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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실마리 (55/145)

55. 실마리2021.10.10.

16550950797764.jpg-미로 같을 겁니다. 불은 금방 꺼질 테니 소용이 없습니다. 걸음을 잘 세야 합니다. 방향을 따질 수 없으니 온전히 걸음에 의지해야 합니다.

클리마는 아주 자세히 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리에네는 나우크 성의 지하가 이렇게 넓고 깊은 줄도, 이런 길이 있는 줄도 몰랐다.

16550950797764.jpg-클라인펠터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길을 알고 있던 자는 기사 헨튼이었다. 그가 페르난드 왕자를 안고 도망쳤을 때 이용한 길이라고 했다. 기사 헨튼이 가이너스 가문의 수호기사단이었던 것을 보면 그들끼리만 공유하던 일이었을 것이다. 가이너스 가의 위기 상황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비밀통로였을지 몰랐다.

16550950797774.jpg“가이너스 가문의 수호기사들은 그때 다 죽었으니까 아는 사람이 더는 없었겠구나.”

단 두 사람을 제외하면. 이제 자신까지 셋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무섭고, 좁았다. 그리고 단순히 길이라고 하기엔 조금 묘한 구조들이 남아 있었다.

16550950797774.jpg“문도 아니고 벽도 아니야. 대체 이런 게 왜 있는 걸까.”

좀 더 환하게, 자세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너무 어두웠다.

16550950797774.jpg“기록서를 살펴봐도 여기에 관해서는 남아 있지 않겠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얘기였으니까.”

리에네는 희미하게 드러나는 실루엣을 더듬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음을 셌다.

16550950797774.jpg“불은 다 꺼졌을까…….”

클리마가 시선을 끌기 위해 미끼로 놓은 불이었으니 아주 큰 불이 되진 않았을 것이라 했다. 그건 좀 다행이었다.

16550950797774.jpg“그래도 다들 고생했을 거야.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텐데, 음…….”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차마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16550950797774.jpg“…….”

순간 발목이 휘청해 리에네가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생각해야 해. 블랙은 리에네가 왜 사라졌는지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찾느라 애를 쓰는 중이겠지만 아직 들키진 않았다. 내 발로 사라졌다고 하면 믿지 않겠지. 그렇다고 종제님이 납치했다고 하면 종제님의 죄가 더 무거워질 텐데. 그 남자는 기사 헨튼의 가족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모를 거야. 모르니까 이제껏 가만히 있었을 거야. 기사 헨튼의 아들이 클라인펠터 가에 붙들려 암살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뭐라도 했을 거야. 그렇다면 나는 종제님의 정체를 감추는 게 나을까. 머리가 지끈대기 시작했다. 리에네는 빨라졌다 느려졌다 제멋대로 널을 뛰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를 썼다. 그래, 감춰야 해. 종제님을 만나고 왔다고 하면 내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들었다는 걸 짐작할 거야. 나는 페르난드 왕자는 몰라. 그 사람의 이름은 티와칸이야. 그리고 빨리…… 혼인식을 치르자. 그래서 통치권을 넘기는 거야. 그게 맞아. 그렇게 해야 해. 그러려면 리세베리 조약이라는 산을 넘어야 했다. 클라인펠터가 사라져야 해. 클라인펠터는 여섯 가문의 구심점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남은 가문의 힘은 여섯 중에 다섯으로 주는 게 아니라 절반으로 줄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야 리세베리 조약의 실체를 알 것 같아. 그건 왕관에 달린 빚이었다. 선왕이 얻은 왕관은 반역의 대가였다. 그 왕관을 쓰게 해 준 자들이 여섯 가문이었다. 그 순간부터 아르사크 가문의 왕관은 더 이상 왕관이 아니었다. 목줄과 다를 게 없었다. 왜 선왕이 여섯 가문에 질질 얽매여 있었는지, 리에네는 이제야 전부 깨닫게 되었다.

16550950797774.jpg“그래서…….”

……클라인펠터가 그렇게 굴 수 있던 거였어. 네까짓 게 뭐냐는 식으로. 그들에게 나는 왕족이 아니라 공범일 뿐이었으니까.

16550950797774.jpg“……맞아. 그러니까 벗어나겠어.”

21년 전부터 뒤집어쓴 죄의 굴레를. 여섯 가문은, 아니, 일곱 가문은 그때 지었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리에네가 힘껏 주먹을 쥐었다. 내 손으로 바로잡을 거야. 그게 나의 속죄야. 어쩌면 속죄보다는 애정이라고 불러야 할 각오가 심장을 아프게 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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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50950797764.jpg“틀렸습니다, 주군. 여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16550950814464.jpg“……그래?”

블랙은 창고에 묵혀 둔 마지막 술통 하나까지 전부 뒤엎어진 거대한 저택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리에네가 사라진 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그 시간 내내 티와칸은 쉬지 않고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곳들을 뒤졌다. 가장 먼저 뒤엎은 곳은 신전이었다. 클라인펠터가 저지른 짓이라는 건 확실했다. 그렇기에 보란 듯 제 집에 숨겨두진 않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새벽녘, 아무런 방비도 없던 신전을 깨끗하게 털어 클라인펠터의 심부름꾼인 그 종제나 리에네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기껏 삼분의 일 정도 올라가던 계단이 그 와중에 다시 깡그리 망가졌다. 그다음은 로사델 가였다. 엘라로이덴과 함께 클라인펠터를 면회 온 자가 로사델의 가주였다. 그런 식으로 클라인펠터와 연관이 있는 곳들을 전부 뒤엎을 생각이었다. 로사델 가로 향하는데 어떻게 알았던지 로사델의 사병들이 달려와 리세베리니 뭐니 지껄이며 길을 막았다. 블랙이 짧게나마 웃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비록 남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작은 조소였지만, 그는 고작 저 숫자로 제 앞을 막아선 자들의 순진함이 문자 그대로 우스웠다. 이들은 티와칸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아직 잘 모르는 듯했다. 티와칸의 수장을 왜 전쟁의 신이 낳아 버린 사생아라 불렀는지 한 번도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16550950814464.jpg-끼어들지 마라.

블랙은 그 말과 함께 칼을 뽑아 들었다. 페르모스가 한숨을 쉬면서 용병들을 뒤로 물렸다.

16550950814472.jpg-혼자 하시게요? 저희야 간만에 눈이 시원해지겠습니다만, 그래도 너무 힘을 쓰진 마십시오. 저것들에겐 아깝지 않습니까.

용병들은 아쉬움을 담아 괜히 칼을 절그럭거렸다. 로사델 가문에서 보낸 사병들의 숫자는 열여섯이었다. 무기를 쥔 손만 보아도 실력을 알 수 있었다. 블랙의 눈에 열여섯 명의 사병은 힘을 쓸 것도 없는 어린애들이었다.

16550950797764.jpg-으아…….

열여섯을 도륙하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전쟁터였다면 당연히 시체에서 쓸 만한 무기와 소지품을 챙겼을 테지만, 눈치 없이 지금 여기서도 그러겠다고 나서는 인간은 없었다.

16550950797764.jpg-저기, 하나 살아 있는데요. 팔 덜렁대는 놈이요. 그냥 놔둡니까?

용병 하나가 물었다. 답은 블랙이 직접 했다. 핏방울을 털어내던 칼을 다시 반대로 움켜쥐고 돌아가 목을 끊는 것으로.

16550950814464.jpg-클라인펠터 가로 간다.

블랙은 계획을 바꾸었다.

16550950814464.jpg-거길 부수면 누구든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누가 리에네를 데리고 있든, 전부 목을 끊어 놓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면 알아서 데려올 것이다. 리에네의 뜻을 존중해 여섯 가문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지금은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 진작 없애야 했다. 없애야 끝날 일이라고 리에네를 설득했어야 했다. 리에네는 나우크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막고자 했지만, 썩은 부분을 과감히 도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클라인펠터 가에 도착한 티와칸들은 문을 열라는 말도 없이 그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전에도 한 번 흠집을 만들어 놓은 적이 있던 문이 이번에는 단숨에 열렸다. 주인 없는 저택을 지킨답시고 덤벼드는 것들은 빠르게 목이 잘렸다. 어린애들 같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숫자가 꽤 되는 터라 시간은 좀 더 걸렸다. 그래도 클라인펠터의 저택을 장악하는 데 채 세 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클라인펠터 가의 앞마당은 목이 잘린 시체와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 엉겁결에 달려 나온 상주 일꾼들로 작은 전쟁터 같은 모습이 되었다.

16550950814464.jpg“입을 열 자들을 찾아. 클라인펠터라는 이름이 이 땅에서 사라져도 목은 붙여 놓겠다고 해라.”

16550950797764.jpg“네, 주군.”

티와칸은 신속했다. 없어진 사람을 찾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였다. 십 년간 전쟁터를 옮겨 다니며 인질을 잡는 일도, 찾는 일도 숱하게 했다. 블랙이 고른 방법은 가장 빠르면서도 효과적이었다.

16550950814472.jpg“저는 사실 그 종제가 그간 여기에 숨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페르모스가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16550950814464.jpg“…….”

16550950814472.jpg“그만큼 찾아도 없다는 건, 결국 찾지 않을 곳에 있다는 소리니까요. 감옥에서 클라인펠터와 접촉한 인간들이 여기로 와서 종제에게 말을 전달했고, 그래서 종제가 일을 벌인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페르모스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단지 클리마가 리에네를 데려온 곳이 클라인펠터 가가 아닐 뿐이었다.

16550950814472.jpg“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을 할 정도로 단순한 작자라면 참 좋을 텐데요.”

이어지는 발언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16550950814472.jpg“그런데 그자…… 아무래도 훈련을 받은 것 같지 말입니다. 대사제를 처리한 솜씨는 둘 중의 하나로 보였습니다. 운이 너무 좋았거나, 아니면 살인에 너무 능숙하거나.”

16550950814464.jpg“…….”

블랙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걸 확인한 페르모스가 다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16550950814472.jpg“뭐, 훈련을 받았다고 꼭 머리까지 잘 돌아가라는 법은 없지만 말입니다. 영리하기까지 한 인간이라면 정체까지 위장해 가면서 클라인펠터 가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만한 보상이 없어 보였는데요.”

16550950814464.jpg“…….”

클리마의 정체를 알고 있는 블랙에게 그 말은 좀 더 복잡한 의미로 다가왔다. 마나우의 애원이 아니더라도 그는 헨튼의 첫째 아들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헨튼은 왕족의 목숨 하나를 구하겠다고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그중에는 둘째 아들의 피도 있었다. 내키든 내키지 않든, 자신이 살아서 나우크에 돌아온 이상 빚은 빚이었다. 갚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16550950814464.jpg“……수 없으려나.”

하지만 리에네가 얽힌 이상 얘기가 달라졌다. 헨튼이건 뭐건 빚의 무게는 사라졌다.

16550950814472.jpg“뭐가 어쩔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페르모스가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16550950797764.jpg“주군! 뭔가를 찾았습니다!”

드디어 소식이 전해졌다. 휙! 페르모스가 안도를 느끼기도 전에, 블랙은 이미 바람 소리를 내며 달려가고 있었다. * * *

16550950797764.jpg“여깁니다.”

쾅! 티와칸이 찾은 것은 별채의 은신처였다. 은신처라기보다는, 차라리 고문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장소였다. 일꾼들이 사용하는 작고 허름한 방 침대 밑에 만들어진, 관보다 조금 넓은 공간은 숨쉬기도 버거워 보였다. 뚜껑처럼 생긴 문을 완전히 열자 그 안에는 같잖게도 기도서와 끝이 갈라진 채찍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16550950814472.jpg“그 종제의 은신처라는 게 확실하겠군요.”

페르모스가 기가 찬 듯 혓소리를 섞어 중얼거렸다.

16550950814472.jpg“이 방을 쓰는 인간이 누구야? 가서 데려와.”

16550950797764.jpg“벌써 준비해 놨습니다. 어이.”

비좁은 방 밖을 향해 손짓을 하자 다른 용병이 여인 하나의 팔을 붙들어 끌고 왔다.

16550950797764.jpg“이 방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듣기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거의 입을 열지 않는답니다.”

쿵! 팔을 놓자 여인이 무릎으로 주저앉았다. 여인은 한눈에도 너무 말라 있었다. 거칠게 다루는 게 아닌데도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는 희게 세고 입가의 주름이 깊어졌지만 블랙은 여인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기사 헨튼의 부인이었다. 아마도 헨튼 부인이 클라인펠터가 헨튼의 아들을 자객으로 부려먹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블랙의 눈이 한층 더 새파래졌다.

16550950814464.jpg“……네 아들은 어디 있나?”

16550950797764.jpg“……?”

헨튼의 부인은 어딘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16550950797764.jpg“아, 아니……. 아니…….”

16550950814464.jpg“여기 있는지 없는지만 말해. 그럼 더 이상 묻지 않겠다.”

16550950797764.jpg“……!”

헨튼 부인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지지 못했다. 헨튼 부인 역시 블랙을 알아보았다. 21년 전 제 아들의 옷을 입고 남편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던, 작고 어렸던 왕자를. 저 연한 푸른색 눈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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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아들이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을 저 눈을 한 아이가 입었다. 저 눈만 아니었다면 그냥 그를 제 둘째 아들이라 믿었을지도 몰랐다. 남편의 칼에 심장이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아이가 페르난드 왕자라고 여기면서. 그러니 잊을 수 없었다. 몰라볼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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