가…… 어떻……. 왜…….
“힘들게 일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
“시간은 많으니까.”
“……!”
누구의 목소리인지 기억났다.
“그대는……!”
리에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양 손목과 발이 묶여 있어서 쉽지 않았다.
“클리마 종제!”
대사제를 살해한 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중이라는 그가 제 눈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를 왜……!”
“죄송합니다.”
클리마의 목소리는 이 어둑하고 음침한 곳에서 공포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 빗소리처럼 서글프게 들려왔다.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 누구한테…… 설마 클라인펠터가 시켰다고? 그자는 감옥에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명을 받아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대체 그자가 무슨……. 아니, 나를 풀어 줘요. 어서. 나우크에서 내 명령에 우선하는 명령은 없어요.”
“죄송합니다. 안 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클리마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리에네는 희미한 달빛에 반사된 물방울을 알아보았다.
“…….”
클리마는 울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어깨를 둥그렇게 만 채 흐느끼는 그가 살인마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리에네는 한숨을 내뱉고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쁜 사람……은 아냐. 지금 우는 건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그 속죄의 기도처럼. 남을 해치는 게 너무 괴로워서 자기 몸을 해치는 사람이야. 정신 차리고, 말을 시켜야 해.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해. 클라인펠터가 이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내면 돼.
“그대가 대사제를 죽인 것 또한 클라인펠터의 명령이었나요?”
“……그렇습니다.”
부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클리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도 아무 답이 없는 신보다 누구에게든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또 무슨 일을 시켰나요?”
“……예하를…….”
“밀로드 예하를 죽였다는 얘기는 방금 했잖아요.”
“모티야 예하…….”
“무슨 그런……! ……하아.”
리에네가 울컥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고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대고 있었던 거야, 그 인간은. 무려 두 명의 대사제를 죽여 없었다. 그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클라인펠터가 그렇게나 교만하고 안하무인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사제조차 내키면 죽여서 갈아 버릴 정도였으니 무서운 게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물려받은 왕관 따위, 클라인펠터의 눈에는 보석이 박힌 머리 장식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도 죽였나요?”
“……네.”
“얼마나?”
“……열셋.”
클리마는 울음을 삼키면서도 정확한 숫자를 읊었다. 그가 늘 자신의 죄를 살갗에 새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공주님까지 더하면 열넷이 됩니다.”
“…….”
그 말에는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죽이라고 하던가요?”
“아니요.”
“클라인펠터가 나를…… 죽이라고 하던가요?”
“아니요.”
클리마가 양 볼의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두 눈은 곧 다시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잡아와 욕을 보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돌려놓으라고. ……다들 볼 수 있는 곳에.”
“미친…….”
너무 끔찍한 나머지 속이 울렁거렸다. 감히 일국의 통치권자를 두고 그런 짓을 지시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일을 지시한 이유 역시 너무 악랄했다.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망가트리려고 한 거야. 그 남자를…… 떼어놓으려고. 너무 저열하고 독살스러웠다. 그런 사고를 하는 클라인펠터가 저와 같은 인간이라고도 믿기지 않았다.
“종제님.”
리에네가 분노를 잠시 억누르기 위해 묶인 손으로 꽉 주먹을 쥐었다. 화는 나중에 내도 돼. 무사히 돌아간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