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21년 전 (2)2021.10.06.
일곱 가문이 즉시 그 뒤를 쫓았다. 기사 헨튼은 도주에 실패했고, 일곱 가문의 사병에게 붙들려 목숨을 잃었다.
“그럼…….”
클리마의 고통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리에네의 혼란이 싹튼 시점도 거기였다.
“페르난드 왕자는 도주한 건가요? 아니면 함께 죽은…… 건가요.”
-부친을 죽이는 자들을 봤습니다.
블랙은 헨튼이 죽는 걸 눈앞에서 지켜보았다고 했다. 헨튼은 페르난드 왕자와 함께 가족들도 도주시킬 생각이었던 걸까. 그래서 둘째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갔다가 클라인펠터 가의 사병에게 뒤를 밟히고 죽었던 걸까.
“그건 모릅니다. 저는 그때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
기사 헨튼은 가족 전부를 도망치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장 어린 둘째 아들만 데리고 간 듯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죠?”
“클라인펠터가…… 왔습니다. 그리고…….”
일곱 가문의 반란은 은밀했다. 그들은 왕이 사냥을 떠난 틈에 일을 벌였다. 왕의 시체는 짐승들이 뜯어먹게 했다. 왕이 늑대의 이빨에 물려 죽은 게 아니라 사실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몰랐다. 왕을 호위하던 자들도 그 자리에서 함께 죽은 탓이었다. 혼자 끝까지 살아 페르난드 왕자를 빼돌린 헨튼은 일곱 가문의 적이 되었다. 클리마와 모친은 그래서 죽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린든 클라인펠터는 그를 살려주었다. 모친도, 클리마도. 클리마는 사실상 클라인펠터를 제외한 여섯 가문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클라인펠터는 그를 무슨 짓이든 해치우는 심부름꾼으로 부렸다. 클리마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을 대비해 클라인펠터는 모친을 제 집에 숨겨두었다. 모친은 인질이자 담보였다.
“가여운 삶이었네요.”
리에네가 조용히 진심을 흘렸다. 열세 명이나 죽인 클리마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였다. 그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악인의 손에 떨어져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깨닫기도 전부터 악인의 손발 노릇을 해야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벌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헨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헨튼은 이제 리에네에게 아르사크처럼 귀한 이름이 되었다.
“그, 그럼…….”
클리마의 눈에 섬광처럼 기대가 스쳐 갔다.
“어, 어머니를…… 살려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건 일곱 가문이잖아요. 벌은 그들이 받아야 해요.”
“…….”
그 말에 클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두 눈에서는 기대가 사라지고 대신 갈등과 혼란이 자리했다.
“내 말을 믿어도 됩니다. 나는 그대의 동생을 알고 있어요.”
“……네?”
“그는 내게 몹시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예요.”
클리마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떻게…… 어떻……? 동생은 그날 죽었는데…….”
“아니요. 죽지 않았어요. 살아서 다시 나우크로 돌아왔어요. 남은 가족이 살아 있는 걸 모르고서요.”
리에네는 그가 또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이 딱 울기 직전이었으니까. 리에네는 그를 다정히 안고 그만 울라고, 대신 기쁘게 웃는 얼굴로 동생을 보러 가자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
“동생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클리마는 울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 쥐었던 것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죽이셨습니다. 살려두면 일곱 가문의 손에 죽을 목숨이라고. 그러니 당신 손으로 죽이겠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대의 동생은 살아 있어요. 살아서 내게…….”
“페르난드 왕자의 옷을 입히고 심장을 칼로 찌르셨습니다. 그 칼을 제 손에 쥐여 주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말리지 못한 어머니는 혼절하셨고, 저는…… 아버지의 말대로 동생을…….”
클리마의 양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를 보는 리에네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얼굴이…… 피가…….”
기사 헨튼의 집에 들이닥친 린든 클라인펠터가 본 것은 페르난드 왕자의 옷을 입은, 얼굴이 망가진 딱 그만한 체구의 아이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클리마였다. 그 옆에는 피 묻은 칼이 떨어져 있었다. 클리마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린든 클라인펠터는 그가 반쯤은 망가져 버렸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심부름꾼으로 쓰고자 했을 것이다.
“그럼…… 그럼…… 도망친 사람은…….”
“동생이 아닙니다. 동생은 죽었습니다.”
“페르난드 왕자…….”
리에네가 이를 꾹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턱이 떨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귀가 멀 것 같았다.
-나우크를 떠날 때 내 이름은 헨튼이었습니다.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기사 헨튼의 둘째 아들 신분으로 도망쳤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와 정혼이 정해져 있었던 거야. 그 남자가 왕자였을 때.
-내게는 집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공주님입니다.
그건 말 그대로, 내가 자기 집에 있다는 뜻이었어. 그 남자는 돌아오고 싶었던 거야. 자기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아무것도 망가트리지 않은 채. 그래서 복수를 잊겠다고 했다. 그런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리에네는 비로소 블랙을 전부 이해할 수 있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아요. 기사 헨튼은 페르난드 왕자를 살렸고, 그러니 내게도 은인입니다. 은인의 가족으로 그대와 기사 헨튼의 부인을 대우하겠어요. 부디 그렇게 하도록 해 줘요.”
“……? 어째서 그렇습니까?”
클리마가 아주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페르난드 왕자가 내 정혼자니까요.”
“어, 어……?”
클리마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괜히 제 마음이 덩달아 불안해지는 듯했다.
“왜 그러죠?”
“어, 어째서……? 어째서?”
“로드 티와칸이 페르난드 왕자였어요. 그대의 동생이 아니라면 그게 확실한…….”
“공주님은 아르사크인데.”
“……?”
이유 모를 소름이 등줄기를 따라 번졌다. 어쩌면 클리마가 처음 ‘일곱’이라는 숫자를 입에 담았을 때부터 제 심장은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왜 일곱 가문인 걸까. 나우크에서 반역을 저지를 만한 가문은 여섯인데. 클라인펠터, 엘라로이덴, 버레이, 체르케스, 아르멘다리스, 로사델. 숫자가 일곱이 되려면 하나가 더 필요했다. 그 반역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가문이. 나우크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가문이. 아르사크 가문이.
“아…… 아…… 아아!”
리에네는 클리마가 머리를 감싸 쥐던 심정을 이해했다. 미친 것처럼 돌아가는 머리를 멈추게 만들고 싶었다. 리에네가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입을 벌렸다. 꽉 막힌 듯 갑갑한 신음이 새어나갔지만, 정작 제 머릿속에서는 정신 나간 굉음처럼 들려왔다. 나였어. 그 남자의 원수가. 그게 나였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였어. 그 남자가 죽여야 하는 사람은. 그건 나야…….
* * *
“…….”
리에네가 눈을 깜박거렸다. 어둡고 메마른 곳은 몇 시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깨어나셨군요.”
클리마의 목소리가 들려와 자신이 다시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그냥 있었습니다…….”
작게 기어들어 가는 클리마의 음성은 그들이 주고받았던 이야기를 삽시간에 떠올리게 했다. 페르난드. 페르난드 가이너스. 그게 그 남자의 이름이야. 그럼 나는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리에네가 계속 말이 없자 클리마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먹을 계속 쥐었다 폈다 했다. 이제는 눈물이 그친 모양이었다.
“저, 그럼 이제 어떻게……. 성으로 모셔다드릴까요……?”
클라인펠터의 심부름꾼으로 살 마음도 접은 듯했다. 퍽 다행이었지만, 생각만 그럴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남자는, 왜 나한테 청혼했을까요.”
“……네? 네?”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 싫었습니다.
대답은 머릿속의 블랙이 했다. 그래, 그건 이제 이해가 가. 그 남자 입장에서는 빼앗기는 게 맞겠지. 나우크도, 나도, 내가 가진 통치권도 원래 모두 그 남자 몫이었으니까.
“그럼 그냥…… 청혼만 했으면 됐잖아요. 혼인해서 통치권을 가져가 버렸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네?”
어리둥절해진 클리마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리에네는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쳐다볼 마음이 없었다.
“왜 나를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굴었을까요.”
-나는 집을 찾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돌아오기 위해서 복수를 잊었다는 말도 진심일지 몰랐다. 그는 언제든 나우크를 때려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만 집으로 돌아와서 쉬고 싶었던 걸까요……. 그냥 그렇게만 있으려던 걸까요.”
“…….”
클리마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리에네가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요……. 이름을 빼곤.”
이름을 속인 이유도 다른 것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이유와 같았다.
“그 남자는 내가 정말 모르길 바랐나 봐요.”
이름을 알려줬으면…… 내가 끝내 자기를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나는 그 남자가 언제 내 목을 따려나 노심초사하면서 티와칸을 견제한답시고 여섯 가문을 끌어들였겠지. 그게 내 집 앞마당에 독사를 풀어 놓는 짓과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 그래서 그랬을 거야. 그럼 전부 다 말이 되네. 어쩌면 나를 원한다는 것도,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도, 그래서 최선을 다해 지키겠다는 것도 진짜일 거야. 응, 그럴 거야…….
“성으로 돌아가겠어요.”
리에네가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던 게 거짓말 같았다. 리에네는 제 발로 일어나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클리마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말한 건 전부 진심이에요. 나는 그대의 죄를 벌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가이너스 가문의 왕을 죽이고 페르난드 왕자의 왕관을 빼앗은 아르사크의 핏줄에게는. ……그러고 보니, 거짓말을 한 사람이 또 하나 있었네. 블랙의 이름을 헨튼이라고 했던 자가 또 있었다. 신전 앞의 거지 노인이었다. 그 사람도 뭔가 알고 있는 거야. 그런데 거짓말을 했겠지. 페르난드 왕자를 위해서. 쓴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내게 사실을 전하려고 했었는데. 중간에 마음이 바뀐 건 그 남자가 중간에 손을 썼다는 소리겠지.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숨기는 게 있는 한 그걸 감추려는 작은 거짓말은 계속 생기기 마련이었다. 나도 그랬잖아. 그 남자한테 계속 계속 거짓말을 해야 했잖아. 어쩌면 그 남자하고 나는 평생 그렇게 살지도 몰라……. 리에네는 블랙의 비밀을 지킬 생각이었다. 페르난드 왕자의 귀환을 알게 된 여섯 가문의 반응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평생 속고 있을게요. 그래야 지켜지는 관계라면.
“지금까지처럼 숨어 계세요.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그사이 누군가 또 그대에게 클라인펠터의 명령을 전달해도 따를 필요 없습니다.”
“그, 그럼…… 그럼 어머니는 어떻게 되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헨튼 부인의 신변이 안전해지면 어떻게든 기별을 넣겠습니다. 이후의 선택은 그대에게 맡기겠어요. 원하면 나우크를 떠나도 좋고, 머물겠다 하면 새로운 신분을 새 이름과 함께 내리겠습니다. 그대의 이름이 헨튼이라는 건 누구도 모르게 하겠어요.”
“그래도…… 그래도 되는 겁니까. 제가…… 저도 그러면…… 저는 죄가 많은데…….”
“그 죄는 내가 떠안겠어요. 아르사크 가문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짓지도 않았을 죄니까.”
결론을 내리자 의외로 머리가 차분하게 굴러갔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말하세요. 내가 혼자 가겠습니다.”
“안내가 필요합니다. 길이 어둡고 미로 같아서…….”
“그런가요.”
그래도 클리마를 성 가까이 노출시키는 건 너무 위험했다.
“찾아갈 수 있게 자세히 말해 줘요. 그게 낫습니다. 종제님은 클라인펠터의 명령을 받은 적도, 그래서 나를 납치한 적도 없는 겁니다.”
“길을 잃으면 위험합니다. 여기는…….”
“그 또한 내 몫입니다.”
거지 노인의 말대로 아르사크의 딸이 피 흘리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대신 아주 많은 죄를 짊어져야 했다. 리에네는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