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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21년 전 (1) (53/145)

53. 21년 전 (1)2021.10.03.

화제는 산발적이긴 했지만 크진 않았다. 다만 성의 규모가 있다 보니 또 어디에 불씨가 살아 있을지 몰라 잔일이 많아졌다.

16550950376623.jpg“후, 이제 거의 다 된 것 같습니다. 그만 들어가 보셔도 되겠습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페르모스가 블랙의 등을 떠밀었다. 사실 그 전까진 말을 붙이고 싶어도 못 붙였다. 블랙이 앞장서서 물동이를 옮기고 불을 끄는 것까진 좋았다. 그러면 다른 녀석들도 죽어라 몸을 움직였으니까. 그런데 꼭 저렇게, 뭐 하나 때려잡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는 험악한 얼굴로 있을 필요까지 있는 걸까. 소소하게 가구나 카펫에 탄 자국이 남는 정도로 화재가 마무리된 건 팔 할이 블랙의 역할이었다.

1655095037663.jpg“확실한가? 불이 번지는 일은 없어야 해.”

16550950376623.jpg“그야 물론…….”

1655095037663.jpg“네 목을 걸어라.”

16550950376623.jpg“……네, 네?”

1655095037663.jpg“불을 상당히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

16550950376623.jpg“…….”

블랙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페르모스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불을…… 그래…… 공주님께서 불을 무서워하시는군. 그러니까 당연히 내 목도 걸어야 하고…… 그래…… 그렇구나…….

1655095037663.jpg“불을 틈 타 기어들어 온 놈은?”

16550950376623.jpg“찾는 중입니다, 주군.”

1655095037663.jpg“놈을 못 찾으면 불도 안 잡힌다.”

16550950376623.jpg“예, 물론입니다. 보나 마나 지하에 갇힌 놈 짓일 테니 내려가서 정중하게 질문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1655095037663.jpg“허락한다. 정중하지 않아도 돼.”

16550950376623.jpg“예, 주군.”

나우크에서 시작하는 새 삶에 아직 적응이 된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클라인펠터와 그 무리들을 괴롭히는 건 확실히 새로운 소일거리가 되었다. 페르모스는 신이 난 얼굴로 지하 감옥에 내려갈 생각을 했다.

16550950376623.jpg“주군은 이제 공주님께 가실 겁니까?”

1655095037663.jpg“아직. 불을 지른 놈이 잡히면.”

그는 아무래도 리에네에게 좀 더 기다리라는 식의 말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16550950376623.jpg“알겠습니다. 저는 먼저 지하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러나 블랙은 리에네에게 한시라도 빨리 돌아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불을 지른 범인을 왜 성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지도 빨리 깨달았을 테니까. * * * 리에네는 침착해지려고 애를 썼다.

16550950397882.jpg“나는 그대가 클라인펠터 같은 악인이라고 믿지 않아요.”

눈을 크게 떴던 클리마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16550950376623.jpg“아닙……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씻지 못할 죄를 많이도 저질렀습니다…….”

16550950397882.jpg“전부 클라인펠터가 시켜서 한 짓이잖아요.”

16550950376623.jpg“…….”

클리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16550950397882.jpg“속죄를 원하면 죄를 짓는 일부터 그만두세요. 그러지 않고서야 아무리 자기 몸에 채찍질을 해도 피만 흘리고 말 뿐이에요.”

16550950376623.jpg“저는…… 어쩔 수가…….”

16550950397882.jpg“왜 안 된다고만 하는 거죠? 클라인펠터가 시키는 짓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대는 신을 섬기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대사제를 둘이나 죽였어요. 신의 목소리를 지운 거예요.”

16550950376623.jpg“저는…… 원해서 종제가 된 게 아닙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클리마는 고통스러워했다.

16550950397882.jpg“그럼요?”

16550950376623.jpg“그렇게 하라고 해서…….”

16550950397882.jpg“누가? 클라인펠터가? 대체 왜요? 그래야 대사제를 죽이기 쉬우니까?”

16550950376623.jpg“……그래야 숨기기 쉬우니까.”

16550950397882.jpg“무엇을요?”

16550950376623.jpg“저라는 인간을.”

16550950397882.jpg“그대를 왜 숨겨야 했나요? 누구한테서요?”

16550950376623.jpg“…….”

클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리에네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그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다지만 제 입으로 욕을 보이려 한다고 말한 이상 두려웠다.

16550950397882.jpg“가까지 오지 말아요. 대답해요.”

16550950376623.jpg“죄송합니다…….”

클리마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손을 뻗었다.

16550950397882.jpg“안 돼! 하지 마!”

16550950376623.jpg“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16550950397882.jpg“정신 차려요!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하면서 살 건데!”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리에네는 필사적으로 공포를 참았다. 하지 말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금 클리마를 움직이는 것은 클라인펠터의 명령이었다. 클리마에게 그 무엇보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그 부분을 건드려야 했다.

16550950397882.jpg“나를 살려둘 거라고 했죠? ……맹세해요. 나는 살아남아서, 반드시 클라인펠터를 죽일 거예요.”

16550950376623.jpg“…….”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클라인펠터가 죽는다는 말에 클리마는 손을 움찔대며 반응을 보였다.

16550950376623.jpg“크, 클라인펠터를 죽인다고……. 그, 그러면…….”

더듬으며 되묻는 말투는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모양새였다. 리에네도 방금 전까진 그랬다. 클라인펠터를 죽이는 건 나우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일이었고, 리세베리 조약으로 묶여 있는 여섯 가문의 굴레는 너무 단단했다. 그런데, 더 이상은 안 되겠어. 클라인펠터가 저지른 짓은 리에네가 여섯 가문과 위태롭게 줄다리기를 하며 일궈가던 평화가 얄팍한 거짓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나우크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인간이었다. 이번 일이 통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일을 계속 시도할 것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도 그는 리에네에게 손을 댈 수 있었다. 리에네뿐 아니라 신전이나 대의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서 잘라내야 해. 아무리 뿌리가 크더라도. 잘라내지 않으면 그 뿌리는 결국 나우크를 전부 집어 삼킬 것이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었다. 나한테는 티와칸이 있으니까. 대륙에서 가장 사납고 무서운 용병단이 지금은 아르사크의 수호기사단이 되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16550950397882.jpg“나를 욕보인다고 내 정혼자가 나를 떠날 것 같아? 어림도 없어. 그건 클라인펠터 같은 더러운 작자나 꿈꾸는 일이야.”

그 말을 하는데 어쩐지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 남자는 복수를 잊겠다고 했어. 원수의 아이라도 받아들이겠다고 했어. 내가 자기한테는 집이라서. 만일 클리마가 명령을 이행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클라인펠터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죽음을 말릴 이유가 없으므로.

16550950397882.jpg“그대가 명령을 따르면 클라인펠터는 죽어요. 하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죽을 거예요. 내가 죽일 테니까. 이래도 저래도 결과가 똑같다면, 그대는 무얼 선택할 건가요?”

16550950376623.jpg“클라인펠터가…… 사라지면…….”

클리마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16550950376623.jpg“그러면 더는…… 아, 하지만 저는 그래도 숨어 살아야……. 아니, 그럼 어머니는…….”

16550950397882.jpg“네? 어머니라고 했나요?”

두서없는 혼잣말은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클라인펠터는 클리마의 약점을 쥐고 있었다. 그게 모친일 것이다.

16550950397882.jpg“모친이 클라인펠터한테 잡혀 있나요?”

16550950376623.jpg“그렇…… 아니, 아니! 이, 이런 말은……!”

한발 늦게 실수를 알아차린 클리마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16550950397882.jpg“괜찮아요. 말해도.”

그를 회유할 방법이 생겨났다. 리에네는 할 수 있는 한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클리마를 달랬다.

16550950397882.jpg“그대가 죄인이라 해도, 나는 클라인펠터의 죄가 훨씬 더 크다는 걸 압니다. 모친의 안위가 걱정이라면 그건 내가 돕겠어요. 그대의 모친에게는 그대가 저지른 죄를 묻지 않을 겁니다.”

16550950376623.jpg“그게……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클리마는 주먹을 꾹 쥐고 바닥에 거의 엎드리듯 몸을 웅크렸다. 떨리는 어깨는 그가 여전히 고통스럽게 울고 있다는 뜻이었다.

16550950397882.jpg“그럴 수 있어요. 내가 약속할게요. 그대가 더 이상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대도 모친도 무사할 거예요.”

클리마가 잔뜩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16550950376623.jpg“그게……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로 제 어머니를 죽이지 않으실 겁니까?”

16550950397882.jpg“그렇다고 하잖아요.”

16550950376623.jpg“제가 여기서 공주님을 놓아드리면,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그러면 어머니는 살려주실 겁니까?”

16550950397882.jpg“나는 이미 아르사크의 이름 앞에 맹세했어요. 살려줄게요. 그대도, 그대의 모친도.”

클리마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같은 얘기를 거듭 묻는 게 아니었다. 그와 클라인펠터 가에 얽힌 일은 지금 리에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두웠다. 클라인펠터가 그에게 하는 것은 모친을 빌미로 한 협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클라인펠터는 클리마와 클리마의 모친을 숨겨 주고, 그 대가를 받아내고 있었다. 클리마가 필사적으로 감추고 있던 것은 가문의 이름이었다.

16550950376623.jpg“제 어머니의 이름이…… 헨튼이라도 말입니까?”

16550950397882.jpg“……뭐, 라고요?”

뜻밖의 이름이 들려오는 바람에 리에네는 잠시 자신이 석상이 된 줄 알았다. 숨을 쉴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헨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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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5037663.jpg-헨튼. 나우크를 떠날 때 그게 제 이름이었습니다.

블랙이 말했다.

16550950376623.jpg-헨튼의 둘째 아들.

노인이 해준 말이었다. 리에네는 그게 블랙의 이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6550950397882.jpg“그대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아니, 그럼…… 그대가…… 설마?”

리에네는 눈을 부릅뜨고 클리마를 쳐다보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앳되어 보이기도 했으나 그 반대로 보이기도 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16550950397882.jpg“형제가…… 있었나요? 오래전, 21년 전에.”

클리마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16550950376623.jpg“역시 잊은 게…… 잊은 게 아니었어. 알고 있었……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형제가 있는지 물었을 뿐이었다. 클리마의 반응은 리에네의 이해 밖이었다.

16550950397882.jpg“진정해요. 뭘 잊지 않았다는 건지 나는 몰라요. 나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을 뿐이에요. 대답해요. 형제가 있었나요? 몇이나?”

16550950376623.jpg“……하, 하나.”

블랙은 헨튼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클리마가 형일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블랙은 클라인펠터의 사병들이 부친을 죽이는 광경을 봤다고 했다. 그는 혼자 도망쳤고, 그 뒤로 헨튼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모친과 형은 나우크에 남아 마찬가지로 이름을 숨긴 채 지내고 있었다. 블랙은 어쩌면 가족들이 살아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남은 가족들을 클라인펠터가 숨겨 주고 있었던 거지? 이 점은 확실히 모순이었다.

16550950397882.jpg“헨튼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기억하고 있어요?”

16550950376623.jpg“…….”

클리마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0950397882.jpg“말해 봐요.”

16550950376623.jpg“싫…… 안 됩니다. 그건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16550950397882.jpg“아니, 말해야 해요.”

16550950376623.jpg“안 됩니다…… 그러면…… 그러면 어머니가 죽습니다…….”

어지간해서는 입이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리에네는 질문을 바꾸었다.

16550950397882.jpg“그럼 부친에 대해서 얘기해요. 클라인펠터가 부친을 죽였나요?”

16550950376623.jpg“……네. 네, 그랬습니다.”

클리마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아마도 21년 전, 부친이 죽고 동생을 잃었던 그날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16550950397882.jpg“왜요?”

16550950376623.jpg“도망치게 했으니까.”

16550950397882.jpg“누구를?”

16550950376623.jpg“페, 페르난드…….”

16550950397882.jpg“페르난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리에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6550950397882.jpg“그가 누군가요?”

16550950376623.jpg“페르난드 왕자.”

16550950397882.jpg“왕자?”

클리마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기력을 빼앗기는 사람 같았다.

16550950397882.jpg“어느 왕국의 왕자죠? 페르난드 왕자는.”

16550950376623.jpg“……나우크.”

16550950397882.jpg“?”

너무 생소한 얘기라 잠깐 머리가 굳었다. 아바마마 이전에 다른 왕자가 있었다고? 나우크에? 선왕이 대관식을 치른 건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그러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리에네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왕실 가계도를 떠올렸다. 전전대의 왕은 아르사크와 핏줄이 닿긴 했지만 아르사크 가문은 아니라고 했던 게 얼핏 기억났다.

16550950397882.jpg“페르난드 왕자는 왜 도망쳐야 했나요? 무슨 잘못을 했기에.”

16550950376623.jpg“가이너스 가문의 왕이…… 죽었으니까. 죽였으니까.”

이제 기억이 났다. 전전대의 왕이 지녔던 성이 가이너스였다. 그는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래서 가장 근친한 핏줄이었던 아르사크 가문의 장자가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그게 선왕 레데르이자 리에네의 부친이었다. 리에네가 알기로는 그랬다. 왕실 기록서에 기록된 바도 마찬가지였다.

16550950397882.jpg“왕을 죽였다고요? 페르난드 왕자가?”

16550950376623.jpg“아니요.”

16550950397882.jpg“그럼?”

16550950376623.jpg“나우크의 일곱 가문이 그랬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16550950397882.jpg“뭐라고? ……일곱 가문?”

일곱 가문이라는 말을 내뱉는 턱이 아플 정도로 벌어졌다. 그래도 이 혼란을 다 쏟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리에네는 거푸 숨을 들이쉬었다.

16550950397882.jpg“지금 그대가 말하는 건…… 반역이잖아요. 나우크에 반역이 있었다는 건가요?”

16550950376623.jpg“……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헨튼은 기사였다. 가이너스 가문의 수호기사단에 속해 있었다. 나우크의 일곱 가문이 왕을 살해하자, 그는 왕의 핏줄을 도주시켰다. 페르난드라는 이름의 왕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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